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7. 타냐가 동창즈와 동급생이었다면?
We Are Golden
“오늘 누구 전학 온대!”
“뭐? 누구?”
“내가 어떻게 아냐? 그냥 교무실에서 쌤들 얘기한 걸 들은 건데.”
콱씨, 아니, 왜?!
험악한 대화가 오가는 평범한 교실 안. 그 안의 제일 뒷자리에는 세 친구들이 앉아있었다. 학기 초에 처음 만난 것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닮은 둘과 유난히 유약해 보이는, 갈색 곱슬머리의 모범생 한 명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묘한 조합인 세 사람은 전학생의 소문에도 심드렁했다.
“야, 오늘 점심 뭐냐.”
“제발 네 거 봐. 내 유인물 가져가지 말고….”
“내 건 이미 버렸지.”
아니, 맛있는 점심이 나오는 수요일이라 온통 관심에 그에 쏠린 것이 분명하다. 듄은 서로를 꼭 닮은 두 친구, 유다와 다나가 자신의 급식 표를 약탈해 가는 것을 보며 머리를 짚었다. 저러다 또 저들끼리 싸우면 늙는 것은 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곧 조회 시간인데-
“겍, 스파게티래.”
“두 번 받아야지.”
“야 다나, 넌 이런 게 좋냐?”
“불만 있냐?”
“얘들아, 이제 곧 조회 시간이니까 제발 그만….”
“야, 거기 뭐하냐!”
착, 착,
“아!”
“아, 쌤!”
“그러게 조회 시간에 자리에 안 앉아 있으래?! 당장 자리 가서 앉아!”
듄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늙은 담임 선생님은 유난히 보수적인 구석이 있어서, 학생이 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작대기로 팔을 한 대씩 맞은 유다와 다나는 괜히 엄살을 부리며(하나도 안 아픈 걸 쌤만 모른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듄은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급식 표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전달 사항을 다 전달하고도 교무실로 돌아가지 않는 담임은, 밖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아까 들은 전학생인가? 조금 호기심이 든 듄은 전학생이 들어올 교실 앞문으로 시선을 고정했고,
“들어와라!”
드륵-
“자, 이번에 F시에서 새로 전학 온 타냐라고 한다. 타냐, 소개해야지?”
“네에. 그, 전학 시점이 좀 이상하지만…. 이번에 이사 오게 된 타냐라고 해. OO고에서 왔고 공예를 좋아해. 잘 부탁할게?”
-천사를 보았다.
그 이후로는, 뭐··· 중간고사를 볼 시점, 뜬금없이 전학 온 천사 같은 외모의 전학생은 학생들의 초유의 관심사였다. 그 덕이라고 할까,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그에 관련된 소식은 전부 듄과 다나, 유다에게 전달되었다. 이건 그의 의사도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모님이 외국으로 가서 일하시는 바람에, 사촌 집에서 산다고?”
“어쩌란 건지.”
“너 그거 허락은 받고 말 옮기는 거냐?”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렇게 멋모르고 말을 옮기던 아이가 도망친 것이 이번으로 네 번째였다. 이걸로 듄은 타냐의 취미가 자수이며, 생일이 10월 30일이며, 봉사부였다는 것과 사촌과 함께 살고 있는 집 사정까지 알게 되었다. 애를 울릴 기세로 째려보던 유다와 반쯤은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쟤도 참 고생이다.”
“그래도 주변에 애들이 많으니 학교 적응은 잘하겠지.”
듄은 다시 문제집을 푸는 것에 집중하며 말했다. 선생님이 반장인 듄에게 타냐의 적응을 부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자신이 신경 쓸 새도 없이 나서는 아이들이 많아서 일을 덜던 참이었다.
“개소리. 쟤 항상 혼자 있던데.”
“뭐? 진짜?”
“봐봐.”
다나의 턱짓에, 듄은 타냐의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늘 북적이는 것 같던 타냐의 자리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타냐는 듄과 똑같은 문제집을 펼치고선 운동장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힘이 넘치는 애들끼리 축구가 한창이었고, 여자애들은 트랙을 빙빙 돌고 있었다. 타냐는 그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부하는 쪽이 더 좋은 듄과, 그에 껴서는 안 될 스펙인지라 그에 흥미가 없는 다나와 유다의 경우와는 명백히 다른 경우였다. 충격을 받은 듯한 듄의 뒤에서 다나가 말을 이었다.
“전학생 특수도 일주일이면 오래 갔지. 반장이 나서야 할 것 같지 않냐?”
아직 점심시간은 30분 정도 남았다. 듄은 머리를 헤집다가, 괜히 다나 옆에서 청춘이냐며 이죽거리고 있는 유다를 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냐.”
“-응? 아, 반장? 듄이라고 했나….”
“응. 혼자 있는 것 같아서…”
“아, 그, 괜찮은데. 적응 못했다던가 그런 건 아니고, 음. 진짜, 학교랑 선생님은 적응, 했는데, 그냥-”
친구가, 없어서….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변명을 하던 타냐는 손을 내저으며 이런저런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결국 돌고 돌아 친구가 없다는 말로 돌아왔다. 그것이 못내 부끄러운 듯, 얼굴이 발개지며 몸을 움츠리기까지.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다. 듄은 조금 붉어진 볼을 긁으며 타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밥 안 먹었으면.”
-우리랑 같이 먹을래?
그것은 분명, 자그마한 계기였다.
