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갖은 잡동사니와 책장
- 공방 내부, 서재.
잠시 시선을 빼앗기는 탓에 예상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셔우드는 목표 시간과 엇비슷한 때에 홈을 다 파내고야 말았다. 이제 톱밥이 날릴 작업은 더 없으니 그는 드디어 창가를 떠나 탁자 곁에 앉았고, 주문서 더미와 누워있는 도장 뒤편에 놓인 광택제와 병에 꽂힌 납작하고 넓은 붓을 집어 들었다. 닳디 닳은 손잡이와 한모에 스며든 광택제가 유독 반들거렸다. 반들거리는 손잡이가 이끄는 대로 끌리는 필두와 쓸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남아 매끄럽게 퍼져나가는 윤기가 제법 봐줄 만했다. 남은 부분에도 광택제를 바르고, 잠시 놓아두었다가 다른 면에 다시 바르고, 여러 번을 그렇게 붓으로 쓰다듬고 잠시동안 굳히고자 붓을 내려놓을 즈음이 되어서야 모르가나가 보다 초췌해진 몰골로 돌아왔다.
“방충망, 덧문, 뭐든 다 좋으니까 하나라도 좀 달아주세요.”
“여건이 된다면.”
“그 여건이 언제 되나요.”
“언젠가는.”
그 언젠가가 언제인데요. 나도 궁금하구나. 아니, 언제냐니까요? 언젠가는. 이래서 오래 묵은 영적 종족들이란. 모르가나는 투덜대며 탁자를 향해 종이 뭉치를 던지려다 탁탁 내리쳐 위아래 높낮이를 정갈하게 맞춘 뒤,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렇게 뛰어다녔던 것이 무색하게도, 모아둔 주문서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뼘은커녕 반의반 뼘도 못 될 높이로 쌓인 종이 더미 옆에 네모난 틴 케이스 하나가 곱게 놓였다. 안에는 똑같이 네모난 모양의 인주가 들어 있었다. 뚜껑이 열린 시간은 분명 길지 않았을 텐데, 공기와 맞닿은 윗부분이 약간 말라 버석거리기 시작했다. 뚜껑을 도로 닫았다. 모르는 척 구석으로 밀어버리려다가 떨어뜨렸다. 금속과 목재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공기가 찢어진다면 아마 이런 소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요란하다. 광낸 나무판을 손바닥에 드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에서 한 뼘 정도 위로 둥둥 띄워둔 셔우드가 슬며시 흘겨볼 만큼.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은 나는 모른다는 듯이, 어느새인가 겉과 속이 뒤집힌 배낭을 쥐고 돌아온 아담의 근처로 향했다. 천장에 닿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담의 턱 언저리에는 닿을 높다란 탑은 이제 모르가나의 머리 꼭대기를 이미 훌쩍 넘어서는 높이였다.
“심층 걸어둔 가방이라 참 많이도 들어갔네요. 안에 남는 공간은 없었어요?”
“내부를 일반 제품의 3배 이상으로 늘려놓아 여유분이 충분하였습니다. 목표 외에도 흥미로운 물건- 주로 서적이 상당한 부피를 차지한지라 포화 상태로 인식되었을 뿐입니다.”
“어, 그래 보이네요. 대체 저게 다 뭐에요?”
“5할은 최근 발간된 학술 서적이며 3할은 문학, 2할은 잡지입니다.”
“그럼 이건? 꼬마들 주게요?”
“예. 베개로 쓰기 딱 좋은 재질이라 판단하였습니다.”
“아니, 대체 누가 봉제 인형을 베개로 써요?”
“전에 작은 친구들이 고학년생들은 인형을 들고 다니며 쉬는 시간에 베개로 삼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 만해요. 앱타티니윤은 쓰잘데기 없이 빡빡하고 융통성이라곤 없으니까, 쉬는 시간에 그렇게라도 쪽잠 자야했고. 요즘은 선생들이 그거 잘 안 잡나 보죠? 3년 동안 참 많이도 변했네.”
“저는 완전한 외부인이기에 앱타티니윤 교내의 규칙 등은 지식 밖입니다. 작은 친구들이 하교하는 때에 직접적으로 물어보시지요.”
“네, 그래야겠네요.”
