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열아홉의 그날

[단편] 열아홉의 그날

 

 

 

 

 

 

 

아침부터 사무실이 소란스러웠다. 어딘가에선 들뜬 목소리가 오갔고 다른 어딘가에선 핀잔 섞인 목소리가 오갔다. 무슨 일인지 조금은 궁금했지만 지금 그럴 틈이 없다. 회의에 빠듯하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자리에 대충 가방을 놓고 어제 준비해둔 회의자료를 빠르게 스캔하는데 앞자리 지혜씨의 머리가 빼꼼히 올라왔다.

 

 

"주은님! 오늘 회의 하시는거 20분 딜레이래요."

"네? 갑자기요?"

"아까 진수님이 주은님 연락 안 된다고 자리까지 왔었어요."

"아.. 연락."

 

 

지혜씨의 얼굴이 다시 스르륵 내려가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회의가 20분 늦어지니 천천히 오시라고. 회의에 지각할까 바짝 긴장했던 몸이 확 풀어졌다. 갑작스럽지만 반가운 소식이 마음의 여유까지 만들어준다. 회의시간이 20분이나 남다니!

 

 

"지혜님. 안 바쁘면 커피 한 잔?"

"좋아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한가득 장착한 얼굴로 하던 일을 바로 멈추고 일어나는 그녀였다.

 

 

 

"근데 오늘 뭐 있어요? 사무실이 좀 어수선한거 같아."

"에엥? 그 프로젝트 참여하지 않았었나? 왜 모르지?"

 

 

카페로 내려가는 동안 사무실의 어수선함에 대해 묻자 돌아온건 지혜씨의 의문 가득한 눈빛이었다. 내가 뭘 알아야 하나?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갸우뚱하자 의심을 풀지 않은 채 입을 연다.

 

 

"오늘 우리 회사 옥상에서 광고 찍잖아요! 그래서 배우 남윤 온다던데?"

"남윤...이요?"

"주은님 이번 제품 초반에 참여해서 알지 않아요?"

"아.. 몰랐어요. 변준성배우 쪽이랑 미팅까지 하고 빠져서 그 배우가 하는 줄 알았지."

"에이, 바뀐지 꽤 됐어요. 아무튼 오늘 남윤 온다고 다들 난리예요 난리."

 

 

카페에 도착해 음료를 주문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면서도 남윤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배우 남윤은 현재 잘 나가는 30대 남자 배우다. 열아홉살에 아이돌로 데뷔해 일찍 주목을 받았지만 그룹 멤버의 불미스러운 일로 그룹은 해체했고 몇 년 뒤 배우로 전향해 드라마에 나오기 시작했다. 키 크고 잘생기기만 한 아이돌 출신의 배우란 타이틀이 있었으나 의외로 연기도 잘해 버려서 단숨에 연기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구설수 하나 없이, 스캔들 하나 없이 30대가 된 지금도 여전히 잘 나가는 톱스타다.

 

 

 

"오늘 점심시간에 사람들이랑 촬영하는거 구경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아뇨, 저는 별로 관심 없어요. 회의도 있고."

"아웅~ 아쉬워~~"

 

 

아쉬운 표정을 애교스럽게 보이며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에게 코를 찡긋하며 가볍게 맞장구 친 후 자리로 돌아오니 벌써 회의 시간이다.

 

 

 

 

 

 

 

-

 

 

"회의는 내일 다시 이어서 하자고. 오늘 어수선해서 안 되겠어.

마저 먹고 알아서 일들 봐. 나 먼저 갈게."

 

 

 

도시락을 먹으며 오후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회의였으나 일찍 종료되었다. 사무실의 분위기가 회의실까지 뒤흔든건지 차장님의 남윤 사랑이 옥상에 올라가 있어서 집중이 안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또 하필 오늘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회의 날이라 중간중간 많은 잡담이 오갔다. 물론 잡담의 주제는 남윤이었다.

 

차장님이 떠나고도 잡담은 계속 됐다.

 

 

"차장님 따님이 남윤 팬이라서 싸인 받으러 가셔야 된대요."