이후 타냐와 어울리면서, 듄 일행은 곧 타냐가 애들과 어울리지 않은 이유가 그의 오타쿠적인 취미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화나 소설 따위를 보며 이런저런 굿즈를 사 모으는 모습은 확실히,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오타쿠라고나 할까- 타냐가 오랫동안 간을 보며, 그런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 친구들을 찾은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듄과 다나, 유다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네 사람은 곧 같이 다니는 무리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타냐에게도 좋지만, 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위장약을 챙길 일이 현저히 줄었기 때문이다.
“이거, 급식 표 달력이야. 하루 지날 때마다 뜯으면 되는 건 알겠지? 잘라서 만들어봤어.”
“쩌… 쩐다!”
“듄, 너 선생님 포기해라. 타냐가 더 잘 가르친다.”
“유다아…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듄이 언짢아하잖아.”
“듄, 유다는 부탁해도 될까? 내가 다나 잡아 올게!”
“알았어! 하, 걔네는 왜 또 야자를 튀어서….”
심지어 타냐는 공부를 잘했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두 사람과 함께 다니느라 속 터지는 소리만(공부를 왜 하냐느니) 들어야 했던 듄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둘은 곧 좋은 공부 메이트가 되었고, 이제 막 전학을 온 타냐는 전교 7등, 듄은 전교 1등이라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은 기말고사까지 이어졌고, 곧 여름 방학이 다가왔다.
“야, 가면 전복 국밥 있대.”
“으, 아저씨.”
“뭐 임마?”
“제발 조용히 좀 가자….”
“유다, 유다, 거기 가게 이름 뭔데? 검색해보려구.”
“아, 여기….”
듄은 자연스럽게 싸움을 진압하는 타냐를 달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먹을 것을 보급했다. 대게는 타냐가 좋아하는 두부 과자나 베이글 칩 같은 종류였다. 하지만 저 간식들은 결국 한창 자라나는 나이인 다나의 입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타냐는 딱히 편식하는 건 아닌데 입이 짧아 많이 먹지 못하는 아이였다.
네 사람은 고속버스 안에 타 있었다. 여름 바다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유다가 말을 꺼내고, 다나가 동의하고, 타냐가 신이 나서 숙소와 버스표를 예약하는 바람에 얼렁뚱땅 가게 된 바다 여행은, 듄의 의사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듄은 이번 사례를 통해 타냐 역시 신이 나면 통제 불능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바다 여행 가는 건 처음이야….”
“엥, 안 가봤어?”
“음, 중학교 때 친구들은 다 인도어 파였어서….”
“-그래도 가족 여행 한 번쯤은 가보지 않나?”
“두 분 다 맞벌이셔서, 가봤자 당일치기지 뭐. 이번처럼 바비큐도 해보고, 불꽃놀이도 해보고…. 이건 다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며 타냐는 수줍게 웃었다. 다나는 그런 타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듄은 그제야 신이 나서 일을 추진하던 타냐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냐에게 여름 보충이며 선행이니 하는 것보단, 친구들과 함께하는 바다 여행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첫 경험이니까!
고속버스는 한참 설렘에 노래를 흥얼거리는 한 명과 꾸벅꾸벅 조는 둘, 그리고 이 와중에도 짬을 내어 영어 단어를 외우는 한 명을 태우고 고속 주행했다.
잔뜩 물을 먹고 소리 지르는 소년과, 키득거리는 두 사람, 그리고 그런 사진을 찍는 것에 열중한 한 사람이 몸을 떨며 불꽃놀이를 즐기는 것은 고작 몇 시간 뒤의 일이다.
“너랑 여름 한 조각, 살짝 베어 문 순간,”
타냐는 노래를 썩 잘하는 편이다.
“바다를 본 것 같아~”
어느 정도냐면, 음악 수행평가로 노래를 부를 때마다 타냐의 차례만 지나면 다들 자신의 수행평가 곡을 바꾸겠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타냐가 했던 노래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왠지 쉽게 잘 불러서 자기도 잘할 줄 알았다나. -물론 다 망했다. 듄은 소신을 지켰던 한 사람으로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지어 청소 시간이면 타냐의 독무대다. 방송부에서 각종 가요를 틀어놓으면 청소를 하던 타냐가 대뜸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본인은 흥얼거리는 정도라고 생각하겠지만, 들을 사람은 다 들을 만한 음량이었다. 그 모습은 다음날, 다음 달, 다음 해가 되어도 이어졌는데, 한 번은 유다가 이렇게 제안했다.
“너 차라리 가수 해보는 게 어때? 내 기획사에 들어오는 거야.”
“내가? 에이, 그럴 거면 어렸을 때부터 연습생 했지.”
“아니 지금부터 해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 그러네….”
“됐다는데 그만해라.”
물론 가볍게 거절당하긴 했지만. 듄은 무어라 계속 중얼거리는 유다의 어깨를 토닥였다.
“타냐가 그렇게 가능성 있어 보여?”
“어. 쓰읍, 대박 날 가능성이 보인다니까.”
“그럴 거면 쌔고 쌘 다른 기획사 가지. 너랑 같이하겠냐.”
“야, 말 다 했냐?”
…그리고 다나와 유다는 다시 싸우기 일보 직전이 되었고, 듄은 위장약을 찾았다. 아니, 타냐를 찾아야 하나. 하지만 바닥을 닦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타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어디 갔지?
“저, 타냐, 이거….”
