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의 너_ 5
약속
체육 도구를 다 옮긴 후 창고에서 나온 너는 정돈되지 않은 긴 머리를 날리며 달려왔다. 얼마나 빨리 뛴 건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벌써 복도에서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가 반으로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
4층이나 되는 높이를 뛰어와서 힘들었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아니야 별로 안 기다렸어."
너는 내 말을 듣고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거기서 뭐해?"
"너 보고 있었어. 무리하던데 그러지 마 다쳐."
"빨리 말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랬어."
"뭔데?"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에 난 네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있잖아. 바다보러 갈래?"
정말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 돌아왔다. 분명 자신이 바다를 가자고 한다면 나는 꼭 가겠다고 할걸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바다는 거절하지 않는 거 알면서 왜 고민을 한 거야?"
"그치, 너라면 무조건 가겠지."
역시 이게 말하려던 게 아닌 것 같다. 다른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안 하는 거지.
"당연하지. 언제 갈래?"
"이번 주말 시간 돼?"
바쁜 일도 없고 주말 2일을 활용해서 여유롭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될 것 같아."
"그럼 그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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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번 수행평가는 두 명이서 진행한다. 주말 내로 끝내오도록."
말도 안 돼. 오늘은 금요일이다. 주말까지 끝내라는 건 무조건 주말을 사용해서 하라는 말인데, 이번 주말엔 다연이랑 약속이 있기에 너무나도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다들 집중. 팀 짠다."
주말에 약속이나 할 일이 있던 다른 학생들도 선생님의 말에 황당해했다. 그래도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아. 다연이랑 같은 팀이 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제발, 제발….
"12번, 14번."
안돼! 또 송규현이라니, 어떡하지. 오늘 내로는 못 끝낼 것 같은데. 약속을 다음 주로 미뤄야 하나. 곧이어 당연하게도 다른 애와 다연의 이름이 동시에 불렸다. 다연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떡하냐는 표정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았다.
수행평가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곧바로 종이 쳤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다급하게 뛰어갔다.
"아니 한국사쌤은 무슨 수행평가를 지금 내? 주말을 쓰라니."
불만이 가득 섞인 다연의 말투였다.
"어떡하지? 약속을 다음 주로 미뤄야 할까?"
"그럴 수 밖에 없겠지. 너 송규현이랑 같은 팀이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어. 우리도 수행평가해야지."
다연은 짧은 한숨을 쉬다가 말했다. 이미 다른 애들은 팀을 찾아가 수행평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연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서로의 팀으로 떠나갔다.
"나랑 같은 팀이지?"
규현에게 살며시 다가가 슬쩍 말을 건넸다. 간이 체육대회 전날이 마지막 대화였으니 아직은 어색한 사이였다. 규현의 앞자리는 이미 자기 팀에게 가고 없었다. 앞자리의 의자를 끌고 와 규현의 앞에 앉았다.
"이 수행평가 둘이서 의견 교환이 필요할 것 같아. 만나서 해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카페에서 만날래?"
"응. 그게 좋을 것 같아."
규현은 내가 하는 말이면 뭐든 다 긍정적인 대답을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잘 끝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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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옷을 챙겨입고 규현과 만나자고 했던 카페로 향했다. 학교 근처 카페였기에 다연과 자주 와 편한 카페였다. 카페에 들어가니 규현이 아닌 다른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하시연이 여기 왜 있는 거지. 뭐 나랑은 상관없으니 나보다 먼저 온 규현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맨날 반팔티만 입고 오던 규현이 오늘은 모던한 느낌으로 옷을 입고 와서 그런가 학교에서 볼 때랑은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역할 분배부터 하자. 자료 조사는 같이할까?"
과제를 최대한 끝내고 싶은 마음에 규현의 앞자리에 앉자마자 과제 얘기를 꺼냈다. 약간 실망한 표정인 것 같기도.
"응. PPT는 내가 만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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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맞는 자료조사를 오랜 시간 동안 하다가 지루해질 틈이었다. 갑자기 큰소리가 나서 옆을 보니, 서빙하던 직원이 하시연에게 커피를 쏟아버렸다.
"여분 옷 안 들고 왔는데."
하시연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하시연의 말에 혹시 몰라 들고 온 겉옷이 생각났다. 어차피 더워서 못 입는 거기에 난처해하는 하시연에게 겉옷을 건넸다.
