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림관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올해 8월 11일의 일이었다. 청림관—그 숙박업소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된 때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점이다. 이 부근에 호화로운 숙박업소가 하나 생겼다더라 하는 소문이 무성하였던 것이 지지난해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소문을 물론 들었고, 기본 호텔의 골조에 나무 기둥을 덧붙이고 기와지붕을 덧씌운 외양이 무척
형의 말도 안 되는 요청에 반문해보았지만 슬프게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었다. “그래. 네가 말한 대로다.” 형은 진심으로 동생에게 방해꾼 아무나 하나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부탁일까? 내가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안 하고 툭 내뱉은 것이? 나는 살인자다. 많이도 죽였고 그 중에는 꼭 죽어 마땅한 사람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처럼 말하는 괴물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비밀은 단 한 명에게라도 털어놓는 순간 온세상 모두가 알게 되니까.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영원히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딱 한 명에게만 말하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한 상대가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말은 그 누구도 믿지 않으니까. 어머니는 ‘미친 사람’이었고 모든 사
“저 퍼시에요.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아일랜드에 오자마자 바로 여기 왔어요. 어머니도 많이 야위셨군요. 형이 굶기는 건 아니죠? 정말? 형이 잘 대해주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당연히 어머닐 믿죠. 어머니가 저에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셋 중 절 가장 사랑하시는 것, 다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이국 땅을 여행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었답니다. 하하, 사
퍼시가 사람을 무참하게 죽인 지금 괴물은 이 순간이 왜 이렇게 슬픈지 알 수가 없었다.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지만, 뱃속 깊은 곳에서 절규가 메아리치다가 간신히 혀 끝에서 멈췄다. 어쩌면 예상한 게 맞았기 때문일까? 퍼시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였다. 아마 지금 퍼시의 눈빛으로 보건데, 퍼시는 가책의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괴물의 짧은 삶은 계속 이어지다가 퍼시를 만난 순간까지 도달했다.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이제 새로 시작될 이야기들만 남았네. 앞으로 뭘 할 생각이지?” “내 창조주를 찾아갈 것이다.” “부모와의 상봉이라, 대개는 나쁘지 않지.” “‘대개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란 자가 너를 반길지 모르겠단 뜻이지. 널
괴물이 바란 이야기는 좀 더 대화에 가까웠다. 보통 사람들이 삶을 지나치며 흘리고 가는 그런 대화들. 하지만 곧이어 괴물은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었음을 깨달았다. 괴물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산 적 없었고, 그런 화젯거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괴물이 들려줄 수 있는 것들은 그날따라 유달리 낮은 음조로 읊조린 이름 모를 새들과, 인간들의 고함, 마음을 맴도는 증오
괴물이 구한 사내는 고급 옷을 입은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그 뻣뻣하고 일하기 힘든 고급 옷 때문에 그는 더 허우적댔을 것이다. 완전히 물에 젖은 붉은 머리칼은 해초처럼 구불거리며 양 뺨과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는 날카로운 인상의 눈이 괴물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의 눈빛이란 게 이토록 형형할 일이었던가? 여름 초목
복수하기 좋은 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오늘은 어쩌면 그날인지도 몰랐다. 창백한 햇살이 살갗을 간질이는 동안, 이름 없는 괴물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남자를 눈에 담았다. 괴물이 인간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 뒤 처음으로 마주친 인간이었다. 괴물은 한 인간의 죽음을 냉엄하게 내려다보려는 대신, 인간을 구하고 싶어서 꿈틀거린 손가락을 먼저 느꼈다. 말도
3일간의 기록 w. 주인장 '팟' 하는 부싯돌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 이내 손톱 만한 불꽃이 인다. 기현은 입에 문 기다란 하얀색 담배 끝에 불을 가져다 대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다. 입 안으로 스멀스멀 퍼지는 매캐한 연기를 속 안으로 삼키고서 남은 희뿌연 연기를 대기 중으로 길게 내뱉는다. 한여름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아버지는 집 뒤에 있는 산으로는 절대 가지 말라고 했다. 평소에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냥 그렇구나, 했다. 아버지는 똑똑하니까 무슨 이유가 있겠지, 했다. 견심화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름의 냄새가 났다. 한들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 그늘이 일렁거렸다. 주위를 둘러 보면 온통 녹음이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얼마 전 바닥을 덧댄 신 아래로 새파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빨강, 파랑. 색색의 빛들은 어두운 밤하늘을 밝혔다. 시끄러운 사람들 속에 경찰 제복 차림의 한 남성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북적북적한 인파들을 가르며 뛰어다닌다. 칠같은 짧은 까만 머리칼에, 빛나는 적안. 새하얀 피부와, 오한 코, 앵두 같은 입술. 조각 같은 남자의 얼굴 위로 삐질 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