그때 듄의 눈에 보인 것은 얼굴이 발개진 채 편지를 건네는 잘생긴 남학생과 얼떨떨한 얼굴의 타냐였다. 다나와 유다도 그 모습을 봤는지 나란히 충격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타냐가 세 사람에게 돌아오자마자 질문 폭탄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오늘 처음 봤어.”
“그럼 그냥 냅다 고백한 건가. 감이 영….”
“응, 아마도…? 이따 학교 끝나고 보자고 하더라.”
“연예인한테 연애는 죄악이야!!”
“유다,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하긴, 그동안 조용한 게 더 이상했다. 모범적이고 다정한 언행, 거기다 외모 역시 빛이 났다. 그야말로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공주님. 듄은 충격 어린 말을 내뱉은 것과는 달리 착실하게 타냐의 매력들을 꼽아가며 상황에 적응해 나갔다. 그에 반해 유다는 거의 타냐를 다그치듯이 하고 있었다.
“고백받을 거야?!”
“일단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맘 없으면 차는 거지, 뭐 별거 있냐. 걍 가지 마.”
“조금 미안하잖아….”
“거절하기 미안해서 사귀어 주려고? 에바야.”
“…그런가?”
그리고 이어진 다나의 신랄한 말. 하지만 타냐는 이미 혹한 모양새였다. 평소에 로맨스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이렇게…. 다나는 머리를 짚었다. 평소에 듄이 자주 취하던 자세였다. 같이 다니면 닮는다더니 다나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그것을 묘한 눈으로 지켜보던 듄은 뒤에서 슬쩍 다나를 건드렸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이따 타냐 동아리 가면 얘기해.”
“그 자식, 여자애들끼리는 알음알음 알고 있는 바람둥이야.”
“뭐?”
“바람둥이~?”
듄과 유다는 경악했다. 정확히는, 듄이 놀라고 유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죽인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 어쨌든 둘 다 몰랐던 사실에 놀라긴 했으니 그게 그거다. 듄은 그 말의 정확한 출처를 묻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나한테 가끔 선물 주는 애들 있잖아. 걔네들이 말하는 거 들었거든.”
“아….”
후네. 타냐에게 고백한 남학생의 이름이다. 청초한(유다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외모와 다정한 성격으로 인기가 꽤 있는 편인 그 남학생은 1학년 위의 선배였다. 방송부라 나름 발도 넓고 알고 지내는 여학생들도 많다고 했나.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학생도 꽤 많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왜 바람둥이가 나오냐고?
‘후네 선배 어장에 들어가서 희망 고문당하는 것보단 맘 편하게 다나 덕질하는 게 백만 배 낫지~’
“고작 그런 말로?”
“거기다 내 감.”
“그럼 뭐 확실하긴 한데….”
유다가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듄도 반쯤은 납득했다. 지난 고1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나의 ‘감’은 부족한 근거를 채워주고도 남을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타냐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타냐가 그놈 어장에 들어가는 건 절대 못 본다.”
“그래, 그건 절대 안 되지. 그놈이 타냐 어장에서 허우적거리는 거면 몰라도.”
“타냐가 어장 같은 걸 치겠냐.”
“…그럼 타냐를 말려야겠네.”
그래서 듄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나 한 듯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실제로 타냐의 의사를 반하는 일이니 중대한 결정이긴 했다. 두 사람에게 뭐하냐는 듯한 시선을 받아서 그렇지. 듄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왜?”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듄을 환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놈을 조져야지.”
“학교 끝나고 어디랬지? 체육관 옆? 새끼 음험해. 거절하면 뭔 짓을 하려고….”
“자, 잠깐! 훼방 놓는 걸로 충분하잖아!”
“뭐가 충분해. 주제에 타냐를 노린 값은 치러야지.”
“맞아. 그리고 알잖아. 타냐 은근히 애정에 약한 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걘 절대 혼자 거절 못 할걸.
듄은 말이 턱 막혔다. 지난 1년간 타냐를 지켜봐 온 바, 아주 정확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타냐는 정에 목말라 있는 면이 있었다. 맞벌이에다 나이 차가 있는 오빠 덕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인지, 가족에게서 받아야 할 정을 친구에게서 갈구하는 면이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어떤가. 듄은 청소 시간에 봤던 타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
-결국 듄은 그들을 막지 못했다.
“뭐, 뭐야!”
“바람둥이 새끼 족치러 왔다 왜.”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얘들아?”
“이 새끼 문어 새끼라고. 양다리는 무슨 여덟 다리는 놓은 것 같은데.”
“무슨 거짓말을…! 타, 타냐야, 그거 아닌 거 알지?”
“-그, 선배. 그래도 쟤네들이 괜한 소리를 할 애들이 아니거든요….”
고백 장소는 빈 교실이었다. 듄은 한숨을 쉬며, 얘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교실 문을 단단히 닫았다. 다나는 벌써 고백하고 있던 남학생의 멱살을 털고 있었고, 유다는 불량하게 책상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딱 봐도 추궁하는 모양새였다. 선배라던 남학생은 어느새 없던 위엄도 잃고 제 전적을 술술 불었다.
“1, 1학년 때 4명… 힉! 아니, 6명! 6명!”
“들었지, 타냐?”
“으응….”
“그럼 어떡할래?”
“안 사귈 거야. -실례할게요, 선배님.”