여전히 창가에 팔꿈치를 걸치고 선 셔우드의 등 뒤에서 아담과 모르가나는 바닥에 쌓인 물건들을 주워 정리하며 열심히 담소를 떨었다. 두어 달에 한 번씩은 꼭 생기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셔우드가 바빠보이는 것인지, 과하게 몰입한 탓인지, 아무튼 그러한 탓에 넝쿨의 도움이 없어 조금 오래 걸릴 듯했다.
그런데 왜 세 개에요? 토끼는 케일 양, 사막여우는 앙투안 군, 그리고… 오리너구리는 저의 몫입니다. 뭐야, 제 건 없어요? 나도 인형 좋아하는데. 장성한 청소년이라면 본인의 재력을 활용하여 쟁취하는 것이 옳음이라 생각합니다, 쉘비 양. 어디서 샀는데요. 에유사의 한 시골 마을에서 열린 바자회였지요. 멋진 것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뭐야, 결국엔 한정판매였다는 소리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 것도 좀 사오셨어야지. 생각보다 예산을 많이 소비하여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참, 너무하시네. 아쉬우시다면 물자 담당의 교대를 추천드립니다. 현재 판단하신 바에 비하면은 보다 이점이 많음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견문이 정말로 많이 확장되기에……. 아, 그건 좀. 유감입니다. 그러나 긍정해드리겠습니다. 뭔 말을 아주 선심 쓴다는 듯이 해요?
티격태격한다기에는 조금 일방적인 대화가 몇 번 오고 가는 것을 들으며 셔우드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제자리를 하나씩 찾아가는 물건들 옆을 차지한, 미간이 묘하게 넓어 맹한 인상의 오리너구리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 반구형 단추의 매끄러운 표면에 녹색 눈이 비친다. 눈을 살짝 치켜뜬 셔우드는 그것의 맹한 눈을 보고는 질린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투명도라고는 없는 동그랗고 새까말 뿐인 눈. 그는 무생물의 혼탁한 시선에 일말의 불쾌감을 느끼지 않으려 아주 잠시 노력해보았다. 허사였다. 한번 불쾌한 것은 영원토록 불쾌한 것. 나무로 된 바닥에서 기어오른 덩굴이 그것을 밀어 굴려버릴 때까지, 그는 그것에 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플라스틱인지 뭔지, 재질 모를 단추는 목제 탁자와 부딪혀 간결한 소리만을 남겼다. 굴러가다 멈춘 그것의 뒤통수에는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이제 그대로 놓아두고 일에만 집중하는 것. 때맞춰 날아온 얇은 이파리를 붙잡아 손 위에 떠 있는 것의 표면 이곳저곳을 아주 살짝 쓰다듬는다. 빼곡하게 돋아난 솜털에 그 무엇도 묻어나지 않았다. 셔우드는 띄워두었던 나무판을 손바닥까지 내려놓고는 다른 판을 집어 들었다. 아까의 것과 같이 도톰하지만 동그스름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각진 것이다. 왼손으로 팔각형으로 모양새만 잡힌 그것을 들고, 오른손에는 다시 다듬을 도구를 들었다. 그가 둥근 듯 각지게, 각진 듯이 둥글게 모양을 잡아가는 동안 뒤에서는 온갖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르가나와 아담이 어느새 문밖에 나타나 손 흔들며 다가오던 시스까지 냅다 끌어들여, 함께 큰 종이봉투와 견과류 봉지와 다 으스러진 도넛 상자나 다과로 가득한 틴 케이스를 옮겼다던가. 그러는 와중에도 각자 당의가 다 벗겨진 데다가 납작해지기까지 한 도넛 하나씩을 우물거리며-
이건 인위적인 단맛이 강해서 별로네요. 당신이 설탕 한 바가지 뒤집어쓴 걸로 집어가놓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요. 하지만 남은 게 그거뿐이었는데? 프라이쉬츠 군과 저의 취향 간 교집합 형성은 불가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감이군요. 솔직히 그쪽이 쉘비보다 더 얄밉습니다? 아니, 난 또 왜 얄미운데요. 대답을 해봐요. 대답을. 그게…. 왜 못하는데요? 아뇨, 아닙니다.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왜 얄미운지 말을 하라니까? 같은 대화를 나눈다던가.
