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16)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무너져 내린 것은 물론 지성이 아닌 복면남 둘이었다. 심지어 지성은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지고, 바닥에 구르는 두 사내의 가슴 위로 발을 얹었다. 그의 도포 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보아라. 너희 주인은 이렇게 실속 없는 너희들을 부리니 참으로 가엾게 되었다. 일개 서생인 내게도 당해내질 못하는구나.”

쯧쯧. 혀를 차는 지성의 모습에 복면남의 얼굴이 옅은 등불 빛 속에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붉어졌다.

“말해라. 납치한 기생들은 어디에 있느냐?”

“무, 무릉 전당포에…….”

지성은 복면남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을 기절시켰다. 어디선가 밧줄을 구해온 그는 그들의 손목과 발목을 결박해 기둥에 묶고 연화에게로 다가갔다.

“낭자, 괜찮으십니까?”

“감사합니다, 선비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연화의 눈동자는 그러나,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연신 입술을 깨물던 그는 힐끗 복면남들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한데 저들은 그냥 저리 두어도 될까요?”

지성이 한발 다가섰다.

“설기 낭자와 애심 낭자를 찾는 것이 시급한 일이니까요. 두 사람을 찾은 후에는 저들을 관아에 넘길 생각입니다. 연화 낭자는 우선 홍화정으로 돌아가 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화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잣거리의 불빛이 뒷골목까지 닿았다. 연화의 얼굴이 창백했다. 안색을 살피던 지성이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연화의 몸이 휘청거렸다. 지성이 가까스로 연화를 부축하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성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자 연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놀라 그런 모양입니다. 저는 이곳에 잠시 쉬었다 돌아갈 테니 선비님은 무릉 전당포로 가세요.”

“제가 어찌 낭자를 이곳에 두고 가겠습니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마음이 편치 않아 볼 것도 못 보고 들을 것도 못 들을 것입니다. 제게 기대십시오.”

“하지만…….”

“홍화정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단호한 지성의 말에 연화는 더 말하지 않고 지성의 팔을 붙들었다. 연화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가는 듯하자 지성이 물었다.

“낭자. 외람된 말이지만 어찌 이곳에 와 계셨습니까?”

연화는 낮에 소소를 보내고 난 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차례의 소란이 지나고 연화는 설기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보름 동안 주인이 없던 방은 쓸쓸했다. 설기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왠지 황량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날 밤, 설기의 방은 단정하지 않았다. 평소 오래 외출을 하면 방을 잘 치워두던 설기였기에, 연화는 확신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고. 설기가 없어진 것을 알아챈 바로 그 날, 무슨 단서가 남아있을까 하여 방을 정리하며 샅샅이 뒤졌으나, 딱히 특별한 물건이나 서신 같은 것은 없었다.

“설기야, 너 도대체 어디에 있어…….”

방을 둘러보던 연화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 설기의 면경대가 들어왔다.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 설기는 이 자리에 앉아 제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자문자답을 하곤 했었다.

“생각해보면 참…….”

엉뚱한 구석이 있다니까. 쓰게 웃던 연화는 그러다 문득, 이질감을 느끼고는 미간을 좁혔다. 면경대의 서랍이 열려있던 탓이다.

“이게 왜……?”

연화는 조심스레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에는…….

“그 서랍 안에 들어있던 것이 이 종이입니까?”

지성은 연화가 내민 작은 서신을 펼쳤다. 그곳에는‘애심을 구하고 싶거든 홀로 무릉 전당포로 와라.’라고 다소 거친 글씨로 적혀있었다.

“서랍이 어찌 열려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설기는 아마 이 쪽지를 보고 그 밤에 전당포로 갔다가 납치를 당한 것 같습니다.”

‘아니야. 언뜻 보기엔 설기가 보고 놓고 간 것 같지만 보통 이런 서신을 발견하면 놀라서 손에 들고 가거나 탁상 위에 올려놓지, 다시 서랍 안에 넣어두진 않아. 이건 설기 낭자가 아니라 연화 낭자가 보라고 일부러 남겨둔 거야. 청소를 하면서 분명 탁상 위도 치웠을 텐데 서랍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으니. 하면 설기를 납치한 후에 홍화정에 누군가 침입했던 건가? 아니면 내부인의 소행인가?’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홍화정이었다.

“선비님, 이제 다 왔습니다.”

“안까지 부축해주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조금 정신이 듭니다.”

지성은 연화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보단 혈색이 도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면 들어가십시오. 전 무릉 전당포로 가보겠습니다.”