결국 원하던 답을 얻어낸 다나는 잡았던 멱살을 풀었다. 배려 없는 손짓에 덜컹하는 소리가 낫지만 넷 중 아무도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시각이라 붉은 노을이 지는 저녁이었다. 네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학교를 나섰다. 분위기는 울적했다. 어쩐지 시무룩해져 있는 타냐 때문이었다. 친구들 덕분에 그 똥차를 피해놓고, 뭐가 그리 속상한 건지 입꼬리를 추욱 내리고 있었다. 불편한 분위기가 신경 쓰였던 듄은 먼저 나서서 타냐에게 물어봤다.
“기분 많이 나빠?”
“으응…. 기껏 도와줬는데, 표정이 이래서 신경 쓰였지? 미안해.”
“야.”
“응?”
“제대로 말해. 뭔데?”
그렇게 우물거리는 타냐에게 거의 시비를 걸듯 진상을 물어본 것은 다나였다. 공격적인 어투이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걱정하는 얼굴이라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타냐도 그런 모양이었다. 타냐도 그랬는지 그런 다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곧 떨리는 목소리로 속내를 들춰주었다.
“그냥, 많이 기대했는데…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어,”
“날 좋아해 주는 건 저런 사람밖에 없나, 하고.”
“타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괜히 너희들한테 민폐만 끼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듄은 드물게 큰 소리를 냈다. 유다 역시 성을 내고 있었고, 다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는 얼굴을 했다. 정작 타냐는 제 말에 제가 상처를 받았는지 제 자리에 서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듄은 일단 챙기고 다니던 손수건을 타냐의 손에 쥐여주었다. 히끅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초등학교 땐 왕따였고, 중학교 때 친구들도 자꾸 날 두고 다투고. 연애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은 것 같아…. 항상 문제투성이야. 내가 구제 불능인 걸까? 너희들은 지금은 착해서 지금 내 옆에 있어 주지만, 나중에 내게 질려서 떠나가면 어떻게 해?”
뒤로 갈수록 뭉개져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 불안만큼은 진하게 느껴졌다. 어떤 인간관계를 겪어왔는지 명확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쩐지 좀 지나치게 조심스럽더라니…. 듄은 타냐의 가방을 대신 짊어진 다나와 타냐를 업다시피 하며 학교의 운동장 계단으로 데려가는 유다를 바라보았다. 타냐의 말처럼 변할 인간으로 보이진 않았다.
“타냐, 일단 이 둘이 착한 건 아니야.”
“야!”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태클을 걸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환기되고, 타냐는 그 말이 웃겼는지 끅끅대며 웃어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눈가에는 눈물을 달고 있어, 다나가 그 눈물을 닦아줘야 했다.
“우리가 착해서 옆에 있어 주는 게 아냐. 그냥 네가 좋으니까 같이 있는 거지. 그러니까 변할 일 없어.”
“맞아, 타냐. 그런 생각하지 마.”
“으응…. 고마워.”
타냐는 그에 진심으로 대답했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지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타냐가 평소에 애정에 고픈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구제 불능이라 생각할 정도일 줄은 몰랐던 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타냐는 자신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받는 애정에 대한 확신도 없어 보였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타냐 그 자체로 이미 사랑스러운 사람임을 실감하게 할 수 있을까?
“야, 그렇게 확신이 없으면 가수 해라.”
“뭐?”
“가수 하면 널 좋아할 팬들이 한 트럭일 거야. 팬심만큼 순수한 애정이 어딨어. 딱 노력하면 한만큼 널 좋아해 줄 거라고.”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팬들을 모아놓고 보면 널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이 날걸. 얼마나 편해?”
“그렇, 지?”
“어떤 사람들이 널 좋아하는지, 네가 좋아할 만한 그런 사람인지, 그렇게 확인해보라고.”
유다는 흡사 약 팔이 장사의 모습으로 타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더 환상적인 부분은, 타냐가 그에 설득되고 있다는 점이다. 듄은 유다가 제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았지만 타냐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할 줄은 몰랐다. 물론 거기에 넘어가고 있는 타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듄은 옆에 있는 다나를 툭 치고 물어봤다.
“-저대로 놔둬도 될까?”
“왜, 잘 설득하고 있는데. 혼자 땅 파는 것보단 진로를 찾는 게 낫지 않냐.”
“야,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결국, 듄은 말리기를 포기했다. 어떻게든 되라는 심정이었다.
어쩐지 그날 이후로, 타냐가 조는 일이 잦아졌다. 듄은 다시 한번 아슬아슬하게 타냐를 깨우며 의문을 삼키고 대신해서 속삭였다.
“위험했어. 너 선생님한테 또 한 소리 들을 뻔했다구.”
“미안,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일주일 사이에 골백번은 들은 변명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를 묻고 싶었지만 또 한 번 참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타냐라면 곧 말해주겠거니 싶은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 예상은 잘 들어맞았다.
“아, 그리고 유다.”
“어?”
“이거 좀 봐줄 수 있어?”
점심을 먹은 뒤, 딱히 하는 일은 없지만 모여 앉아 있는 네 명이었다. 보통 둘은 문제집을 풀고, 나머지 둘은 투닥대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 타냐는 문제집 따위 보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유다를 부르더니 핸드폰을 꺼내는 것이다. 그리고 갤러리에 들어가, 찍어뒀던 동영상을 틀어주는데….
검은색의 레깅스에 마찬가지로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타냐였다. 움직이는 데에 거치적거렸는지, 평소에 늘 쓰고 다니던 안경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는데-
“잘하는데?”
“그, 그래? 이 정도면 되려나?”
