자관

아이하펜_기적汽笛

드림

피오드던전은 축축하단 말로 일축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아침이라면. 상자가 풀숲에 숨은 것이 미믹인지 보물상자인지, 다른 곳보다 분간이 어려웠다. 소리를 놓치면 열쇠가 떨어졌는지 눈치 채지도 못했다.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하면 해가 저물기도 했다. 어두운 사방에 던전이 산속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무너지고 돌이 빠진 성벽을 짚고 서서 여기가 피오드 던전임을 상기했다. 이멘 마하를 두른 성벽과는 감촉이 달랐다. 식은 땀을 흘리는 몸 같았다. 열기라곤 없이 손바닥에 물기가 잡혔다. 거친 표면은 병상에 누워 갈라진 입술 각질에 견줄까. 등뒤로 닫히는 창살과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는 당연 병자가 아니었다. 병마라 부르기엔 느긋하지 않았다. 자칼이 눈이 마주치자 마자 달려들지만 그 뿐이었다. 고르곤은 한 발짝 움직이기도 전에 뿔로 들이받았다. 달려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활시위를 당기기는 어려웠다. 그게 가능한들 화살이 가죽을 뚫지 못했다. 랜스를 쓰기에도 필요한 거리를 만들지 못하니, 깊숙이 넣어둔 글라디우스 두 자루를 꺼내야 했다. 두 자루 모두 입맛대로 손잡이를 바꾸고 날을 벼렸다. 그런데도 칼자루를 쥔 손을 내려다보면 어색했다. 어떻게 휘두르고 찔러 넣을지는 머리로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실행도 가능했다. 이것으로 베고 찌르는 것이 나라는 사실이 어색했다. 분명 활 다음으로 잡은 무기인데. 새삼스러워 하는 일은 이쯤해야 했다. 아예 야영을 생각한 먼 길, 그것도 진입로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1층부터 고르곤이 나타나진 않으니 활을 꺼내 들었다. 제단에서 흙길로 내려왔다. 무른 흙을 뭉개고 다음 발, 또 다음 발자국을 떼어 첫 번째 방에 들어왔다.

울라의 던전이 으레 그렇듯 1층은 별 볼일 없었다. 에린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첫인상에 속아 몇 번이고 죽음을 맞았다. 여신상 앞에서 눈을 뜨면 붕대부터 감았다. 습관적이라 해도 좋았다. 골절이나 내상도 없이 상처만 쓰라렸다. 죽음의 흔적은 그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환생을 하면 말끔히 사라졌다. 밀레시안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기억을 끄집어내니 새삼스러웠다. 언제부터였더라. 헤아리려다 고개를 털었다. 활시위를 당기면서 잡생각을 해봤자 여하간 득이 없었다. 비유로나 물리적으로나 앞만 보았다. 가장 가까운 개체부터 쏘아 맞췄다. 비슷한 거리라면, 다른 녀석의 시선을 받지 않는 쪽을 골랐다. 어차피 다음 타깃이 되었지만. 판단은 즉각적이었다. 화살을 장력에 실어보내자마자 다음 살을 꺼냈다. 단말마를 들은 놈이 자세를 낮추고 하악질을 했다. 눈이 마주치자 몸을 거의 웅크리다시피 했다. 튀어오를 준비였다. 이번 판단은 경험에 의지했다. 거리를 좁힌다고 근접무기를 꺼내려 했다가는 도리어 자칼에게 시간을 내주는 꼴이었다. 더군다나 등에 맨 건 랜스였다. 활대로 자칼을 받아쳤다. 운 좋게 아래턱이 얻어걸렸다. 쓰러진 놈이 시야를 회복하기 전에 활을 당겼다. 활치고 요란한 마무리였다. 녀석이 마지막 한 마리가 아니었다면 여기저기 이빨자국이 생겼겠다. 소매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땀이 식어 손이 굳으면 곤란했다. 불을 지피자니 온기가 들이닥치면 늘어질 게 뻔했다. 그도 경험이 내린 판단이었다. 대신 육포를 꺼냈다. 입에 뭐라도 물면 불만이 누그러졌다. 물도 한 모금, 그루터기에 잠깐 앉을 핑계마저 없앴다. 그래놓고 새소리에 우뚝 멈췄다. 작은 새가 퍼뜩 그려졌다. 동화 속 오솔길까지 이어지기 전에 기지개를 켰다. 늦으면 투아하 데 다난이, 아이던이 나를 또 잊을지 몰라. 선물을 구하러 떠났다가 잊히다니.

