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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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Fate의 길가메쉬 드림입니다.
두 마술사가 어느 도시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한 명은 키가 작았고 한 명은 키가 컸다. 키가 큰 쪽이 카페에서 포장해 온 음료를 마시는 사이 키가 작은 쪽은 사람들 인파의 사람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사람 대부분은 먼저 시선을 피하고 갈 길을 갔다. 몇몇 이는 뭘 그렇게 보냐며 시비를 걸었지만, 키가 큰 쪽이 적당히 물렸다. 잠시 후, 키가 작은 쪽이 머리를 짚으며 이마를 찡그렸다. 키가 큰 쪽이 작은 쪽에게 물었다.
“어때?”
키가 작은 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역시 이 도시는 잘못되었어. 같은 사건이 여럿 중첩되어 있어, 아니, 그리될 거야. 왜냐하면, 그 사건들은 미래에 있으니까. 한두 개도 아니야. 당장 보이는 것만 세어봐도, 7개?”
“평행세계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지금까지 내가 미래시로 관찰한 결과로는 그래.”
키가 큰 쪽은 끙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 미래는 원래 확정된 것이 아니잖아? 따라서 그때가 오면 다른 가능성은 사라지고 결국 한 가지로 결과로 귀결되지 않겠어?”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라질 유형이면 네가 너한테 이렇게 말하겠어? 게다가 시계탑에서 우리를 굳이 보내지도 않았을 테지.”
작은 이는 곧장 면박을 주었고 큰 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그런가?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거람?”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어. 시계탑에서도 의아해하는 것 같아. 하지만 이유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점이 중요하지.”
“해결을 꼭 해야 해? 어차피 한 세계의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를 의식하지 못하잖아.”
“이곳에서는 곧 성배 전쟁이 열려. 어떤 능력을 가진 서번트들이 소환될지 몰라. 만에 하나 그 세계가 모두 중첩된다면, 7명의 서번트가 7번 나타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너는 총 49명이 일제히 날뛰는 꼴이 보고 싶어?”
“나는 좀 보고 싶기는 한데, 마술 협회에서 절대 용납하지 않기는 하겠네. 좋아. 어떻게 할 셈인데?”
키가 작은 이는 허공에 손을 뻗어보았다. 손끝에 바람이 닿았다. 그는 일곱 갈래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불던 바람을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이 세계를 중심으로 모든 사건을 하나로 합칠 거야. 아직은 얕게 중첩된 정도여서 가능해. 물론, 여파는 있겠지. 몇몇 이들이 일곱 사건을 전부 기억해 내고 혼선을 겪을지도 몰라. 하지만 적당한 암시를 걸면 다들 꿈 정도로 여기고 말겠지.”
작은 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음, 그 시간대에 겪은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말이야.”
“아저씨. 뭐해요?”
LY는 소파의 팔걸이에 휙 올라앉아서 길가메쉬에게 물었다. 우아하고 대범한 몸짓이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길가메쉬는 와인 잔을 흔들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아저씨라니, 제법 당돌한 호칭이다. 허나 길가메쉬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와인으로 입가를 적시며 느긋하게 말할 뿐이다.
“가까이 오지 말거라. 네게서 냄새가 난다.”
“무슨 냄새요?”
“매캐한 연기의 냄새. 그 옷은 빨아도 그 모양인가? 버리지 그러냐?”
LY는 소매를 들어 제 코끝에 가져갔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싫어요. 난 이 탄 내음이 마음에 들어요. 이건 그날을 증명하잖아요. 내가 가문에서 완전히 벗어난 날.”
LY는 의자 팔걸이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치마가 붕 뜨며 나풀거렸다. LY는 가문을 불태우던 날에도 그렇게 돌았었다. 저택을 태우며, 가족을 태우며, 재를 밟고 사뿐 돌았다. 이전과 다르게 툭하면 울어버리지도, 약해 빠져서 달달 떨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 소녀는 눈을 기울이며 길가메쉬에게 도발적으로 물었다.
“기껏해야 재 냄새가 좀 난다고 내 가치가 사라지나요?”
“진정한 보물은 먼지가 좀 묻는다고 빛을 잃진 않지.”
“거봐요.”
LY가 까르르 웃어댔다. 그 말이 맞았다. 이번의 LY는 길가메쉬가 직접 깎아낸 보물이다. LY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길가메쉬의 입김이 들어갔다. 어느 누가 감히 이 몸의 은혜와 영광을 얻겠는가?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이다. 그런 보물을 함부로 내팽개치는 건, 길가메쉬의 감식안이 흐려졌다는 증거이다. 만일 LY가 애초에 보물이 아니었다면 몇십 년 전부터 그 눈이 망가졌다는 뜻이 될 테다. 길가메쉬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아니, 애시당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LY가 거적떼기나 다름없는 옷(순전히 길가메쉬의 기준에서)을 입은 것은 꽤 눈에 거슬렸기에 몇 마디 더 얹었다.