아담이 드문드문 떨어진 설탕 부스러기를 몰래 구석으로 쓱 밀어놓으려다가 천장에서 갑자기 떨어진 낙엽- 언제나 그러한 초여름에 맞지 않게 빨갛게 물든, 이 숲 속에서 발생할 리 없는 그것이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이유를 깨닫고 곧장 그만두었다거나.
아담이 보드라운 토끼와 사막여우 봉제인형을 위층 방 앞에 조심히 내려놨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방 안에 들여놓았다던가, 모르가나가 시집과 소설과 잡지하며 학술 서적으로 쌓은 산 위에서 꽃씨 봉투를 내린 뒤 찬장에 던져넣는 것에 성공해서 함성을 질렀고, 그 탓에 갑자기 날아온 빠알간 단풍나무 씨앗- 이것도 이곳의 계절에 들어맞지 않는 것- 에 머리 언저리를 얻어맞았다거나, 가위바위보에서 진 시스가 착실하게 묘목 세 그루를 들어 밖에 내놓았다던가.
시스가 아담과 함께 커다란 천 주머니 다섯 개를 모두 풀어 내용물을 들여다보고는 잠시 서로 마주 보더니 바로 원래대로 묶어버렸다거나, 모르가나가 해산물 닮은 꼴 베개와 조립식 내장 지우개를 보고선 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거나, 시스가 새우 모양 목베개를 셔우드의 머리에 올려놓았으나 반응이 없어 멋쩍어했다거나, 모르가나와 아담은 그걸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던가, 그런 일들이 줄줄이 연달아서.
그러다가 정리의 막바지에 쌓이고 쌓인 책을 치울 때가 되어 정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결국 아담이 할 테니 누가 무슨 책을 옮길지를 놓고 또 가위바위보를 했다거나… 가장 무거운 것은 자신이 맡겠다며 기권한 아담 대신 모르가나와 맞붙은 시스가 마지막에 일부러 져 준 것처럼 보였다던가. 결과적으로는 모르가나가 먼저 온갖 신빙성 없어보이는 잡지를 주변에 둥둥 띄운 채 잽싸게 계단으로 달려갔고, 시스가 맨 위에 가득 쌓여있다 그대로 내려온 시집과 소설을 얼추 추려서 챙긴 뒤 파랗게 반짝이며 사라졌고, 남은 아담은 언제 발표되었는지 모를 학술 서적을 한가득 들고 올라가야 했다. 아담은 그것들을 옆구리 사이에 끼고 서재로 향하려다 발결음을 도로 돌렸고, 그러고선 봉제 오리너구리가 셔우드를 똑바로 바라보도록 놓아둔 후에야 만족한 듯이 등을 돌리고 나아갔다. 끝내 책마저 그렇게 사라지자 감춰진 상자만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채로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셔우드는 쉬지 않고 움직여서 다시금 붓을 손에 쥐었다. 새로 열심히 다듬어 둥그스름해진 판에 다시금 광을 내려는 순간 머리에 천과 솜으로 된 새우가 내려앉는다거나, 그런 사소할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용함에 돌아보았을 때 다시 맹하고 까만 단추와 마주쳤을 때에도 질린다는 듯이 돌려버리기는 했지만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남겨진 상자에도 당장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렸다. 안에 무엇이 있는가, 왜 저런 것을 사왔는가는 한동안 묻지 않을 작정이다. 그가 질색할 것이 분명한, 저런 것을 사왔는데도 제법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그가 잠시 고개를 들자, 그제야 넓은 미간과 매끄러운 까만 단추 눈이 달랑거리는 연갈색 오리너구리 하나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뿌연 회색 주둥이 부근 실밥이 벌어져 하얀 솜이 훤히 내비치는 것이 싫었는지, 어디서 뻗어난 가지로 반 바퀴 돌려버렸다.
오래된 계단이 무거운 발걸음에 눌리면서 삐걱대는 소리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법이다. 허름한 것과 낡은 것을 사랑하는 아담도 그 소리를 온전히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모양이다. 다행인 점이라면, 그런 계단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일까. 이른 시일 내에 손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럴 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아담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자신은 두어 달에 한 번씩 몇 주간 자리를 비웠고, 모르가나는 수리에는 그리 뛰어난 재주가 없었으니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테고, 셔우드는 단순한 장식품만 아니라면 무엇 하나를 만드는 데에 꽤 많은 공을 들이니 다른 데에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테고- 또는,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날 수 있었을 테니 아예 몰랐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고, 시스는 늘 1층이나 공방 근처에만 머물다 돌아가는 외부인이며, 도로시와 아스터는…….