 

 

진수씨의 오지랖은 역시나 대단했다. 이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게 회사 직원들의 정설이다. 도시락을 먹는 내내 사담들이 오갔고 밥을 먹고 남윤을 보러가자며 다들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왠지 나는 점점 입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남윤’이란 단어를 너무 들어서일까,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다. 옥상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빨리 도망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대충 도시락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은님 바람도 좀 쐴 겸 옥상 가요! 바람도 쐬고 남윤으로 눈정화도 하고."

"아.. 저는 괜찮.."

"긴 뭐가 괜찮아요~. 이럴 때 연예인 보지 언제 또 봐요."

 

 

도망가려는 걸 눈치챈 사람들이 언제 밥을 다 먹었는지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내 양쪽 팔은 이미 연행되는 사람처럼 붙들려 있었고 다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팀 단합력 정말 ... 좋다.

 

 

 

 

"아니 나는 진짜 안 가도 된다니까?"

"하.. 주은님.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기 하지 마세요~! 주은님이 가야 우리가 가는거라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이 되죠. 팀장님은 우리한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니까. 그리고 지금 눈정화 할 때가 됐어!"

 

 

 

옥상으로 끌려가며 작은 언쟁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다. 힘도 어찌나 좋은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남윤으로 얼마나 시력 정화를 하려는건지 다들 눈이 돌아보인다.

 

 

 

"에이, 벌써 사람들 많이 올라왔네."

 

 

옥상에 올라오니 이미 촬영 현장 주변엔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내 오른팔을 잡고 있던 윤정씨가 아쉬운 소리를 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니까. 눈 정화는 사진으로 하는게 좋겠다."

 

"주은님!!!"

 

 

이때다 싶어 팀원들을 다독이며 다시 내려가려고 할 때, 저 멀리서 곧고 강한 목소리 하나가 우리의 시선을 돌렸다. 앞자리 지혜씨였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그녀의 손짓에 잠시 느슨했던 팔이 꽉 조여왔고 마치 어린애들이 된 마냥 ‘와아아아’하며 팀원들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살려고 발을 굴렀다. 겹겹이 싸인 사람들을 물리치고 맨 앞줄에 도달해서야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안 온다더니~! 잘 왔어 잘 왔어!"

 

 

팔꿈치로 툭툭치며 애교스럽게 말하는 지혜씨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저깄어 저기!’ 그녀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스탠바이하고 있는 남윤이 보였다.

 

 

 

"너무 잘생겼지? 나 지금 여기 온지 20분 됐는데 20분동안 계~속 잘생겼어~!"

 

 

그녀의 너스레에 다른 팀원들이 꺄르륵 웃는다.

 

촬영 준비를 하는 남윤을 보고 있자니 울렁거리던 속이 벌렁거렸다. 속이 안 좋은게 아니라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였는지 심장소리가 머리에 울리기 시작했다. 괜찮을 줄 알았다. 10년을 넘게 티비로 그를 봐왔으니 이제 괜찮은 줄 알았다. 덤덤해졌다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너의 미소에, 나는 다시 15년도 넘은 나의 열아홉으로 돌아가 버렸다.

 

 

 

"남윤도 예명이지?"

"맞아요맞아요. 그럴거예요."

 

 

".. 남지윤."

 

 

한숨과 함께 그의 이름 세글자를 아무도 들리지 않게 내뱉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메이크업 수정을 하던 그가 슬며시 웃으니 담벼락 아래서 설렘을 찾던 열아홉 소녀로 만들었다.

 

 

나에겐 남들이 모르는 흑역사 시절이 있다. 사춘기 없이 무난한 청소년기를 지났다고 생각했던 내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사춘기는 너무나 지독했다. 그 시절 나를 알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을거다. 내가 지독한 중2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나만의 세계에 사로잡혀 수많은 흑역사를 남길 뻔 했으나, 와중에 다행인건지 나는 ‘사람들 앞에선 멀쩡한 반장, 하지만 뒤에선 일탈을 하는 우울한 소녀’에 취했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나의 사춘기에 그가 있었다.

 

 

 

 

'그래, 가봐.'

'네.'