“연습은 더 해야지. 근데 초보가 이 정도면 완전 괜찮아. 춤추면서 노래 부르는 것도 나름 안정적이고.”
“다행이다….”
“타냐, 너 진짜 가수 할 생각이야?”
그 대화 내용에 당황스러워진 듄은 서둘러 물었다. 이렇게 얼렁뚱땅 진로를 결정해도 되나? 그때 유다를 말렸어야 했나? 모범생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한 듯한 학생이었던 듄에게 진로란 좀 더 진지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등학생 둘이서 얼레벌레 결정해서 될 것이 아니란 말이다…!
“으응, 유다네 기획사로 가는 걸로 결정한 건 아니지만….”
“아니었어?!”
“유다, 아직 기획사 차린 것도 아니잖아. -좀 더 연습해보고, 오디션 볼 거야.”
지금 연습생으로 들어가도 좀 늦는걸. 그렇다고 스무 살에 바로 기획사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윽, 내가 좀만 더 나이를 먹었어도 기획사에 보장된 돈줄이-”
“추하다, 유다.”
듄은 조금 긴장이 풀린 얼굴로 웃고 있는 타냐와 돈줄을 잃은 것에 땅을 치는 유다, 그리고 딜을 넣는 다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일상적이고 태평한 모습이었다. 홀로 정상인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듄은 다급하게 물었다.
“타냐, 이렇게 진로를 결정해도 되겠어?”
“완벽하게 결정한 건 아니야. 그냥 선택지를 늘린 거지. …오디션 다 떨어지면, 그냥 공부할 거야.”
“아아….”
그리고 듄은 그런 타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도 타냐가 옆에 있는 분홍과 파랑 머리의 누군가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지르고 보는 성격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라서 더더욱.
“그래도, 진로를 그렇게 쉽게 결정하면 안 돼….”
“으응, 걱정 끼쳐서 미안해.”
그래서 들끓던 속이 좀 가라앉으려는 그때-
“아, 그거 말인데-”
나 냅킨 부서장 하기로 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출근할 거야.
“뭐?!”
“진짜?”
“냅킨은 또 뭐 하는 곳이야? 고등학생한테 부서장이라니 엔간 콩가루가 아닌데.”
다나가 폭탄을 터뜨렸다. 충분히 고민해보고 진로를 결정하라는 듄의 설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떨어진 폭탄이었다. 듄은 머리를 부여잡았고, 타냐는 어떻게 된 일인지 진상을 궁금해 했으며, 유다는 어쨌든 시비를 걸어보려는 기색이었다. 아, 이건 평소대로인가. 어쨌든 듄은 위장약을 찾으며 진상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냅킨, 들어본 것 같은데. 듄이 일하고 있는 포트에서 종종 등장하는 기관명이었다.
“냅킨, 나 알바하는 데에서 들은 것 같은데. -그나저나 불량배를 잡다가 스카우트됐다고?”
“어. 내 특기를 듣자마자 꼭 함께 해줘야 한다고 하던데.”
“히어로? 그거 완전 자원봉사자 아니냐.”
“유다! 히어로분들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존경할 만한 멋진 사람들이라구.”
“그야, 타냐 넌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괜한 소리를 하던 유다는 타냐에게 붙잡혀 교정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에 듄은 다나에게 설명을 더 요구했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스카우트한 사람에 대고 야무지게 부서장 자리까지 챙겼고, 부모님은 이를 허락했단다. 거기서 무슨 말을 더 붙이겠는가…. 한순간에 진로를 결정해버린 친구에게 할 말은 많은데, 할 말이 없어진 듄은 그저 뒷목을 잡을 뿐이었다.
“듄, 이거.”
“-타냐?”
“허브차야. 매번 걱정이 많기도 하고, 화낼 때가 많으니까…. 보온병에 잔뜩 가져왔어. 좀 마셔.”
“고마워….”
아, 타냐가 없었다면 정말 못 버티지 않았을까. 듄은 차 한 잔을 마시며 겨우 마음을 다스렸다.
다나와 유다가 엄마냐는 둥, 속 터지는 소리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일은 다나가 냅킨의 부서장이 된 지 3달여 만에 일어났다.
[네 동생은 내가 데리고 있다.]
“뭐 이 새꺄?”
[그러니 OO건물로 와라. 혼자 오지 않으면 이 년의 목숨은-]
빠각,
핸드폰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옆에서 통화내용을 다 듣고 있던 유다와 듄, 타냐는 바로 다나에게 모여들었다. 다들 다나의 세 살배기 여동생, 혜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도 봤고, 실제로 다나의 집에 놀러 가 몇 번 얼굴도 익혔다. 따라서,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혜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다나, 전화를 끊으면 어떡해! 다 들어야 제대로 신고하지!”
“시끄러워. 손에 힘이 들어간 걸 어쩌라고.”
“다나, 괜찮아? 이 사람들이 누군진 알겠어?”
“어. 그리고 아니. 내가 3달 동안 줘 팬 조직 놈들이 몇 개여야 기억을 하지….”
“결국 원한을 사고 말았냐. 내 이럴 줄 알았다.”
“유다, 넌 좀 닥쳐.”
하지만 넷은 생각보다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다나는 이성적이었고, 유다는 태평했으며, 타냐와 듄은 나서서 냅킨과 포트에 연락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 납치범은 이런 반응을 원하지 않았겠지만, 너무나 개성 있는 조합의 보호자로 다닌 지 벌써 3년 차에 들어간 듄에게 있어 이 정도는 사소한 시련일 뿐이었다.
