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목격

내가 청림관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올해 8월 11일의 일이었다. 청림관—그 숙박업소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된 때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점이다. 이 부근에 호화로운 숙박업소가 하나 생겼다더라 하는 소문이 무성하였던 것이 지지난해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소문을 물론 들었고, 기본 호텔의 골조에 나무 기둥을 덧붙이고 기와지붕을 덧씌운 외양이 무척 아름다우며, 전통적인 건축 소재에 빅토리안 시대에 유행했다고들 알고 있는 고풍스러운 식물 패턴을 새긴 등 세심한 형태의 장식들이 가히 충격적으로 느껴질 뿐더러, 그곳의 주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우나 다소 쌀쌀맞다는… 쓸모없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숙박업소가 입에서 입으로 그 이름이 오르내린 데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청림관이 세워진 부지는 몇 세기간 유수의 예술 인재들을 배출한 공 씨 집안의 소유였던 것이다. 본래 그곳에는 수백 년간 그 외관이 변하지 않은 전통 가옥이 있었으나, 칠 년 전 공 씨 집안의 몰락과 더불어 가옥 역시 불타버리고 말았다. 본래 그 집을 둘러싸고 있던 숲 역시 마찬가지다.

화재로 불탄 건축물을 비슷한 형태로 복원한 것에는 아무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화재 이후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민둥해진 부지에 어느새 높다랗게 자란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 있다는 것이 소문의 핵심이었다.

아무도 건축 과정을 목격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그 건물이 떡하니 세워져 있더라, 푸르게 흔들리는 그 숲을 거닐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숲이 말끔히 복구되었는지 의아해질 뿐이더라, 하는 괴담 같은 이야기들. 지성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답잖은 도시 전설이라고 생각할 테다. 본래 자연은 빠르게 복구된다. 깊은 숲속에 있는 건축물의 과정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서로에게 속삭이는 기담을 들어도 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만 했다.

대단한 참사로 보도되었던 그 화재 현장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다가 연기 냄새를 맡았다. 불은 빠르게 번졌고 내 방은 쓸데없이 넓은 집에서도 안쪽에 있었다. 나는 화병의 물로 침대맡에 있던 손수건을 적셨다.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복도를 뛰었다. 고용인들이 머무는 숙소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기다시피 해서 3층으로 올라갔다. 창문을 깨고 뛰어내려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깊은 숲속에 있었으므로 화재는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서야 불이 꺼졌다. 인명구조는커녕 마을로 불이 번지지 않게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 불을 낸 지는 여전히 모른다. 누군가 고의로 낸 것이 분명하다는 점만 사건을 담당한 여자에게 전해 들었다. 칠 년은 그때 상한 호흡기가 회복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불을 낸 사람이 누구일지도 이제 더는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칠 년이 불을 사용하는 요리에 익숙해지는 데는 조금 부족하다. 인형처럼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한 남자애 환각이 보이지 않게 되는 데도 부족했다.

청림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서비스가 훌륭하다더라 하는 극찬으로 바뀌었을 즈음, 즉 내가 공태운의 환각을 일흔네 번째로 보던 날 새벽에 나는 등불을 들고 마을 외곽을 빙글빙글 돌았다. 동이 틀 무렵엔 너무 자주 오가서 유년기의 기억도 색이 바래지 않는 숲으로 들어갔다. 무릎까지 자란 이름 모를 풀을 헤치고 헤치고 헤치고 수 시간을 나아가야지만 청림관이 나왔다.

청림관은 야트막한 담과 또 그 담 주변에 촘촘히 난 수풀에 둘러싸여 있었다. 검푸른 기와와 그것을 떠받친 어두운 색의 처마에서 시선을 내리면,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무 기둥이 자랑스레 입구를 지탱하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곡선의 흙길을 따라 정원을 한 바퀴 돌게 된다. 미로의 끝에 청림관이 있었다. 놀랍도록 내가 어릴 적을 보냈던 건물과 유사하면서도 놀랍게도 그보다 훌륭한 예술성을 뽐내며… 청림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웠던 것은 내가 담벼락에 바짝 붙어 무릎을 어중간하게 굽히고 그 호텔 건물을 보면서도 하늘을 집어삼킬 것처럼 타오르던 불을 떠올리지 않았단 점이다. 내 심정이 너무나도 차분했고 망막에 새겨진 듯 떠오르던 공태운의 형상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안심했다. 편안한 마음을 둥글게 뭉친 한숨을 내뱉으며 담벼락에서 떨어지려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면 나는 몇 달 후에 받은 청림관에서 묵겠냐는 채주린의 제안에 콧방귀를 끼고 기차로도 몇 달이 걸리는 내륙 지방으로 이주했을 터였다.