 

 

충동적인 행동의 시작은 어느날의 교무실. 담임에게 전달 사항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 보이던 담배. 자리를 비운 체육선생님의 자리에 압수한 걸로 보이는 새 담배와 라이터가 올려져있었다. 담배와 라이터를 몰래 주머니에 집어넣고 태연한 척 교무실을 빠져나갔지만 주머니 속 담배를 움켜쥔 손엔 땀이 가득했다.

 

우리 학교엔 무용실이 있는데 건물 안으로 위치를 옮기기 전엔 밖에 따로 있었다. 단층 컨테이너 형태의 무용실은 학교가 리모델링을 하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되어 외부에 있는 무용실은 폐쇄되었다. 폐쇄된건 내가 입학하기 직전의 일이고, 아무튼 내가 학교를 다닐 땐 철거되지 않은 채 건물 뒤에 방치되어 있었다.

 

나의 아지트는 무용실 뒤편과 담벼락 사이.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는 정도의 좁은 길 같은 곳이었다. 그 곳에서 처음 담배를 경험했다. 기침도 너무 나고 도무지 왜 피우는지 알 순 없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 모든걸 이길 만큼 ‘반항하는 나’에게 취해 있었다. 물론 그 사춘기 이후로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담배를 사서 피울 용기도 없었고 어렵게 구해서까지 피울 부지런함은 없었으니까. 그 한 갑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담배였다.

 

 

반 쯤 피우던 어느날 너를 처음 만났다.

 

 

 

'어? 반장 담배피네?'

 

 

 

벽에 기대어 담벼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담배를 물고 있던 어느날, 너는 불청객처럼 나의 아지트에 나타났다. 그때 본 너의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날카로운 긴 눈이 차가웠지만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장난끼가 가득했던 그 얼굴. 너의 얼굴을 제대로 본 날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너는 고등학교 내내 어느 기획사의 연습생으로 유명했다. 유명세는 잘생긴 얼굴도 있었지만 시끄러운 너의 친구들 때문이었다. 누구나 얼굴을 알았으나 너는 그저 학교를 다닐 뿐, 나대지 않는 잘생긴 애였다.

무슨 일인지 너는 고3 때 예체능반을 가지 않았고 우리는 같은 반이 되었다. 교실에서 봤던 첫인상은 조용하고 잘생긴 애, 그게 전부였다. 나는 반장이라 너에게 몇 번 말을 걸어봤던 것 같다. 시끄러운 무리 속에 있던 너에게 말을 걸 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너와 친해 질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렇게 그냥 같은 반 애인 네가 나의 아지트에 온 건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올 게 왔군’ 누군가에게 걸리는 것마저 험난한 나의 사춘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너도 담배 피네.'

 

 

입에 담배를 물고 나타난 너는 나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서슴없이 내 옆에 와 아무렇지 않게 나의 영역에 파고들었다.

 

 

 

'여기서 담배 피면 뭐가 좀 달라?'

'... 그냥. 여기 앉아 있으면 햇살이 나만 비추는 것 같거든.'

 

'그러네. 여기 좋다.'

 

 

 

나의 대답에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던 너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널 보지 않았지만 그 순간 너를 보면 큰일 날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의 다정한 눈빛을 그 순간에 봤다면 나는 무방비하게 금방 빠져들게 분명했다.

 

 

 

'담배는 원래 피웠어?'

'... 아니. 그냥.. 그냥 펴보는거야.'

'그럼 언제까지 피울건데?'

'글세.. 이거 까지만?'

 

 

열 개 남짓 남은 담배갑을 보이자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맑고 화창한 날이긴 했지만, 사실 나는 너의 눈을 마주하기 어색해서 계속 하늘을 봤던 것 같다.

 

 

 

'그럼 너 이거 다 피울 때까지.. 나 여기 와도 돼?'

'... 그래, 좋아.'

'너 여기 올 때 문자 줘. 나도 올게.'