미소 짓는 지성의 모습에 연화는 말없이 홍화정으로 들어갔다. 지성은 연화가 경황이 없어 인사할 정신이 없는가 보다 생각했으나, 연화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성이 속히 무릉 전당포로 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음란 서생.”

려운이었다.
홍화정의 음란 서생이라……. 홍화정 앞 길목을 지나던 이들의 발걸음이 멈추고 그 시선이 단숨에 지성에게로 쏠렸다. 지성은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려운에게로 다가섰다.

“마침 잘 만났습니다. 려운, 도와주십시오.”

평소였다면 화를 내든 자신을 비꼬든 했을 지성이 “음란 서생”이란 단어에는 반응이 없자 려운은 뒤로 물러났다.

“뭐냐?”

“자세한 것은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려운은 내가 널 왜 돕느냐고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고 했으나 지성은 다짜고짜 려운의 손목을 붙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 자란 후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붙잡혀본 일이 없는 려운은, 무어라 말이라도 해보려 했으나 당황한 나머지 입만 벙긋거리다 속절없이 지성의 손에 끌려갔다.

“저거 윤 도령 아냐?”

“옆에 있는 저 인상 사나운 선비는 누구지?”

“글쎄, 화방에 드나드는 것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하고…….”

행인들이 주고받는 말속에서 려운의 정체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게 참말이냐?”

식사하는 동안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자랑질에 질려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류는 덕구가 갑자기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덕구의 눈이 꿀떡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렸다. 왠지 불길한 기분에 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잘 먹었네. 나는 그럼 이만…….”

“류 공자님, 제 말을 듣지 않으시면 아마 후회하실 겁니다.”

눈썹을 씰룩이며 제 턱수염을 매만지는 그의 모습에 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해보게. 무슨 일인가?”

“제 하인이 방금 우연히 홍화정 앞을 지나다 기이한 장면을 봤답니다.”

“홍화정?”

“글쎄 윤 도령이 홍화정 앞에서…….”

윤 도령? 류가 자신을 바라보자 덕구는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속삭였다.

“어떤 선비의 손목을 붙들고 갔다지 뭡니까!”

그의 말에 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으나 눈치 없는 덕구는 더욱 신이 나 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한데 그 사내가…….”

“누구인데?”

“누구일 것 같습니까?”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하게!”

“바로 좌상 댁 아드님이랍니다.”

류가 의아한 듯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시종이 본 선비가 좌상 대감의 아들이 틀림없는가?”

“예. 이전에 좌상 댁에서 저희 비단을 사신 적이 있는데, 그때 물건을 가지고 갔던 놈이 우연히 봤었답니다. 기억력이 좋은 녀석의 말이라 확실할 겁니다.”

덕구는 마치 자신이 그 시종이라도 된 양 으스댔다. 류는 점점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려운이 손목을 붙잡혀?”

 

“그러니까, 무릉 전당포에 애심이랑 설기라는 기생 둘이 갇혀있단 거냐?”

“예. 아마 그곳에 밀실이 있을 겁니다.”

“근데 이 손 좀 놓고 가지?”

려운의 말에 지성은 화들짝 놀라 붙들었던 려운의 손목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그건 됐고, 증거는?”

“물증은 없습니다. 연화 낭자를 납치하려던 놈들은 기절시켜서 묶어두었고요.”

두 사람은 빙 돌아가는 대신 골목 사이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러면서 지금 무작정 전당포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밀실을 직접 찾겠다는 말이냐?”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면 관군을 부르지 제가 직접 왔겠습니까?”

“그래, 네 말대로 밀실이 있다 치자. 그렇다고 그곳에 기생 둘을 가둬놓았으리라고는 어찌 아느냐?”

전당포가 코앞인데 자꾸만 따져 묻는 려운의 모습에 지성은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어쨌든 지금은 려운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던가.

“글쎄요. 직감이라고 해두죠.”

려운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으나 지성의 기세가 어쩐지 매서워 답지 않게 입을 다물었다. 전당포의 분위기를 살피던 지성은 갓을 눌러쓰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선비님, 이제 곧 문 닫을 시간, 인데…….”

말투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던 주인장이 말끝을 흐리자 지성이 제 뒤를 따라오던 이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난 것인지 그는 검고 너른 삿갓을 쓰고 있었다. 지성은 황당한 마음에 려운에게 다가가 속닥거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저 주인장, 나와 면식이 있는 자다. 내가 무예를 하는 것도 알고 이런 전당포에 오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알고 있어. 날 알아보면 귀찮아질 것이다.”