그러지 못한 것은 담을 꽉 붙들었던 손을 마주쳐 털던 순간 내 눈에 담긴 장면 때문이었다. 하필 그 순간에 잘 가꿔진 정원을 천천히 거니는 한 남자가 보여서였다. 팔다리가 길어 우아한 느낌이 드는 남자는 고풍스럽게 느껴질 만큼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불명확한 시야로도 그가 얼마나 아름다울지는 누차 짐작이 갔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감상도 들었다.

너무 멀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심장을 잡아 비트는 듯한 익숙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숨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수풀을 헤치고 목을 위로 쭉 뺐다. 남자는 제 옆의 고용인 두엇과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한가로운 걸음을 옮기는 남자가 점차 가까워졌다. 나는 뺨을 스치는 나뭇잎이 간지러워 기침을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숲의 공기를 헉 하고 집어삼켰다.

남자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검은 머리카락, 파리하게 질린 듯 흰 피부, 곧고 가는 허리…. 나는 남자의 냉랭한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면서도, 마치 불빛을 보고 딱딱하게 굳은 야생동물처럼 벌벌 몸을 떨었다. 미지근한 공기에 맞닿은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가 딱딱 맞부딪쳐서 턱에 힘이 풀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공태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환각이라고 치부하기에 남자는 너무나도 실존적이었다. 나는 공태운, 아니,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남녀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남자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 틈에 나는 몸을 수그려 수풀에 몸을 숨겼다. 몸을 돌려 마치 십 대 후반, 공태운의 생명을 놓고 저울질하던 때에 그렇게 했든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후로 나는 좀처럼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그나마 바쁘게 몸을 굴리고 일을 할 때면 괜찮았지만, 눈을 감았다 치면 허여멀건한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알던 공태운의 얼굴이 아니라, 구역질이 나게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자면—눈을 감고 주시한다니 어불성설로 느껴지겠지만—곡선이 뚜렷한 공태운의 눈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오물거리듯 떠들리던 입술은 공태운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듯한 말을 했다. 그것은 떠올리기도 괴로운 애걸과 분절된 총애로 이루어져 있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감기는 눈꺼풀보다 괴상한 무언가와의 독대를 더욱 참을 수 없어서 밤마다 복잡한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사나흘 밤을 새우고 산책을 하면 하루쯤은 잠이 들었으나 잠이 든다고 피로가 해소되는 일은 없었다. 잠이 들면 이번엔 꿈에 나타난 공태운이 또다시 그 징그러운 얼굴을 하고 들척지근한 목소리로 역겨운 말들을 쏟아냈던 것이다.

도무지 견딜 수 없겠다 싶어 이사를 준비하던 시점에 이웃 사람 채주린이 청림관에서 숙박할 것을 제의했다. 무료로 숙박권이 생겼다고 했으나 그게 거짓말이란 건 네 살짜리 어린애에게도 빤했다. 청림관 건물이 완성되기 전부터 그곳에 방문하기를 염원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손가락만 빨며 기다리고 있는 형국에 무료로 생긴 숙박 기회는 사막에서 마주한 오아시스 형태의 신기루 따위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민하지 않고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내가 그런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했는지 좀 더 부연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수 있겠다. 어쩌면 내가 채주린 뒤편에 서 있는 공태운의 환각을 보았고 그 남자의 형상을 한 공태운이 채주린의 제안을 수락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기 때문일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이제 문제를 직면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익명의 누군가의 쪽지를 읽고 난 다음 그런 제안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단순히 외롭고 쓸쓸해서 그러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원인에서건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어둠을 바라본다. 암흑에 익숙해진 눈은 쉽게도 공태운의 얼굴을 한 남자를 분별해낸다.

어둠 속에서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내 눈을 마주한다. 남자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물어뜯어 끝이 날카로워진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남자가 내 목을 조른다 해도 이 주먹을 휘두를 일은 없을 것임을 자각한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남자는 그제야 제 몸을 물렸다. 나는 잠든 적이 없으므로 잠에 취하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야 단성희의 존재를 깨닫다니 당치도 않다. 공포로 심장이 저렸다. 

이불을 내리고 변명 한 마디조차 하지 않는 남자에게 대답을 요구한다. 왜 당신이 여기에 서 있습니까? 떨리는 목소리가 꼴사나웠다. 

단성희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서 있었으니까요. 

언제부터, 그렇게 묻고 손가락을 까딱이자 동문서답이 튀어나온다.

두려워하지는 마세요 저는 보기만 했어요 그저 나는 명운 씨가 잠을 잘 자는지 여부가 궁금해서…. 나한테 밤이고 낮이고 토로했잖아요. 나와 꼭 닮은 얼굴이 떠올라서 잠들 수 없다고. 그렇다면 원형이 앞에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나는 그 궤변의 허점을 다만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 단성희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으나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주먹 쥔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히죽 웃었다. 웃으면서 말했다. 잠옷을, 따로 드린 것으로 아는데 입지 않으시네요.

까만 눈이 내 어깻죽지 부근을 훑었다. 눅진한 공기를 꿰뚫고 오한이 들었다. 

남의 손을 탄 것을 입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할까요.