 

 

너의 다정함으로 자연스럽게 번호를 교환했고 나만의 작은 흑역사는 우리의 추억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너는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처음 봤던 그 날도 입에 담배만 물고 나타났을 뿐, 담배를 피우진 않았다. 나도 굳이 왜 피우지 않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그 당시의 나는 너의 의미 없는 행동 하나하나도 괜히 의미부여 하고 착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터놓고 나의 감정을 이야기할 순 없었지만 담벼락 아래에 나와 함께 했던 너는 충분히 나를 설레게 했다.

 

 

- 나 지금 갈건데

- 응 나도 갈게

연습실 가야돼서

담임한테 들렀다

갈게

 

 

 

그 날 이후 아지트에 갈 때마다 간단한 문자를 나눴다. 교실로 돌아온 너는 평소처럼 시끄러운 애들 사이에 있었고, 나도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문자도 매일 나누진 않았다. 마치 우리만의 룰이 생긴 것처럼 아지트에 갈 때만 문자를 나눴다. 이 비밀스런 관계가 너무나 설레고 짜릿했다. 어쩌면 너는 나에게 맞춰준 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가 지독한 병에 걸려 있었으니까.

교실에서 눈이 마주치면 남몰래 웃어주던 너의 그 미소를 잊지 못한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너는 싱긋 웃었고, 내가 먼저 너를 발견한 날이면 어느새 나를 보고 웃던 그 따스함이 아직도 마음에 남는다.

 

 

 

'너 이거 다 피워도 우리 여기서 계속 만나면 안돼?'

'왜?'

'그냥. 너랑 이러고 있는거 좋아서.'

'참나. 네 맘대로 해.'

 

 

사실 ‘담배를 피우는 나’에서 벗어난 건 너와 그 곳에서 만나기로 한 뒤 얼마되지 않아서다. 어느새 나는 담배보다 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져 억지로 담배를 피우면서까지 너와 함께 하고 싶었다.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가 아쉬울 정도로. 마지막이 아쉬운걸 알아챈건지, 아니면 너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너는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계속 머물기로 했다.

 

어느순간부터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날카롭다고 생각했던 눈이 나에게만큼은 무척이나 진지하고 따뜻하단걸 나는 안다. 솔직한 너의 그 눈이 보고 싶어 너에게 눈을 자주 맞추곤 했다. 그 떨림이 너무 좋았다.

 

 

 

'데뷔는 언제해?'

'모르겠어. 언젠간.. 하겠지.'

'금방 할거야. 너 되게 잘생겼잖아.'

'그런가.. 나도 빨리 데뷔하고 싶다.'

 

담벼락 아래서 다리를 뻗고 앉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크게 실속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대화는 물 흐르 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항상 말을 시작하는건 너였는데 언젠가부터는 내가 더 말이 많아졌던 것 같다. 나는 내 말을 다 받아주는 네가 좋았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해도 조용히 들어주던 너의 다정함이 좋았다.

 

 

 

'이번에 데뷔조에 들어가는데 랩을 해보는게 어떠녜.'

'너무 좋을거 같은데?'

 

 

너는 낮은 목소리가 콤플렉스라고 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참 좋아했다. 금방 들뜨는 나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침착한 목소리. 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날뛰는 나의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너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다.

 

 

 

 

'나 이제 데뷔 준비해서 학교에 잘 못 나올 수도 있어.'

 

 

 

여름이 찾아 온 어느 날이었다. 동복을 입던 우리는 하복으로 갈아입었고 따뜻했던 햇살이 뜨겁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해를 피해 그늘에 앉아있던 너는 아쉽다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나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너에겐 잘 된 일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데뷔.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구체적인 계획으로 짜여지고 있었다. 나의 아쉬움이 네가 그리던 꿈보다 클 순 없었다. 그렇다고 아쉬운 마음을 감출만큼 나는 단단하지도 못했다.

 

 

 

'너무 축하하는데 너무 아쉽다.'

'나도 그래.'

 

 

어쩌면 그 날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이란 걸 예감 했을지도 모른다. 못내 서운한 내 마음을 들켜 버릴 것 같아 너의 눈을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주은아, 좋아해 많이.'

