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티나의 악녀 (2)

002. 난 인간이 아닌걸.

늑대가 베일 것 같이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도록 잘 숨겨놓은 증오심과 역겨움이 슬쩍 내비쳐 보이기까지 했다.

"저런, 내 선심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네."

싫음 말라는 듯 이레시아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려줄 생각도 딱히 없었지만, 그가 날이 선 표정을 지을 때마다 저열한 희열이 드는 건 자신의 성격이 나빠서 일까?

저 성격 나쁜 남자의 목에 목줄을 걸고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게 썩 나쁘진 않지. 나 역시도 저 남자에게 목줄이 걸려 있기는 하지만...

이레시아가 일순간 얼어붙은 공기에 가만히 눈치를 살피는 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좋겠네 아가. 거기는 네가 좋아하는 게 잔뜩 있을 텐데."

쥰이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파의 도시는 반짝이는 보석이 많은 도시거든."

좋아하잖아? 반짝이는 돌멩이나 보석 같은 거.

그녀의 말에 쥰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단순하기는. 그래도 그 얼굴이 귀여워서 그녀는 쥰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하나 사줄까?"

"버릇 나빠져."

늑대가 쥰의 말을 가로챘다.

"뭐 어때.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귀여운 얼굴로 나를 기쁘게 해주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금액이 얼마가 되든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의뢰 완수비로 들어오는 돈이 적지도 않을뿐더러, 그녀의 원래 신분은 오버(Over)의 피에타 백작 부인이었다. 그동안 귀찮아서 정리하지 않은 아공간 안의 희귀한 물건을 내다 팔기만 하더라도 그 정도 쯤이야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 차고 넘치는 돈으로 반복되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이레시아는 화장대 앞에서 일어나 샤워 가운을 풀어냈다.

헉!

시녀 인형이 재빠르게 쥰의 눈을 가렸다.

하얀 나신을 반쯤 드러낸 여자를 보고 일순 늑대의 눈매가 움찔 떨렸다. 이레시아가 고개를 슬며시 기울이며 그를 돌아봤다.

"왜 그래?"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늑대가 인상을 찌푸리며 반쯤 벗어낸 샤워가운을 다시 끌어올렸다.

"아무 때나 그렇게 벗어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머리카락 때문에 축축해졌어."

"아무리 옷이 축축해져도 보통 사람들은 아무 데서나 안 그래."

늑대가 샤워 가운의 매듭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그녀가 불만스러운 눈매로 그를 올려다봤다.

"난 인간이 아닌걸."

"네가 뭐든 간에. 적어도 여기서는 안 돼."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네. 마음대로 벗지도 못해, 아무나 붙잡고 잠자리를 하지도 못해, 배불리 생기를 먹지도 못해.

이레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들은 피곤하네."

"버젓이 있는 드레스룸은 장식인가?"

"자기가 갈아입혀 줘."

투정 어린 말투에 늑대의 눈이 또 한 번 싸늘하게 식었다.

"인형들은 손이 차가워서 싫단 말이야."

정말 싫다는 듯 이레시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흙으로 빗어서 마력으로 움직이는 인형들은 말을 걸어도 반응 없고, 손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그리고 그녀는 차가운 것이 싫었다.

덕분에 그녀는 줄곧 목욕도 시중 없이 혼자 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러니 당신이 상대해줘."

이곳 플라티나에서도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손을 대는 건 쥰과 늑대, 단 둘 뿐이었다.

다들 그녀를 동물원 사자 보듯이 힐끔힐끔 쳐다만 볼 뿐이였으니까.

뭐 그건 그녀에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늑대가 으르렁 거린 것도 크게 한몫했지만.

"어때? 당신 정도면 나도 썩 나쁘지 않..."

"그만."

단단히 묶인 매듭을 풀려는 손을 늑대가 붙잡았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기는 게 아닌가 싶은 눈빛이 번뜩였다.