바이올렛 씨앗을 구하기는 쉬웠다. 보통은 화분에 심을 테다. 델, 델렌 자매에게 다른 꽃을 사거나. 그 자매는 한 송이부터 다발, 화관도 팔았다. 아이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면 어떤 낯빛을 할까. 누가 주는 것이니 내던지진 못하고 얼굴만 벌개질 게 뻔했다. 자매가 꽃장사를 하는 광장엔 음유시인 네일이 상주했고, 그치가 있는 이멘 마하는 두 대도시 사이에 있었다. 밀레시안이 산 꽃이 근위대장 손에 있더란 소문은 선물이 아니었다. 내가 씨앗을 던진 건 피오드던전이었다. 그러면 보스룸에 바이올렛이 피었다. 밀레시안이나 건넬 법한 선물이었다. 그런 이유로 골랐지 아이던이 좋아할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숲은 들어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해가 중천을 넘어간 지 오래건만 나른한 오후 같은 건 없었다. 날이 저물면 냉기며 적막이 온몸을 감쌌다. 쉴 시간이 녹록치 않으니 그쪽으론 다른 던전보다 빡빡했다. 보스룸에 다다라서야 불을 피웠다. 주저 앉아 손발부터 녹였다. 다른 곳, 특히 라비나 마스던전이었다면 냄비를 불에 올렸다. 던바튼 지하까지 뻗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넓은 던전이었다. 층수도 많아 아예 며칠을 보낼 마음으로 들어섰다. 그런 들 많은 짐을 꾸릴 순 없었다. 고기조각에 야채를 조금 넣고 끓인 게 식사였다. 배가 차지는 않아도 몸을 데우기엔 충분했다. 뜨거운 물을 잔뜩 마셨으니. 던전을 나오거든 무기점에 보수를 맡기고 식당부터 찾아갔다. 의자에 앉아 음식을 고르고서야 진리품을 살폈다. 지금은 딴판이었다. 스프에 따끈한 빵을 찍어 먹고 싶었다. 이런 으깬 감자만 바른 빵 말고. 닭고기와 버섯을 한 숟가락에 떠먹으면 각각 부드럽고 탱글한 식감이 잘 어울렸다. 첫 술부터 서둘렀다간 혀를 데였다. 후후 불며 천천히 입에 넣어야 했다. 그러다보면 잉어구이가 나왔다. 바삭하고 짭조름한 겉껍질은 금방 이에 부숴졌다. 뭉그러지는 살을 잘 씹어 삼키고 싶었다. 이멘 마하의 로흐 리오스는 디저트도 괜찮았다. 가토 오 쇼콜라까지 먹는 건 과한가 생각하다가도 돌아서면 아쉬웠다. 한 번은 포크 옆 날로 그릇을 긁어 먹었다. 아이던과 로호 리오스에 갔던 날이었다. 잘 드시니 다행이라 말했다. 아이던은 식사도 이멘 마하 성에서 해결했다. 로호 리오스의 명성이며 모험가들 사이의 명성만 듣고 식사대접을 하자니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마침 호수 위로 구름 그림자가 지나갔다. 식사는 평온했고 마을 전경은 시쳇말로 그림 같았다. 이멘 마하 주민들은 외지인만큼 호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지나는 길목이 호숫가일 뿐이겠다. 아이던도 그러리란 생각에 그 구름 그림자를 기억했다.