 

 

 

아마 너도 알고 있었겠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쌍방이라는 걸. 서로의 앞날을 위해 꾹 참고 지냈던 것도. 고개를 돌려 본 너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슬퍼보였다. 너를 따라 나도 웃으니 내 볼엔 너의 손이, 내 입술엔 너의 촉촉한 입술이 짧게 포개졌다. 그 짧은 순간이 내 인생 첫 입맞춤이었다.

 

 

 

'좋아하기만 해서 미안해.'

'참나, 네가 고백한다고 누가 사귀어 준대?!'

'하하. 그러게.'

'웃지마.'

'정말 많이 좋아해, 주은아.'

 

 

네 마음이 진심이란건 이미 알고 있었다. 너는 참 솔직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날의 고백은 잠시 행복했지만 그 후의 나에겐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었다. 그 날 이후 너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너의 휴대폰은 꺼져버린지 오래였다.

 

하루아침에 널 보지 못하게 된 나는 남몰래 울어야했다.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녔지만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너의 생각에, 너의 걱정에, 온통 머릿속은 너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진정됐지만 너에 대한 마음을 모두 정리하긴 어려웠다.

 

 

 

'여주은! 나 먼저 밥 먹으러 간다? 저녁에 봐!'

'어, 쫌따 봐~'

 

 

 

네가 없는 고3 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너는 수능날이 오기 전 데뷔를 했고 나의 수능날은 예년보다 따뜻했단 작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졸업식엔 우리의 추억이 있는 무용실 뒤편을 다시 찾았던 기억.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던 그 곳은 눈이 녹지 않아 하얀 이불을 덮고 있었다. 앉지도 못하게 꽁꽁 얼어버린 눈을 보며 왈칵 눈물이 났다. 너와 있었던 모든 일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네가 지금도 여기 있었으면 어땠을까. 서로의 졸업을 축하하며 웃었을까. 우리의 추억을 바라보다 혹시나 네가 올까 한참을 기다렸지만 너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지윤, 졸업 축하해.」

 

 

 

 

담벼락에 남긴 작은 메시지에 나의 추억을 모두 남겨둔 채로 나는 너를 잊기로 했다.

 

 

 

 

 

 

 

 

"주은님 왜이렇게 멍때려?"

"어? 아 제가요?"

"뭐라는거야~ 지금 깜짝 놀랐으면서."

 

 

툭 치는 지혜씨의 팔꿈치에 다시 현실이 눈앞에 보인다. 그를 한참 보고 있자니 빠르게 뛰던 심장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걱정과는 달리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그를 마주하는게 어렵지만은 않다. 역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구나. 나는 덤덤한 어른이 되어 버렸구나.

 

나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네가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좋아하는 마음은 어느새 널 응원하고 있었고, 그건 우리가 닿을 수 없다는걸 깨달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다만 널 실제로 보면 내 마음이 다시 무너질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에 널 마주하는게 두려웠다. 지금은 너무 좋다. 너무 후련해.

 

 

 

"나 이제 좀 지루한데 먼저 가도 돼요?"

"저 얼굴이 지루해요? 하.. "

 

 

지혜씨의 탄식에 씽긋 웃어보였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웃는 얼굴을 봤으니 됐다. 어른이 된 것 같은 나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며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너의 얼굴을 보았다.

 

어?

 

기분탓일까. 너와 눈이 마주친 건, 나의 착각일까.

 

 

 

 

 

 

"어? 뭐야? 어?! 막 여기로 걸어오는데?"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남윤은 긴다리로 성큼성큼 이리로 오고 있다. 아니겠지, 착각이겠지. 아무리 마음을 다 잡아보지만 그는 분명 나를 보고 걸어오고 있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멀뚱히 눈만 꿈뻑이니 네가 웃는게 보인다. 다가올수록 주변이 시끄러워지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내 귀에서 페이드아웃 되고 있었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멀게만 보이던 얼굴은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고개를 들어야했다. 멍하니 그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반장, 오랜만이네."

 

 

 

 

시원하게 말려올라가는 입꼬리가 교복을 입은 어린애와는 사뭇 달랐다. 악수를 청하는 너의 손을 잡아도 될까. 또 한번 내 마음만 휘젓고 가버리는건 아닐까. 흔들리는 생각들을 비웃듯, 내 손은 그의 길고 예쁜 손을 잡았다.