“그래도 그렇지, 고작 그 정도 이유로 그딴 옷을 애지중지한다는 거냐? 참 구질구질한 녀석이야.”
“그런 말을 할 거면 신경조차 쓰지 말아요. 아저씨가 뭐라고 해도 이건 내가 얻은 전리품이에요. 아무리 하찮아도, 내가 가문을 불태우고 그들에게서 빼앗아낸 물건이라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요.”
“소박하기 그지없군.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의 온갖 보물이 내 보물 고에 들어있지. 원한다면 그 안의 보물을 너는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어. 더 아름다운 옷은 물론이고.”
“하지만 그 안에 내 가문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옷이 있나요? 그들의 절규와 비명이 섞인 화염을 담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나요? 없잖아요.”
그 일을 말하는 LY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그렇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길가메쉬였다. 인간의 선악이나 도덕 따위의 틀에 얽매이던 갑갑한 사고방식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아저씨 말대로 난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할 거예요. 하지만 가문을 다시 태우는 일은 불가능해요. 이미 죽은 것을 또 어떻게 죽이겠어요? 그러니 세상에 단 하나뿐이고, 귀하고 유일한 내 보물이에요.”
그래서 길가메쉬는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모습도 나름대로 제법 귀엽게 봐줄 만했다.
“아직 눈이 낮군. 그러나 마음대로 하여라. 작은 것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시절도 있는 법이지.”
LY는 몇 발짝 더 내디뎌서 길가메쉬의 맞은편 쇼파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길가메쉬를 응시하면 말했다.
“게다가, 나를 고작 이 정도에 마냥 만족할 사람으로 여기지 말아요. 나는 정말로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에요. 이런 옷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호오.”
인간이 속으로 꼭꼭 눌러놓던 욕망을 열어젖히며, 추구하고 취하는 모습은 길가메쉬를 늘 즐겁게 만들었다. 감히 얻을 수 없는 것을 노리다가 파멸하거나,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고 추하고 역겨워지거나, 이룰 수 없는 소망을 가지고 파멸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에 약간의 불쾌함이 섞일지라도 그 과정은 충분한 유흥거리가 되어줬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유흥거리를 넘어선 빼어난 즐거움을 주었다.
길가메쉬는 LY의 욕망을 두드렸고 LY는 개화했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다. 물론 이 정도에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길가메쉬는 LY의 욕망에 대해 물었다.
“무엇을 얻을 것이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LY는 턱을 괴며 생각하는 듯하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성배. 만능의 원망기. 곧 성배 전쟁이 열리잖아요?”
길가메쉬는 눈을 약간 찡그렸다. 저번에 벌어진 7번의 성배 전쟁은 길가메쉬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모든 결과에서 LY를 잃었다. 그렇기에 공들여 새로 빚은 LY가 다시 성배 전쟁에 뛰어들겠다고 주장하는 상황이 내키지 않았다.
“성배? 하필이면 그딴 걸……. 이유는? 빌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나?”
“소원이 꼭 필요한가요? 모두가 노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을 그저 내가 갖겠다는 마음이면 안 되나요?”
안 될 것은 없다. 길가메쉬는 원래 그러한 종류의 욕망을 긍정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잔을 내려놓고 단호하게 답했다.
“안 된다.”
LY가 즉각 되물었다.
“왜요?”
길가메쉬는 귀찮게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팔짱을 끼고 완고하게 말했다.
“내 친히 너를 위해서 충고이다. LY. 성배 전쟁은 포기해.”
“정말 왜요? 혹시 아저씨가 어울리기에는 격이 안 맞는 장소라고 말할 건가요? 걱정 마요. 애초에 아저씨를 데려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다른 서번트를 소환할 준비도 이미 끝마쳤고요.”
LY는 당당하게 말했고, 이건 이것대로 길가메쉬의 신경을 긁는 발언이었다. 길가메쉬는 눈썹을 세웠다.
“하, 감히 나를 두고 다른 누구를 택해?”
“당연히 다른 자를 데려가야죠.”
LY는 당연하다는 듯 검고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리고 고요하게, 날카롭게 웃으며 물었다.
“제 마스터를 살해한 서번트를 성배전쟁에 굳이 데려가는 마스터가 어디 있겠어요? 당신은 나를 죽였잖아. 그것도 세 번이나.”
유리잔이 깨지지는 않았다. 길가메쉬는 교양 없게 잔을 놓쳐 떨어뜨리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위기는 떨어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났다.
“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떠벌리고 있느냐?”
