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춘풍 도령 (17)
암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성이 벽 등에 불을 밝히자 비로소 두 사람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설기와 애심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손과 발이 묶여있었다. 소반 위에는 물 주전자와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음식들이 조금 남아있고, 특이한 점이 있다면 벽에 걸린 향로였다. 지성은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기운 없이 처져있던 설기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낭자. 연화 낭자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설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지성은 우선 설기의 입에 물려있던 재갈을 빼내고 손발을 결박하던 밧줄을 풀어냈다. 그는 이어서 애심을 풀어주었다.
‘이 낭자의 손목은…….’
지성이 조금 이상함을 느끼고 손을 멈칫하는데 애심이 그의 목을 껴안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선비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선비님은 저희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낭자, 저기, 우선 좀 놓고…….”
“이름값은 하는군. 음란 서생. 기생을 구하자마자 품에 안는 거냐?”
려운의 말에 애심의 볼이 붉어져 민망한 듯 물러나자 지성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전당포 주인장이 쭈뼛쭈뼛 암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암실 안을 둘러보자 려운이 허리에 찬 검을 쥐고 그의 목에 가져갔다. 주인장의 얼굴이 퍼렇게 질리더니 그가 덜덜 떨며 물었다.
“저, 저저저저기, 이, 이 카, 칼은 좀 치워주시면……,”
“한성 저잣거리 한복판에 있는 점포에서 기생 둘을 납치해 감금해두다니, 간이 부었군.”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전 모르는 일입니다!”
“시치미 떼지 마라. 자기 가게에 이리 공을 들여 은밀히 밀실을 만들어 그 안에 감금까지 해놓고, 모르는 일이다?”
“믿어주십시오, 전 정말 몰랐습니다! 가게에 이런 밀실이 있는 줄도 방금 알았단 말입니다!”
주인장이 억울하다는 듯이 려운을 향해 소리치자 려운이 금방이라도 칼날을 뽑을 듯이 그의 목 가까이 검을 들이밀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주인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전당포 안으로 여러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밖을 한 무리가 에워쌌다. 밀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포도청 종사관이었다.
“이 자를 끌고 가라.”
나리, 억울합니다, 나리! 포졸 두 명이 주인장을 끌고 가자 지성의 눈동자에 의문스러운 빛이 서렸다. 게다가…….
“저자들은?”
분명 기절시켜서 기둥에 묶어두었는데? 지성의 혼잣말에 려운은 날카롭게 이야기했다.
“포청에서 여긴 어찌 알고 왔지? 아직 신고도 하기 전인데.”
려운의 말에 종사관은 그의 검을 보고는 예를 갖추며 살갑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어색하고 간사한지 지성은 소름이 돋아 흠칫 몸을 떨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잡아들이는 것이 저희의 일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종사관의 모습에 려운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으나 삿갓에 가려진지라 다행스럽게도 가련한 두 낭자는 그 험악함을 보지는 못했다. 지성은 일어나 벽에 걸린 향로를 열었다. 과연, 미향이 들어있어 오래도록 갇혀있는데도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데 왜, 현장 조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갔을까요? 증거도, 피해자도 전부 여기에 있는데요. 게다가…….”
이번 일은 이상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전에는 기생의 실종 따위 안중에도 없다가 아직 신고도 하지 않은 밀실을 찾아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친 포졸들. 밀실에 있던 기생 둘을 제외한 세 명 중에 주인장 단 한 명만을 정확히 데려간 종사관과 려운을 대하는 그의 태도. 자신의 가게에 설치된 밀실을 보던 주인장의 시선. 그리고 너무나 상반된 설기와 애심의 손목에 남은 흔적…….
“선비님, 너무 어지럽습니다.”
애심이 일어나 어지러운 체하며 지성에게 기대자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다 애심을 부축했다. 그러다 문득 설기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설기도 애심처럼 기운이 없는 상태인데, 남은 이는 이제 삿갓을 눌러쓴 분위기가 사포처럼 거친 선비이니. 설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설기 낭자, 걱정하지 말고 려운에게 기대십시오.”
한 마디 동의도 없이 내뱉는 말에 려운의 고개가 지성의 쪽으로 움직였다.
“설마 저더러 두 낭자를 모두 홍화정으로 데려가란 말씀은 아니시죠? 기왕에 도와주시는 김에 좀만 더 선심을 베풀어주십시오.”