그 결과,
퍽,
“멍청한 놈들이네, 이거.”
“흐에에엥-”
“응응, 혜나야. 언니 여기 있어요~ 맘마 줄까? 기다리느라 배가 고팠나?”
퍽퍽, 퍽!
“기저귀는?”
“괜찮아. 저기서 갈아주기라도 했나 봐. 의외….”
정확히 한 시간 뒤.
다나는 폭력배들을 비롯한 조직 일당을 찰지게 패고, 나머지 세 사람은 냅킨 측에서 보낸 차 안에서 혜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타냐와 듄 만이 정상적으로 혜나를 돌보고 있는 거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드륵,
이윽고 다나도 돌아왔다. 차에 올라오자마자 타냐 옆에 털썩 앉아 물병을 쥐는 게, 금강불괴여도 목이 마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나! 괜찮아? 다친 곳은?”
“당연히 멀쩡하지. 혜나는?”
“혜나는 괜찮아. 다행이지.”
듄의 대답에 다나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내가 만만해 보이나?”
…그 얼굴 뒤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미쳤다고 그러겠냐?”
“난 절대 널 만만하게 못 봐, 다나야….”
유다는 기겁했고, 듄은 한숨처럼 대답했다. 무슨 말을 저렇게 하나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타냐만이 진지하게 대답을 고민하고 있느라 한 템포 느리게 대답했다. 물론 그 대답 역시 상상 이상이었지만.
“그냥 듣기만 해서는 좀 만만해 보이지?”
“뭐? 타냐 너 제정신이야?”
“아니…. 그냥 분홍 머리의 여고생이라고 하면 되게 연약하고 보송보송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잖아.”
듄은 잠시 다나를 떠올리는 것을 접어두고 분홍 머리와 여고생을 떠올렸다. 그래, 확실히 진한 벚꽃 빛의 긴 생머리를 풀어 내린… 다나잖아! 듄에게 분홍 머리 여고생은 이미 다나로 정해져 있었다. 역시 개성이 너무 강한 것도 문제라니까…. 결국 이미지 연상을 포기한 듄은 잠자코 설명을 들었다. 다행히 타냐가 부연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자기 부하가 당해서 왔는데, 그게 여고생 짓이래. 근데 머리카락도 분홍색이래. 어리고 유치한 여자애가 특기 믿고 까불었는데 멍청한 놈이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지….”
그리고 그것은 매우 타당한 설명이었다. 듄이 맞장구를 쳤고, 유다 역시 구석에서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나는 못마땅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지금 내 머리색이 문제란 거야?”
“머리색도 머리색이지만, 여고생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커서 그래. 다나가 얼른 크거나, 아예 ‘다나’로 유명해져서 규격 외의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좋아, 졸업하면 염색한다.”
-타냐의 조언을 받아들인 다나가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온 것은 아직 먼 미래의 얘기였다.
“야, 타냐 언제 온대?”
“이제 온댔는데….”
“얜 뭐 맨날 바쁘냐. 졸업식도 제대로 못 보고.”
“얘, 얘들아-!”
타박타박,
타냐가 저 멀리 떨어진 밴에서 내리더니 후다닥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교복까지 갖춘 모습이었다. 괜한 감상에 젖으려던 듄은, 타냐가 훅 다가오고 나서야 눈을 크게 떴다. 회사에서 시켰을 것이 뻔한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에 늘 메고 다니던 가방, 다나와 맞춤으로 샀던 열쇠고리가 언밸런스하게 어울렸다.
“탑스타님 많이 늦었다?”
“탑스타는 무슨, 아니, 미안…. 어제 늦게까지 촬영이 있어서, 늦잠 잤어.”
“거긴 사람을 왜 그렇게 굴리냐.”
“그래, 그러니까 다음 계약은 우리 회사로 하자!”
그래, 타냐는 데뷔했다. 19살의 가을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솔로 가수 타냐는 데뷔 첫 앨범부터 대박을 쳤다. 유다의 감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타냐의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했고, 음반은 잘 팔렸으며, 예능엔 아직 많이 출연하지 못해 모두가 알아볼 정도는 아니어도 거리를 걸으면 긴가민가한 시선을 받을 정도로 유명해지기는 했다.
덕분에 언제 어디서 타냐를 아는 팬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풀 메이크업으로 등교하는 것은 타냐의 일상이 되었다. 사실 그 등교 역시 이젠 빠지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러다 보니 날이 가면 갈수록 사인방은 삼인방으로 다닐 때가 잦아졌고, 학교보다는 학교 밖에서 모일 때가 많았다. 그마저도 타냐의 스케줄 일부를 희생해야 했고.
“유다, 넌 영물이나 혼혈들만 계약할 거라며.”
“윽, 그건 그렇지.”
“그럼 타냐한테 찝쩍이지 마, 자식아. 타냐, 사진이나 찍자.”
“-응!”
듄, 유다도! 얼른 와서 같이 찍자!
그렇게 얼마를 더 떠들었을까. 화장으로는 채 가릴 수 없는 붉음이 타냐의 두 볼 위에 떠올랐다. 3년간 자신과 무사히 친구를 해줘서 고맙다고 했던가. 타냐의 지난 교우관계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같이 입학하지는 못했어도 같이 졸업하는 거라고, 졸업하고도 또 자주 연락해달라던 말이 뒤를 이었었지…. 듄은 타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야자를 했을 때 속삭이던 말들을 떠올렸다.