LY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탁자에 놓인 와인을 제 몫의 유리잔에 따랐다. 잔을 올려 천장의 불빛에 투과시키니 선명한 붉은 색이 보였다. LY는 그 반짝임을 보면서 홀린 듯 말했다.
“붉은 선이 그어졌지요. 하늘부터 땅에 이르기까지, 천지를 반으로 가를 것처럼.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내게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어요.”
길가메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LY가 묘사하는 것은 분명 에아였다. 그리고 길가메쉬는 이번 20여 년 동안 LY에게 에아를 선보인 일이 없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꺼냈던 때는 성배 전쟁이 벌어질 때였다. LY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잔을 내려서 와인을 약간 머금었다. 홀린 듯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LY가 차분히 말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아처.”
“……언제부터 알았지?”
“적어도 방금 안건 아니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되었어요.”
“그걸 내게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느냐?”
LY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다고 말하는 듯한 문장에 속으로 반문했다. 누군가가 죽임당하는 미래를 보았을 때, 그 미래의 살해자에게 살인에 대해 쉽사리 말하겠는가? 그러나 LY는 그런 이유를 꺼내는 대신 방법을 일러주었다.
“우리 가문이 그거 하나는 잘 알려줬어요. 마술사라면 제 비술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는 거. 꼭 마술이 아니더라도 비장의 무기와 가진 정보와 마지막 수 같은 것은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되지요. 은닉이 생활화되니 숨기는 게 어렵지도 않더라고요.”
“감히, 너 따위가 이 내게?”
LY는 더 이상 발랄하지도 천진난만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미소는 머금고 있었지만, 그것이 가면에 불과하다는 건 이제 까발려졌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간 길가메쉬에게 웃어 보이던 LY는 지금까지 무슨 속내를 가지고 자신을 대해왔던 것인가? 길가메쉬는 LY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으며 그 마음을 조종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완전히 제 손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것이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지? 길가메쉬는 탁자를 세차게 움켜쥐었다. 탁자는 두 번 다시 못 쓸 꼴이 되었다. 그는 원한다면 탁자 말고도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분노를 다스리고 LY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지?”
저 계집은 감히 길가메쉬를 마음에 품은 적도 있었다. 그 시절의 LY는 몸이며 마음이며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LY가 그 시절을 기억한다면, 그 시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옮아왔다면 감히 자신에게 이리 대하지도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LY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되묻기만 할 뿐이었다.
“궁금해요?”
“이 방자한 계집이……!”
길가메쉬는 손을 쓰려다가 멈칫했다. 그것은 망설임이었다. LY는 자신이 만들어낸 보물이다. LY가 불태운 가문의 녀석들은 그들이 LY를 만들었다는 착각에 빠져 지냈다. 천만에! 누가 LY를 다시 태어나게 했는가? 누가 LY가 이렇게 자라도록 이끌었는가? 전부 길가메쉬이다. 가문의 녀석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LY는 태생부터 길가메쉬의 것이었고, 그렇기에 빼어나며 귀하고 값진 보물이었다. 보물이 아니었다면 길가메쉬가 소유했을 리가 없었다. 길가메쉬는 인간 하나쯤은 간단히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길가메쉬가 보물을 잘못 골랐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수 있겠는가?
“나에게 말대답이라니. 당장 고하라, 계집! 시간을 끈다고 네게 다른 수가 있을 것 같으냐?”
“맞아요. 당신은 강대하지요.”
LY는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나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요. 어디 죽이는 것뿐일까? 다른 방법도 있겠지요. 이를테면 나를 어딘가에 가둬놓고 당신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요. 아, 이건 지난번에 써먹었던가요?”
그것마저 기억하고 있었다. LY는 길가메쉬에게 다가갔다. 탁자를 가볍게 건넜고 길가메쉬의 얼굴 앞에 검고 긴 머리를 드리웠다.
“그런데 그 방법은 결국 실패했잖아요. 내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아니, 당신은 아직도 몰라요. 그때 내가 왜 죽었는지, 당신은 이해했나요?”
“…….”
이해해야 하는가? 길가메쉬는 그것을 그저 천한 것의 짜증스러운 변덕이었다고 여겼다. LY는 고개를 저었다.
“못했죠? 그럴 줄 알았어요. 이제라도 알려줄게요.”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문장이 있다. 어떤 주술도 섞지 않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듣게 되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다. 사랑하고 있음을 토로하는 고백,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내뱉은 유언, 제 죄를 털어놓는 고해. LY는 길가메쉬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7번의 죽음이 얽어낸 잔인함을 지녔으며, 길가메쉬가 다듬어내어 그 잔인함을 무기로 다룰 수 있게 된 어느 소녀가 작게 속삭였다.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문장을.
“그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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