 

 

 

 

"오랜만이네, 남지윤."

 

 

 

 

우리의 악수는 한동안 회사를 들썩이게 했다.

왜곡된 소문은 나를 고달프게 했지만 ‘정말 그냥 고등학교 동창이예요. 졸업하고 처음 봤고 더 볼 일 없지.’ 소문을 달래려 진수씨에게 슬쩍 이야기를 흘리니 소문은 빠르게 일단락됐다. 또한번 좋은 팀원을 뒀다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지혜씨의 의심스런 눈빛은 꽤 오래갔지만 그녀에게 마땅히 해 줄수 있는 건 없었다.

 

 

남윤과의 악수사건은 ‘남윤이 여주은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하고 악수를 한 후, 그저 쿨하게 떠났다.’로 마무리 되었지만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띠링-!

 

 

「 주은아 뭐해? 」

 

 

 

 

남윤은 짧은 인사 후 멋있게 퇴장했지만, 내 손엔 그의 번호가 써진 쪽지가 남겨졌다.

 

 

열아홉에 멈췄던 우리의 시간은 다시 시작됐다.

 

 

 

 

 

 

 

 

 

The End -

 

 

 

 

 

 

 

 

 

 

 

 

 

*에필로그*

 

 

 

"이번엔 좀 푹 쉬어보려고."

"그래그래. 잘 생각했다."

 

 

오랜만에 회사를 찾은 지윤은 밥을 먹기 위해 매니저와 사무실을 나섰다. 1층 로비로 내려오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달려온 연예계 생활에 대해 담소를 나눴고 이번에는 기필코 길게 쉬어보리라는 다짐도 해본다.

 

 

 

"어?... 형, 저기 뭐야?"

 

 

1층 카페에 시선을 뺏긴 지윤이 발걸음을 멈췄다.

 

 

 

"뭐. 어떤거?"

"저기.. 운형이형 있는 테이블 말이야. 뭐..뭐하는 자리야?"

"운형이형?"

 

 

 

매니저는 지윤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했고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지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발견한 것은 다름아닌 주은이었다.

 

 

 

"아~ 그거네. 준성이 이번에 광고 들어가는거 사전미팅일걸?"

"준성이형.. 광고? 그럼 앞에 계신 분들은 광고주야?"

"그렇..겠지? 왜?"

"어?.. 아니 그게..."

 

 

 

 

데뷔 직전에 압수당한 휴대폰은 스마트폰이 한창 나올 때 돌려받았고, 그녀의 번호도 바뀌어 있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친구에게서도 그녀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 보는건 자그마치 15년만이다.

 

 

 

 

"저 광고.. 내가 하면 안돼?"

"뭐어?! 뭘 해?"

"준성이형은 내가 좀 설득해 볼게! 어?! 제발."

"아니, 너 당분간 쉬신다며요. 그 얘기 한지 3분도 안 됐어!"

 

 

 

지윤의 황당한 소리에 매니저는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제발 형~~. 내가 언제 이렇게 부탁한 적 있어?! 어? 아 한번만~~~"

"아니 저게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

"아~~~ 제발 형~~~~~~~~~"

 

 

 

지윤은 매니저를 끌어안으며 갖은 애교를 부리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 일단 여기서 나가자. 사람들이 봐~ 윤아!!"

"아~~~ 형이 해결해 준다고 해줄 때까지 이럴거야~~~"

 

 

 

매니저는 누가 볼까 무서워 지윤을 어디론가 질질 끌었다. 와중에 기운은 또 얼마나 좋은지 긴 몸뚱이가 착 달라붙어있다.

 

 

 

 

 

"아~~ 형~~ 제발~~ 나 저거 할래~~~~"

 

 

 

 

 

지윤의 목소리가 저 멀리 들리던 때, 카페 안 주은의 테이블은 광고에 관련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시끌한 목소리에 주변을 슬쩍 둘러본 그녀는 다시 이야기에 집중한다.

 

 

무용실 담벼락을 찾던 그날처럼,

미래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란걸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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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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