홱!

그녀의 손이 거칠게 끌려갔다. 성큼. 숨결이 닿을 만큼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적어도 애 앞에서는..."

평범한 인간인 척 굴어.

씹어삼키듯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뒷골에 작게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그녀가 아니였다. 속삭일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늑대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해주면 되잖아?"

늑대는 이제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까맣게 타버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쥰,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와."

늑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인형들이 쥰을 안아 들고 후다닥 침실을 나갔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떼어냈다.

"똑바로 서."

제 손으로 숨겼던 그녀의 나신이 그의 손길에 다시 드러났다. 보는 순간 욕망에 집어삼켜질 것 같이 야한 몸을 가리고 있던 가운이 툭하고 발치로 떨어졌다.

+++++

이레시아는 삐딱하게 다리를 꼰 채 붉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늑대를 내려다봤다. 까딱거리고 있는 하얀 발등 위로 주홍색 낙인이 드러났다.

늑대가 새긴 족쇄의 주술진이였다. 그 위로 얇은 가터벨트 스타킹이 씌워졌다.

"뭐야. 재미없게..."

그녀는 어딘가 지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그가 자제력을 잃고 달려들면 기꺼이 받아줄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참는다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애써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이럴 때마다 은근히 자존심이 짓밟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당신, 2년이나 봤다고 벌써 내 몸이 질려버린 건 아니지?"

"네 장난질에는 질린 지 오래지."

"내 몸에는 아직 질리지 않았다는 말로 봐도 되는 건가 그거?"

이레시아의 말에 늑대는 묵묵부답으로 답했다.

"너무하네. 나랑 이야기 하기 싫어?"

나랑 놀아주는 사람은 당신과 쥰, 둘뿐인데 말이지.

이레시아가 깊게 파이프 담배를 빨아들이며 덧붙였다. 늑대는 더는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는지 그저 옷 입히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그래. 장단 맞춰 놀아주길 바라는 내가 바보지."

그녀는 어딘가 짓궂어진 마음으로 독한 담배 연기를 그에게 내뱉었다. 그러나 늑대는 이번에도 눈살을 조금 찌푸릴 뿐 반응하지 않았다. 목석같은 남자 같으니라고. 이레시아는 김샜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 살결과 천이 마찰하는 소리만 흘렀다. 한참을 말이 없던 이레시아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녀의 물음에도 늑대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레시아는 그걸 허락으로 읽은 듯했다.

"아직도 나한테서... 당신 원수와 똑같은 냄새가 나?"

"어."

혹시나 하고 물은 질문에 칼처럼 질문이 날아왔다.

허어.

미쳐 내뱉지 못한 연기가 어이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얼굴도 못 적 없다면서."

그러자 움찔하고 늑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녀의 허벅지 위로 스타킹을 끌어올린 늑대가 고개를 들었다. 깊은 곳에 억눌린 뭔가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와 그녀를 짓눌러버릴 것 같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마주쳤다.

그것이 마치 두 손으로 목을 조르는 것 같이 느껴져 파이프 담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단내."

그래. 처음 봤을 때부터 그 단내가 똑같이 난다고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바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가끔 너한테..."

가까이 다가온 늑대가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여 어깨 근처로 다가갔다. 그가 숨을 깊게 들이쉬는 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의 체취를 온통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여자한테서 났던 단내랑 똑같은 향이 나."

"... 서큐버스들은 기본적으로 좋은 향을 뿜어내니까."

"하, 내가 그 냄새도 구별 못하고 너를 잡아다 놨을까."

늑대가 어깨 너머로 조소를 내뱉었다. 커다란 뱀 따위가 온몸을 휘감는 기분에 그녀는 오싹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도록 숨통을 옭아맨 기분에 손끝이 콕콕 저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의 눈동자에 물감처럼 번져있는 금빛처럼, 그 역시 겁도 없이 그녀의 속을 침범하여 번지는 듯했다.