“혹시……,”

이러는 것이 더 수상해 보인다고 말하려는 찰나, 말을 걸어오는 주인장의 음성에 지성은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았다.

“풍운 화방의 윤 도령 아니십니까?”

“절 아십니까?”

“한성에서 선비님을 모르는 사람도 있답니까? 한데 저희 점포엔 무슨 일이신지요.”

지성은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떠있음을 알아채고는 싱긋 웃었다. 그는 화방의 윤 도령이 가진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지라 돌아서는 척하며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문 닫을 시간인지 몰랐네요. 하면 나중에 다시…….”

“아유, 아닙니다, 아닙니다. 기왕지사 이렇게 오셨는데, 둘러보고 가십시오.”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요. 화방의 윤 도령이 다녀갔다고 소문이 나면 아마 손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겁니다.”

“듣기로는 이곳에서 따로 골동품을 사들여 팔기도 한다던데 맞습니까?”

“아주 잘 오셨네요. 맞습니다. 고송古松의 도자기, 장인이 만든 칼, 명인이 그린 서화, 무릉도원의 복숭아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금, 옥으로 만든 피리, 정晸에서 들여온 다기, 뭐 없는 것 빼고 다 있지요.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가게에 사람을 둘이나 감금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태연할 수 있나?’

두 손을 맞잡고 굽신거리는 주인장을 보던 지성은 무언가 떠올린 듯하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고 제 귀를 매만지며 감정을 채 숨기지 못하는 서생처럼 미소를 지었다. 려운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얼굴을 구겼으나 갓을 쓰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게, 연화 낭자에게 선물을 좀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의 말에 주인장은 눈앞의 수줍음 많은 선비를 은근하게 놀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졸졸 따라다니며 이 물건은 어떠하여 좋고 저 물건은 어떠하여 괜찮다며 과한 친절을 베푸는 주인장의 태도에 지성은 당장 그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겠다 싶어 려운을 향해 말했다.

“형님, 저는 주인장과 함께 물건을 고를 테니 형님은 형수님께 드릴 선물을 고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분이 윤 도령의 형님이십니까?”

“제 사촌 형님입니다.”

주인장이 그렇군요, 하자 려운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만약 삿갓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수상쩍게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성은 뒷짐을 지고는 려운을 향해 손짓했다. 그의 신호를 알아챈 려운이 느릿느릿 걸으며 물건을 구경하는 척 바닥이나 벽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인장은 삿갓을 쓴 음침한 사내보단 한성의 유명인사인 윤 도령에게 좀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일각쯤 지났을까, 려운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물건들을 들었다 놓았다.

“이쪽엔 원하는 물건은 없는 것 같군.”

려운의 말에 지성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쪽엔 밀실이 없나 보네.’

지성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주인장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려운에게로 다가갔다.

“선비님. 혹시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글쎄, 딱히 찾는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이곳의 물건이 성에 차질 않는군.”

굳이 시비를 거는 그의 목소리에 지성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데 그가 은밀히 손으로 그림이 걸린 벽을 가리켰다. 지성이 아까부터 신경이 쓰여 힐끗힐끗 쳐다봤던 벽이었다. 길게 위아래로 뻗은 그림이 절묘하게 가리고 있어 얼핏 보기엔 그저 평범하게 널판을 덧댄 벽처럼 보이지만 나무의 결과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쪼개진 듯한 틈이 있었다.

‘려운도 저 벽이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려운이 전당포 주인장을 붙들어두고 있는 사이, 지성은 살금살금 벽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혹시 숨겨진 장치 같은 것이 있나 하여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물건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벽을 밀어도 보고 살짝 벌어진 틈을 열어보려고도 했으나 벽은 단단하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생각한 건가? 정말 이곳에 밀실이 없으면 어떡하지?’

지성이 초조하여 제 입술을 깨물며 려운을 바라보는데 그가 손가락을 위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주인장이 버럭 소리쳤다.

“아까부터 사람을 앞에 두고 뭘 하는 겁니까! 아니, 윤 도령은 또 거기서 뭘 하시는 거고요!”

‘아뿔싸!’

지성이 그대로 얼어붙자 려운이 주인장을 넘어뜨려 양손으로 결박하고는 외쳤다.

“그걸 밀어!”

그의 외침에 지성이 벽에 걸린 그림을 옆으로 밀자 드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쇠 막대가 움직이는 소리, 육중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눈앞의 두꺼운 벽이 움직이며 밀실이 드러났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암실, 그 안에 누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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