“듄, 얼른 와! 하나, 둘-”
“타냐 너 진짜 사진 못 찍는다.”
“…유다아, 그럼 좀 찍어줘.”
“그래그래. 이 유다 님이 찍어줄 테니까 여기로 와 봐라.”
“잘난 척 짜증 나.”
“아, 안 싸울 거지? 얘들아, 진정해!”
-아, 감상에 잠길 새도 없다. 듄은 또 붙어서 싸우려는 두 사람을 겨우 말리고, 애매하게 웃고 있는 타냐를 바라봤다. 타냐의 비싼 사진기는 아슬아슬하게 유다에게서 넘겨받았다. 그제야 헤드락을 푼 다나가 유다를 끌고 와서 타냐 곁에 선다. 이제 진짜로 사진을 찍을 차례였다.
“야, 그러고 보니 넌 꽃다발 없냐?”
“어? …어, 그러네. 오는 길에 사 오는 걸 깜빡했어!”
“누가 자기 꽃다발을 자기 손으로 사….”
생각지도 못한 문제는 꽃다발이었다. 세 사람은 각자 부모님으로부터 하나씩 받아 들고 있는데, 타냐만 빈손이니 유난히 손이 비어 보이는 것이다. 타냐는 아무래도 괜찮다며 손을 저었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문제였다. 타냐를 제외한 세 사람이 머리를 모았지만, 당장 한 명이 튀어 나가서 사 오는 것밖엔 답이 없다는 것을 말리는 것이 한계였다. 그때, 듄이 말했다.
“각자 꽃다발에서 안개꽃 부분만 모을까? 장미꽃 같은 걸 뽑으면 뽑힌 자리에 너무 티가 나니까 조금씩만.”
“오.”
“이렇게?”
실행은 빨랐다. 각자 꽃다발에서 없는 자리가 티가 나지 않게끔만 안개꽃을 뽑아 모으자, 작은 안개꽃 다발 하나쯤은 되어 보였다. 다나가 처음보는 후배에게서 받은 꽃도 같이 묶어주니 원래 그렇게 생긴 꽃다발처럼 보였다. 그것을 받은 타냐는 숫제 울 기세였다.
“이, 이거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받고 얼른 찍어.”
“안 그럼 우리가 따돌림이라도 하는 것 같잖냐.”
“고마워! 진짜, 진짜로!”
그런 타냐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듄뿐이었다. 다나와 유다는 타냐가 울어버리기 전에 얼른 찍으라며 듄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찍어 나간 독사진.
“야, 듄! 앞에 잘 봐라~”
“그 불안하다는 얼굴 좀 어떻게 안 되냐?”
“듄! 지금 딱 좋아! 하나, 둘~”
듄은 조금 예민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웃고 있는 딱 그 나이대의 남학생처럼 찍혔다.
“나 잘 나와?”
“좀 조용히 해 봐….”
“아까까진 괜찮았는데 너 입 여는 순간 망함.”
“유다, 쉬잇!”
유다는 자신만만해 보이는 사업가 그 자체로 나왔으며,
“다나! 그렇게! 응, 예뻐!”
“응, 그건 아니니까 눈꼬리 좀 내려봐라. 또 누구 죽이러 가냐?”
“지금 널 죽여줄까.”
“얘들아….”
다나는 타냐의 어시스트 끝에 꽤 부드럽게 웃고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여고생으로 찍혔다.
“사진 많이 찍혀봐서 알지? 잘 봐라~”
“다나아, 진짜 같이 찍으면 안 돼?”
“…독사진은 찍어야 할 거 아냐. 이거 찍고.”
겨우 눈물을 그친 타냐는 직업이 무색하게도 몇 분을 부끄러워하다가 겨우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당연히 동화 속 공주님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찍혔다.
공들여 말아, 보기 좋게 구불거리는 금발과 타냐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반짝일 수 없는 석류색 눈. 살이 접히도록 웃고 있는 눈 밑으로는 그린 듯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와 함께 그 아래로 안개꽃잎이 이어지고 있었다. 안개꽃 특유의 청순한 분위기와 함께 기가 막히게 풍경화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명작을 뽑아내고 기세가 등등해진 유다는 그 후로도 쭉 사진 셔틀 역할을 했다. 중간에 그걸 알아채고는 듄이 교대해주긴 했으나 거기서 거기였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네 명이 다 들어오도록 사진기를 높이 들어 올린 유다와 나머지 세 명이 찍힌 단체 샷. 졸업식 특유의 아련한 소란스러움의 향기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야, 이제 가자.”
뭐,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들은 신나서 사진 찍는 걸 그리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중에 ‘아, 이거 그때구나’ 싶으면 됐지…. 결론은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15분 만에 자리를 떴다는 소리다.
휘이이-
그렇게 네 사람은 운동장 트랙을 가로질렀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조금씩 눈발이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하굣길이었다. 하지만 넷이서 같은 교복을 입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라 생각하자니 기분이 복잡미묘해진 듄은 입을 닫고, 조용히 세 사람의 뒤를 따랐다.
“다나는 일 괜찮아? 계속 범죄자 보면 좀 힘들 텐데.”
“좀 짜증 나는데, 괜찮아. 벌 수 있을 때 일해야지.”
“유다는 일해서 기획사 차린댔지?”
“어. 빡세게 벌어야지.”
“저거 저 특기 쓰면 별로 힘들지도 않은 주제에.”
“뭐 임마?”
“그만 좀 싸워….”