나는 발을 침대 밑으로 내린다. 슬리퍼를 신을 생각도 못 하고 맨발로 마루를 건넌다. 방문을 열자 단성희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나에게 충고한다. 잘 때는 문을 잠그세요. 웬 이상한 시정잡배가 귀중품을 노릴 수도 있는 거고. 무엇보다도 귀중한 목숨을 노릴 수도 있는 것이고. 사랑하는 동생이 그런 조언은 해주지 않던가요? 그런 말을 하며 문 틈으로 몸을 뺀다. 

문을 닫으며 단성희가 덧붙인다. 나는 생각보다 명운 씨 동생이 명운 씨를 각별히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고 가끔 생각해요. 

딸깍, 소리를 내며 문은 닫혔다. 나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열어 단성희의 멱살을 잡는다. 단성희는 순순히 이끌려 왔으므로 나는 수월하게 그를 벽에 밀어붙일 수 있었다. 협탁에 몸이 부딪히고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단성희는 쉽게 밀리고 어설프게 신음하는 시늉까지 낸다. 아픈데. 어리광 부리듯 말하는 단성희에게선 숲의 향이 배어난다. 나는 그 다정한 향을 애써 무시하며 묻는다.

내 동생을 압니까? 

단성희가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히죽 웃는다. 예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어떠한 변화도 없는데, 단지 입꼬리를 끌어올렸을 뿐인데도 나는 그 낯이 내 환각에 등장했던 일그러진 공태운의 얼굴과 꼭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시야가 흔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 오히려 짓씹듯 내뱉는다. 공태운을 알아요? 이번에도 단성희에게선 대답이 없다.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채주린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청림관의 담벼락에 바투 붙어 단성희를 훔쳐본 것이 잘못이었다.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칠 년 전이 아니라, 공태운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다면 하고 입을 연다. 지금 하려는 이 질문이 또다시 잘못된 경로를 제시하는 안내판 역할을 할 것임을 안다. 나는 단성희가 내가 할 질문을 알며, 내가 그러한 질문을 하는 동기까지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조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다.

당신이 공태운이죠.

아니요. 단성희는 아까와는 달리 기다려왔다는 듯 답변한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한다.

나는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한다. 단성희는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나는 단성희의 멱살을 서서히 놓는다. 단성희가 과장된 기침 소리를 냈다. 캑캑 하는 소리는 들짐승이 목이 졸렸을 때 낼 법하다. 

난 공태운이 아니라 단성희예요. 태운이가 명운 씨가 아니고 명운이가 공태운이 아닌 것처럼.

나는 그렇군요 따위의 형식적인 대답을 한다. 사실은 머릿속이 안개를 낀 것처럼 희뿌옜고 소리는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렸으므로 정말 그렇게 대답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단성희가 무어라 비난조로 말했는데, 나는 알아 듣지 못한다. 혹은 알아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돌린다.

나는 단성희의 비난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방문을 다시 연다. 금속 문고리에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깜깜한 복도 바닥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반질거린다.

초대받지 못한 주인에게 감히 나가 주세요 하고 부탁한다. 단성희는 관대하게도 비아냥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그럴까요 시간이 몹시 늦었으니 문단속에 주의하고 깊이 주무세요, 단성희가 말한다. 평소보다 높고 떨리는 목소리에서 나는 단성희 역시 불안해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단성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떠난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인영이 둥실둥실 복도를 미끄러진다.

나는 무언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는다. 나뭇결이 감추지 못한 냉기가 등에 스몄다.

나는 칠 년 전 화재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공태운은 수많은 사망자 중 하나였다. 

눈을 감자 또다시 공태운의 형상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단성희의 얼굴을 한 공태운은 나를 운아 하고 불렀다. 도발적인 어조를 띤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엉겨 붙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잖아. 전부 거짓말이었구나.

나는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공태운이 죽은 후, 삶에 대한 미련은 전부 떨쳤다고 생각했다. 공태운을 위해서 시작된 인생이었으므로 공태운이 없는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환각을 무시하고 잠들려 애쓰는 날을 반복하는 것은 전부 공태운의 말 때문이다. 공태운이 나에게 도망쳐서 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라고 생각했다.

나는 피가 스며 나올 정도로 꽉 쥐었던 주먹을 편다. 손바닥에 난 상처를 문지르면서 방금 전의 자신을 공태운이 보았다면 얼마나 우습게 여겼을지 생각한다. 나는 단성희가 두려웠다. 단성희에게 죽고 싶지 않았다. 공태운이 살라고 당부해서가 아니라 하잘것없는 본능이 그렇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참한 인생 따위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 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공태운이 나에게 정말로 바라는 것이 살아서 참회하는 것이든 죽어서 속죄하는 것이든 상관 없이. 기괴한 환상으로 평생 밤잠에 들지 못한다 해도 살아 있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든다. 눈을 뜨자 흐릿한 창밖으로 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그러기 위해선 이곳을 떠나야 한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