“내가 왜?”
“아, 형니—임—.”
말끝을 늘이며 저를 형님이라 부르는 목소리에 려운은 한껏 미간을 구겼다.
“얼굴 펴시고요, 그 사나워 보이는 삿갓은 벗으십시오. 이제 주인도 없는데 그러고 계시니 두 분이 무서워하잖습니까.”
려운이 설기 쪽으로 시선을 두자 설기의 고개가 푹 숙어지며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삿갓을 벗어 손에 들고 반대쪽 손을 가련히 떨고 있는 이에게 내밀었다. 투박하고 굵직한 손이 제 눈 아래 오자 설기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준수한 려운의 얼굴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에 계속 살 참이냐?”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설기는 황급히 려운의 소매를 붙들었다.
불이 환하게 켜진 화방 거리. 홍화정까지 두 사람을 데려다준 지성과 려운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서로 딱히 별 할 말도 없고 이야깃거리도 없는지라,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일각을 걸어오며 멀찍이 떨어져 마치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류는 아직 안 왔나?”
다른 곳과는 달리 여섯 칸의 화방이 모두 어두컴컴했다. 묘한 분위기에 지성은, 가뜩이나 피곤한데 지긋지긋하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는 화방 문 앞 항아리 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투박하게 생긴 몽둥이였다. 려운이 그게 왜 거기서 나오냐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답했다.
“려운은 모르겠지만, 사람은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다 보면 대비를 하기 마련입니다.”
지성은 숨을 고르고 벽에 기대어 화방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수 초가 지나도 안에 인기척이 없자 지성 조심스레 화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때, 어둠 속에서 정확히 무언가 날아들었다. 지성이 재빠르게 몽둥이로 쳐내자 물건이 쨍강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찻잔인 모양이었다. 려운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이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지성이 경계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누구냐.”
“나, 나다, 지성아.”
“스승님?”
귀에 익고 반가운 목소리에 지성은 서둘러 불을 밝혔다. 웃으며 탁자에 앉아있는 이는 최명선. 지성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스승님이었다. 그가 안부라도 물으려 하는데 려운은 다가서는 지성을 팔로 막고는 날을 세웠다.
“뭐 하는 겁니까?”
“려운이야말로 뭐 하시는 겁니까? 칼 내리십시오!”
“어둠 속에 기척을 숨기고 사람을 향해 찻잔을 던지다니, 드디어 노망이라도 나셨습니까?”
“려운!”
지성이 잔뜩 화가 나서 려운을 노려보며 그의 팔을 붙잡아 내리자 려운은 일단 칼을 집어넣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명선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내 생각보단 둘이 사이가 좋은 모양이구나. 려운이 이리 화를 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성은 명선의 말에 표정을 풀고는 손을 씻고 와 제 스승의 옆에 붙어 앉았다. 살갑게 차를 따라주는 지성과 익숙해 보이는 듯한 스승. 마치 아주 친한 부자 사이에 끼어있는 것만 같은 이런 분위기가 무뚝뚝한 려운으로서는 영 어색했다.
“한 해 만인가?”
“두 해 만입니다, 두 해! 매번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으시고 달랑 서신만 보내시니, 저는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어째 못 본 사이에 어리광만 더 늘었구나.”
저 어린애 아닙니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지성의 말에 스승은 오냐, 하며 웃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벌컥 화방 문이 열리고, 류가 돌아왔다. 류는 명선을 보고 입을 벌리다 그 옆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려운을 보고는 마저 입을 벌려 외쳤다.
“려운, 자네가 웬일로 양반 같은 꼴을 하고 있는 건가!”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흥분하여 말하는 류의 목소리에 화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려운이 상투에 갓, 두루마기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성은 신기한 물건을 보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류 이 녀석, 오랜만에 스승님을 보고 그런 반응은 다 무어냐?”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스승님.”
뒤늦게 가볍게 절을 하는 류를 본 명선은 그만하라는 듯 손을 휘적였다.
“됐다, 됐어. 엎드려 절 받기지. 한데 정말 오랜만이구나. 네가 이리 옷을 갖춰 입은 것은. 혹시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갖춰 입은 것이냐?”