"이거 입어. 아무리 여름이어도 감기는 걸리니까."
하시연은 잠깐 말없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겉옷을 받았다.
"고마워. 너 4반이지? 세탁해서 돌려줄게."
"아, 어."
하시연이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아는 애구나. 솔직히 말하면 좀 놀랐다. 필요 없다고 말하는 모습이 제일 먼저 상상이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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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은 이렇게 하면 되겠지?"
"이게 딱 적당한 것 같아. 드디어 끝났네."
과제 준비를 다 마치고 창문을 보니 이미 해가 떨어진 이후였다. 지금이 아무리 여름이어도 밤엔 좀 쌀쌀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과제를 할 줄은 몰랐기에 겉옷을 빌려준 거였다. 집까지 이대로 가면 추울 것 같은데….
"집 어느 방향이야?"
"난 이쪽으로 가."
"아, 나랑 같이 가면 되겠다."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더 이상 하는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
"난 저기 사거리 근처에 사는데, 넌?"
"나도 그 근처 살아. 우리 집이 가까웠구나?"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건 규현이었다. 들려온 소식은 뜻밖이었다. 이 곳에서 꽤 오래 살았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니.
"진짜? 신기하다. 이 근처 사는 애는 한 번도 못 봤는데."
"우리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나."
태연하게 말하는 척 하면서도 사실은 좀 추웠다. 입이 떨리려는 걸 간신히 붙잡고 걸었다.
"아, 덥다. 추우면 이거 입어."
내가 춥다는걸 어떻게 알았는지 규현은 겉옷을 벗어 나에게 주려고 했다.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데도 규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귀여운 점도 있구나.'
저렇게 부끄러워하는데 거절하면 상황이 어색해지겠지.
"고마워. 따뜻하다."
만족했다는 게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이런 성격인 줄 몰랐는데 친한 사람만 알 수 있는 성격을 알게 된 기분이다.
"우리 집은 여기야. 월요일에 발표 파이팅 해보자."
"응. 월요일에 봐."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겉옷이 갑자기 생각났다.
'맞다, 겉옷.'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서 규현이 떠난 방향의 길을 봤지만 이미 규현은 가고 없었다. 손 시려워 했던 것 같은데…. 월요일에 돌려주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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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했다."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빌렸던 겉옷을 규현에게 돌려주었다.
"그날 준다는 걸 깜빡해서 오늘 주네, 미안,"
"아냐 미안할 거 없어."
규현은 겉옷을 받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할 말 있어?"
"그게 이거 세탁했어?"
의도하진 않았지만 내 옷 세탁을 하면서 같이 빨게 됐던 것 같다.
"했어. 왜? 하면 안돼?"
"해도 되는데, 네 냄새가 나길래."
"서하 냄새? 서하 냄새 좋지."
저 멀리 앉아있던 다연이 한걸음에 걸어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근데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뭐야 그럼 싫다는 거야?"
다연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나오는 말은 시비를 거는 투였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박서하."
뒷문 쪽에서 들려오는 내 이름에 우리는 다 뒷문을 쳐다보았다. 뒷문에는 하시연이 내 겉옷을 들고 당당히 서 있었다.
"뭐야? 4번?"
"아, 내 옷."
내 말에 다연은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너 아니었으면 다시 집 갈 뻔했다. 고마워."
"응.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간다."
겉옷을 받자마자 상큼한 민트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그때 농구장에서 맡았던 하시연의 향기였다. 규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시연은 용건을 끝내자마자 바로 돌아갔다.
"뭔데. 쟤가 왜 네 겉옷을 가지고 있어?"
"토요일에 카페에서 직원이 실수한 바람에 시연이 옷이 젖었었거든."
"쟤 이름이 시연이야?"
"아, 맞아."
내가 하시연에게 겉옷을 빌려준 게 불만이었는지 다연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다연의 눈썹에 집중하다 보니 눈썹에 붙은 먼지가 보였다.
"눈썹에 먼지가."
다연의 눈썹에 붙은 먼지를 떼주기 위해 손을 갖다 대니 순간 다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니 다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디? 내가 할게."
자기가 하겠다면서 다연의 손은 먼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오른쪽."
"여기?"
그냥 답답해서 내가 먼지를 떼주었다. 다연은 눈이 동그래진 상태로 말이 없어졌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굉장히 당황했다는 표정으로 뚝딱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어디 아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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