일어나 모닥불을 꺼트렸다. 창살 너머로 아마도 골렘일 커다란 암석과 바이올렛이 보였다. 아이던은 꽃을 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이 있다고 했다. 파인하펜 씨도 물론입니다.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그런 말도 들었다. 어쨌거나 반감을 살 구석은 없어 보였다. 그간 선물을 건넬 적마다 아주 기쁜 마음은 아니더라도 싫은 기색은 없었다. 수호의 부적을 내밀었을 때나 당혹감을 내비쳤다. 이내 감사를 표했지만 몸에 지니지는 않았다. 내게는 항마의 로브를 만들어주지 않으려 했고, 틈만 나면 무리하지 말라 말하는 사람이었다. 내 생명력을 방패 삼는 부적을 쓸 리가. 간직했다가 이따금씩 꺼내보기나 하리라. 내가 준 것은 증표 내지는 정표인 셈이었다.

감상에 젖어드는 일은 제쳐두고, 보스룸 열쇠를 꽂아 돌렸다. 골렘은 바위 답게 화살을 튕겨냈다. 서포트샷으로 틈을 짜내는 용도 외엔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호흡을 느리게 해봤자였다. 오히려 쿵쿵대는 심장박동이 두드러졌다. 랜스를 단단히 잡고 발을 굴렀다. 목표는 방 한가운데 돌무더기였다. 다다랐을 즈음 골렘이 기척을 느끼고 꿈틀거렸다. 그런 들 선취점을 따낸 건 내 쪽이었다. 랜스차지에 바위가 밀려 땅이 패었다. 바이올렛이 밟혔다간 수포였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시늉을 했다. 따라오리라 생각했건만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여파에 몸이 휘청하며 밀려났다. 다가오며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보다 가슴의 고동이 크게 느껴졌다. 골렘이 다시 팔을 들어올렸다. 따라하듯 랜스에서 활을 바꿔들었다. 관절이랄 게 없는 암석이 공중에서 빙빙 돌았다. 골렘이라면 열에 아홉은 마력이 흐르는 중심이 정해져 있었다. 사람으로 따지면 명치, 위치도 비슷했다. 화살로는 아예 부숴놓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 대부분에 들어갔다. 골렘이 멈칫하는 사이 랜스를 찔러넣었다. 후벼파내듯이 비틀어 뽑았다. 후두둑 바위들이 땅에 떨어졌다.

고맙습니다.

아이던은 꽃을 내려보다 곧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미소도 함께였다. 물건보다는 건네는 마음을 헤아리는 얼굴이었다. 부러질라 한 손에 가볍게 쥔 것까지, 도리어 내가 선물을 받은 게 아닐지. 따라 웃는데 아이던이 필첩을 내밀었다. 일기장으로 쓰기엔 작고 수첩으로 들고다니기엔 불편한 크기였다. 갈피끈을 기준으로 책배의 색이 달랐다. 짙게 변한 쪽이 반을 넘어갔다. 표지가 상하지 않아 책배가 아니었다면 새것으로 보였다. 아이던이 물건을 거칠 게 쓰는 사람이 아니란 걸 감안해도 깨끗했다.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 채웠음이 분명했다.

답례 같아보입니다만. 답례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럽게 펼쳐졌다. 글씨가 보일 즈음 글자를 손이 날아들었다. 손등을 잡고 그대로 필첩을 닫아버렸다. 아이던이 맞나 시선으로 팔을 타고 올라갔다. 저도 놀랐는지 눈을 둥글게 떴다. 힘이 빠지긴 했으나 여전히 손등을 잡아눌렀다.

후에 혼자 읽으시겠습니까.

뭘 써놨길래 그래요.

어쩌면 편지라 해도 되겠군요. 그간 있었던 일들의 감상을 적었습니다. 파인하펜 씨도 아시겠지만 언변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수첩을 다 채우지도 못했습니다. 보여드리고 싶단 마음이 앞서서.