확실히 려운이 이런 차림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 스승마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려운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참, 오 가의 말로는 려운이 자네에게 손목을 잡혔다던데?”
그의 말에 명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지성을 바라보았다. 지성이 그게, 하며 입을 열자 두 사람은 마치 이야기 극이라도 듣는 청중처럼 앉아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는 물론, 자객으로부터 연화를 구한 일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류는, 두 낭자에게, 그리고 지성에게 아무 일도 없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줄곧 할 말이 생각난 듯이 입을 달싹이던 명선의 얼굴에는 순간 장난기가 피어올랐다.
“한데 말이다. 화방의 윤 도령이 꽤 유명인사이더구나. 춘풍 도령, 꽃 도령, 두루미 도령, 학 도령……, 또 하나가 더 있던 듯한데, 뭐였더라?”
저잣거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짓궂게 웃는 명선의 모습에 지성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말해 봐라. 너처럼 점잖고 고지식한 사람이 어쩌다 음란 서생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냐?”
스승님! 지성이 이제 울 듯 말 듯한 표정을 하고 명선을 바라보았다. 류는 헛기침을 하며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꾹 누르고는 제 스승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스승님도 후배님도 모두 고단하실 테니, 일찍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았다, 알았어.”
녀석, 제 후배 괴롭힌다고 스승에게 눈치를 주느냐? 명선의 말에 서로 마주 본 두 제자의 입매가 둥글게 휘었다.
*
홍화정 쪽문이 열리고 소소의 부축을 받고 들어온 설기가 마루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두 사람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기생과 노비들이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설기와 애심의 곁으로 모두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설기의 얼굴을 본 소소는 차마 그 무엇도 묻지 못했다. 창백한 안색과 거친 피부가 그간의 고생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소소가 설기에게 물을 따라 건네자 그는 잔을 두 손으로 겨우 붙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그나마 애심이가 같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언년이 조심스레 애심을 향해 묻자, 그가 돌연 눈물을 글썽였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심의 여린 모습에 홍화정 식구들의 안타까운 침묵이 흘렀다.
“그날 밤에, 평생 구경도 해볼까 말까 한 비단에, 옥가락지에, 진주에, 으리으리한 가마……, 난 당연히 높으신 분이라고만 생각했어. 적어도 조정에 한자리 꿰차고 있는 양반이라고 생각해서, 한 치 의심도 없이 따라나섰는데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날 기절시키더니 암실로 데려갔어.”
자신의 처소에 있던 연화가 두 사람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인지 버선발로 달려왔다. 설기는 그의 얼굴을 보자 설움이 북받쳐 오르는 듯 금세 눈시울을 적시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언니…….”
결국,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설기를, 연화는 말없이 안아주었다. 애심은 그런 두 사람을 흘끗 보더니 소리 내 울며 말을 이어갔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곳에서, 그자는 내 손발을 묶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어. 며칠 후엔 설기가 납치되어 그곳에 왔고.”
“어떤 사내가, 우리더러,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다고 그래서…….”
“오늘 아침에 오더니 사흘 후에 우릴 데려가겠다고 했어. 아마 선비님이 오지 않았더라면 우린 죽었을지도 몰라. 보름 동안 갇혀있으면서 너무 무서웠어.”
기어코 애심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처연한 그의 모습에 식구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애심이가 낭랑한 척해도, 실은 겁이 많은가 보구나. 애심을 위로하는 이들 사이, 단 한 명, 자신의 품에서 히끅히끅 서럽게 우는 설기의 등을 토닥이던 연화만이 그의 말에 기시감을 느꼈다. 우는 애심을 보는 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암실에 오래도록 갇혀있으면서, 아침인지는 어떻게 알았지? 저녁일 수도 있지 않나? 게다가 보름이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아는 것은 둘째치고, 그걸 알고 있다면 보름이 아니라 그 이상이어야 할 텐데. 애심이 사라졌던 것은 설기보다 훨씬 전이잖아.’
연화는 무사히 돌아온 애심을 의심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의 말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므로 심중에 자리한 불신을 본인의 기우일 것이라고, 소중한 벗을 위하여 묻지 말자고 속으로 꾹 눌러 담았으나, 불씨는 언제든 바람이 불면 쉽게 타오르는 법. 아무리 다독여도 불안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그의 눈동자 속의 빛으로 변해 들어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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