과연 잡아먹히는 건 나일까, 너일까?

엎치락 뒤치락하며 번지는 물감이 둘의 시선 사이로 번져나갔다. 쭈뼛거리며 퍼지는 소름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딘가 숨이 턱 막히도록 마음에 들 정도였다. 스스로도 이해 못 할 감정이었다. 참으로 기민한 남자였다.

"... 심히 유감이야. 내가... 당신이 미치다 싶이 찾는 그 여자가 아니여서."

퍽이나.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서나. 이레시아는 눈앞의 기민한 남자를 향해 가느스름하게 웃었다.

"글쎄.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

그 말을 끝으로 늑대는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다시 멀어진 거리에 이레시아가 피식 웃으며 파이프 담배를 도로 입에 물었다. 서로의 속내를 떠보는 건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당신, 티파의 도시에 가본 적은?"

"없어."

"왜? 당신이 살던 영토와 같은 시간대가 흐르는 도시잖아."

"랑족의 장로들은 멀쩡히 있는 산을 파헤치는 인간들을 이해 못하니까. 관심도 없고."

그래. 이 금욕적인 사내는 원래 드넓은 초원에 살던 부족이었으니.

"자연 문명 파?"

"그걸 굳이 나눠야 할 이유가 있나?"

"도태된 건 사라지는 거고, 불편한 건 바꾸고, 편리한 건 더 빠르게. 그게 도시 문명의 이점 아니겠어?"

"살아온 세상이 너무 다르군."

"당신은 어떤 세상을 살았길래?"

초원에서 해맑게 뛰노는 모습이랑은 어딘가 거리가 멀어보이는 데.

"느리다고 틀린 게 아니고, 조금 불편하다고 해도 그로 인해 지켜낼 게 있다면 감내할 뿐인 거지."

"노파 같네?"

그녀가 조금은 짓궂은 감상을 내비쳤다.

"노파는 네가 아니고?"

"이렇게 생긴 노파를 본 적 있나 봐?"

물론 없었다.

늑대는 다리를 꼬고 앉은 이레시아를 다시 돌아봤다.

온몸을 꽁꽁 쌔매놔도 야하게 생겨 먹은 여자는 고작 얇은 슬립과 가터벨트 차림으로 그를 향해 웃음 짓고 있었다.

어떻게 섞여도 '라미아'와 '서큐버스'란 말인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흑발과 붉은 눈, 그로 인해 대비되어 보이는 하얀 피부까지. 노파랑은 거리가 아주 멀기도 먼 여자였다.

아니, 오히려 왼쪽 눈 밑에 야하게 찍힌 눈물점 두 개가 그녀의 나이를 더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자신보다 어린 것도 같이 보이고, 가끔은 훨씬 연상의 여자처럼 보이게도 했다. 늑대는 자꾸만 제 자제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여자에게서 눈을 돌렸다.

"티파의 도시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진귀한 보석과 미인들이 많다는 건 알지."

꿀이 흐르는 곳에 벌들이 모여들 듯이, 티파의 도시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온갖 아티펙트와 성물을 쌓아두다 싶이 하니, 영주가 가진 재산이 왕가를 넘어선 수준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던가?

"요 몇 달, 원인 모를 실종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한 모양이야. 해서 영주가 광산을 조사해보려고 용병을 파병했는데..."

"그들도 실종 됐다는 건가?"

늑대의 질문에 이레시아는 화장대 위 의뢰서를 향해 턱짓했다. 그는 아무렇게나 놓인 의뢰서를 집어 들었다.

"몸뚱이는 돌아오긴 했지."

돌로 변한 몸뚱이를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지.

늑대의 뒤로 그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기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맞춰볼까?"

위험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시야를 찔렀다.

"광산. 동굴. 돌로 변한 용병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이야기 주인공이 떠올랐다.

"메두사."

늑대의 속마음이 이레시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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