앞에서는 미래에 대한 잡담을 나누거나, 검은 머리 두 명이 싸우려는 것을 한 명이 말리고 있다. 이마저도 지난 3년간 봐왔던,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이 모습도 이제 끝이라니.
평생 자라지 않을 것 같던 아이들은 어느새 성인이 되었다. 아직 갈색의 교복을 입은 채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 특유의 당당함을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전혀 어른스럽지 않으나 불안 한 점 없어 왠지 믿음이 갔다. 물론 듄만 빼고.
“듄! 너는 포트에 들어간다며, 축하해!”
듄은 제 마음 한구석의 불안이 들킨 것마냥 크게 몸을 흠칫거렸다. 그래, 이 네 사람 중 듄만이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듄은 그것을 가릴 여유도 없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 응, 고마워.”
“뭐야, 안 기쁘냐?”
“히어로로 쎄 빠지게 굴려질 거 생각하니 암담한 거 아니겠냐.”
“야, 말 다 했냐?”
사실 진로에 대해서 제일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은 듄임에도 불구하고, 듄은 확신이 없어서 그들처럼 당당한 얼굴을 할 수 없었다. 타냐는 그것을 예민하게 알아챈 것 같았다. 괜히 멋쩍어진 듄은 괜히 곱슬거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 사람은 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엔 내 말 들은 체도 않더니, 이럴 땐 꼭 대답을 들으려 한다니까.
“아니, 너희는 가수에, 부서장에, 기획사 사장에… 잘하고 있으니까. 그보다 대단하진 않다는 소리지.”
역시 너희는 좀 특별하구나, 싶어서.
…그래서 정작 별 고민 없이 진로를 선택한 너희가 그렇게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금 질투하고 있다고… 같은 뒷말이 나올 뻔했다. 겨우 숨기긴 했지만 말해놓고 보니 너무 치졸한 질투 같아 귓가가 조금 뜨듯하게 달아올랐다.
“일단 얜 아직 사장이 될지도 잘 모르는데.”
“야!”
“시비는 그만 걸자, 다나… 유다도.”
다행히 그 화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나와 유다가 서로의 멱살을 터는 바람에 듄의 비루한 자신감을 파헤치는 것은 유야무야된 것이다. 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의 싸움을 말렸다. 이 역시 이젠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네 사람은 다시 한 덩이로 뭉쳐서 눈을 뚫고 걸어갔다.
“그래서 오늘 우리 뭐하냐?”
“-나 겨우 시간 낸 건데, 오랜만에 같이 놀고 싶어. 노래방 갈까?”
“…넌 노래 부르는 사람이 또 노래방 가고 싶냐?”
“같이 놀면서 부르는 건 또 다른걸.”
하지만 어쩐지 듄은 똘똘 뭉친 세 사람을 영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느려지는 발걸음, 생각에 잠긴 얼굴. 그것을 타냐가 눈치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듄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는 타냐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분명 앞서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대체 언제 다나와 유다를 두고 자신에게 다가온 건지 당황스러웠다.
“듄.”
“타냐?”
“너도 대단해.”
그리고 툭 던져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늘 그랬잖아. -너무 불안해 보여서 그래.”
“…”
“듄, 넌 가끔 너 혼자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우린 모두 빛나. 알지?
듄은 늘 평정을 유지하던 제 얼굴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느꼈다. 불안함과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당황과 설렘이 그 자리에 있었다. 듄에게 간지러운 말을 남긴 타냐는 어느새 다나에게로 포로롱 날아가 있었다. 듄은 그것을 쫓아가려는 것처럼 발을 재게 놀렸다.
“일단 밥부터 먹자. 타냐 밥 안 먹었단다.”
“난 찬성."
그래, 타냐의 말은 사실이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자신마저, 이들과 함께하면 특별해진다. 듄의 학창 시절 대부분의 추억은 세 사람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분홍과 파랑, 그리고 꿀 빛 띠는 노란색. 하나같이 듄과 같이 평범한 사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들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제멋대로이기까지 해서, 영역을 가리지 않고 선을 넘어가며 이리저리 자욱을 남겨갔다. 그것이 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모두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당장 히어로서의 변변한 각오도 없고, 이 직업을 계속할 자신도 없지만 어쨌든 괜찮을 거라는 느낌이었다. 듄은 타냐의 꿀로 만든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보며 어쩐지 위안을 얻었다.
“…”
…졸업하면, 이제 이런 일도 없으려나.
졸업식장을 등지고 멀리 걸어온 지금에야, 듄은 문득 이 모든 것이 아쉬워졌다. 다나나 유다가 들었다면 진심이냐며 비웃을 얘기였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넷이 함께 수업을 듣던 교실, 매일 투닥이던 다나와 유다, 그것을 말리던 듄과 타냐….
그중에서도 타냐는 특별했다. 다나나 유다만큼은 아니어도 조용히 사고를 몰고 다니질 않나,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훌쩍 다가와 지금처럼 그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고는 했다. 제일 많이 수혜를 받은 인물은 매일 위장약을 달고 다니던 듄. 하지만 앞으로 이렇게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
그래서 듄은 앞으로도 그리울 것 같았다.
“듄! 피자 괜찮아?”
“응, OO피자 가려고?”
“졸업식인데 돈 좀 써야지. 피자 OOO 간다.”
“어차피 돈 쓰는 건 타냐잖아.”
“난 좋은 걸~”
그와 함께한, 말 그대로 금빛의 시간들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