뜸들여 운을 떼더니 말끝을 흐렸다. 아이던은 언변이 안 좋다기엔 일단 과묵했다. 자기 딴에는 그래서 말을 아끼는지. 어쨌거나 아이던이 숨겨둔 말이 적힌 책이었다. 천으로 된 표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직조무늬가 촘촘해 거칠다 싶으면서도 결에 따라선 매끄러웠다. 실물에 비하겠냐만 필체로 구현된 아이던이 보고 싶었다. 그럼, 조금만 읽고 올게요. 눈이 다시 휘둥그레지는 게, 이런 꼼수는 생각도 못한 모양이었다. 필첩을 힘껏 잡아당기고 뒤돌아 달렸다. 파인하펜 씨? 부르기만 할 뿐 발소리가 따르지 않았다. 골목 끝에서 고개를 돌리자 아이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걸음을 떼자 서문이 코앞이었다. 아예 성벽 밖으로 나와 호숫가에 자리를 잡았다. 투박한 글씨만큼이나 딱딱한 문장이 이어졌다. 편지라 해도 되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킥킥 웃음이 나왔다. 연애편지를 읽어도 비슷하니 괜찮겠다.

여신을 구출했다는 밀레시안이 길을 물었다. 밀레시안들은 무릇 믿기 어려운 소문을 몰고 다녔다.

제 일기장에서 발췌한 내용이며, 그땐 결례를 보였다는 메모가 붙었다. 아이던이 말하는 결례란 여전했다. 사라진 세 전사는 머리맡에서나 듣는 옛날 이야기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보다 일기를 이렇게 쓴다니. 생각도 말 만큼이나 우직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유독 열심인 팔라딘 수련생을 봤다는 언급도 일기에서 가져왔겠다. 그때부터 보아왔다는 생각은 않았다. 이 밀레시안이 나라는 걸 기억했다. 밀레시안을 잊어버리기 십상인 투아하 데 다난임에도. 손끝으로 글자를 슥 그었다. 애저녁에 마른 잉크는 번지지 않았다. 계속 조금만, 조금만 중얼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조금만 읽고 오겠다 말해놓고. 곰인형을 받았다는 부분에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이던이 대놓고 이런 건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뒤로 다른 선물들을 늘어놓았다. 나도 가물가물한 물건도 있었다.

답례를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수호의 부적이 생각나더군요. 반지를 드리고선 뿌듯했습니다. 처음으로 파인하펜 씨에게 드린 선물이었으니까요. 다시 돌려받겠다 으름장을 놓고, 돌려받았으니 선물이라기엔 어폐가 있지요. 첫 선물이 두 개라고. 속으로 이상한 말을 지었습니다. 이런 무거운 용도 말고 다른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파인하펜 씨라면 쉽사리 손에 넣을 것들만 떠올랐습니다. 파인하펜 씨도 시집과 곰인형 같은 선물을 주신 적이 있지만요. 계속 궁리했다 생각했습니다. 그보다는 하펜 씨를 생각한 것이겠지요. 그에 생각이 미치니 선물을 더 고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제 입에서 예전 일이 나왔을 때, 유독 기뻐하시는 걸 보고 정했습니다.

얼굴이 홧홧했다. 행여 센 호수에 비칠까 물러나 앉았다. 필첩에 얼굴을 묻었다가 몸을 일으켰다. 단숨에 읽을 수 있겠단 마음이 달아났다. 토씨 하나하나 상감하고 싶단 마음이 꿰찼다. 한껏 상기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고 심호흡을 했다. 피오드 던전에서도 이랬던가. 여지껏 에린에서 이런 고동이 처음이라 하면 거짓말이었다. 이런 방향으로 이렇게 뛰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길을 걷는 데엔 지장이 없었다. 잰걸음도 뜀박질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던 앞에 멈춰서고야 토하듯 숨을 뱉었다. 그마저도 들숨 한번에 가셨다.

나 이거 가지고 싶어요. 아이던.

두 볼이 다시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이던은 영문을 모르겠단 기색이었다. 이미 내게 주는 선물임을 알지만 말하고 싶었다. 가지고 싶어요. 굳이 한 번 더 말했다. 부끄러울 것만 생각하고 내게 혼자 읽어보라 한 아이던은 어림도 못할 테다. 이것을 짐작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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