삐걱이는 소리에 삐걱, 삐걱이는 소리가 다시 겹쳐졌다. 늘 하던 대로 서재 정리 힘내요. 수고하십시오, 아담. 하는 말소리도 끼얹어서. 삐걱임과 말소리는 아래로, 아래로 계속 멀어져만 갔다.
아담은 얕은 한숨을 짤막이 내쉬며 서재로 들어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홀로 미닫이문이 달렸고, 안은 겉보기의 수 배는 더 널찍한 데다가 입구 옆에는 언제나 길고 네모난 화분이 놓인, 이제부터 책장 칸마다 새로운 책이 들어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그 이상한 방 안으로. 문이 이미 열려 있던 덕에 들고 있는 책을 내려놓을 필요 없이 편하게 들어선 그는 화분을 바라보았다. 물기가 없는 탓에 부슬부슬하고 연한 색의 흙을 보아하니 이번에는 아직 그 무엇도 심지 않은 모양이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분명 이름 모를 푸르스름한 꽃이 생생하게 피어있었는데, 대체 언제 사라진 걸까. 그동안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면 작은 친구들이 공방 위쪽의 꽃밭으로 옮겨심었을 테니 행방은 궁금하지 않을 테지만, 자신이 없던 그 2주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점은 남아버린 듯하다. 그것이 가능한 한 이 모든 것을 빠르게 파헤쳐 보고 싶다는 충동을 안겨주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서재에서 뛰쳐나가 꽃밭으로 달려가는 대신 미닫이문을 다시 밀어 닫았다. 제대로 닫기는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제대로 닫히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들어서서 그는 책이 새로 들어서거나 자리를 내기 위해 다른 책이 밀려나는 소리를 내면서, 그리 복잡하지는 않지만 단순하지도 않은 책장 사이의 길을 따라서. 적당한 틈이 있는 책장마다 어울리는 책을 꽂으며 더욱 깊숙이 나아갔다. 책장 사이로 드문드문 파란 빛 조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묘하게 신묘한 느낌을 주었다. 칸 전체를 채우기에는 책 높이가 모자라 생긴 여백 너머 책으로 이뤄진 언덕과 책수레가 있었다. 아까 모르가나가 말했던, 얼마 전 비아가 추천했고 도로시가 편하게 살기 위해 사야한다고 주장했다는 그것인 모양이다.
저편에 있는 딸기꽃을 닮은 매듭과 칙칙한 연두색 끈으로 장식된 책장이 하필이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체 모를’ 한 저자가 남긴 여섯 권 남짓한 책으로만 채워진 탓에 대부분이 비어있는 그것. 그가 공방에 발 디딘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서가 정리를 막 배우던 때에 딱 한 번 보았던- 꽤나 오래 묵은 마법 이론서만 남아있는 낡고 볼품없을 책장이다. 셔우드가 직접 관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낡았다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종이와 장정본임에도 끝이 해지고 장식용으로 붙였던 나뭇가지 모양 금박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간 겉표지를 보면, 정확히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적게 잡아 수백 년 전 물건은 아닐까 지레짐작만 가능할 터였다. 아담은 셔우드가 부디 조심해서 다뤄달라고 신신당부한 책이기에 생긴 호기심에 못 이겨 살짝 들춰보았던 때의 충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낡은 책은 저자의 어휘력 부족인지, 아무튼 그러한 모종의 이유로 그렇게 깔끔하진 않은 설명과 그다지 정교하진 못한 참고용 그림이 다였지만, 몇 가지는 현대에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만한 참신하거나 실용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워놓았었던. 한때 아담은 내심 저 책의 저자가 백년도 채 못 살고 떠나가는 인간이나 피가 옅은 혼혈이 아닌, 명줄이 길어 수백 년은 거뜬히 살아가는 영물이나 요정, 요괴이거나 그들의 피가 더욱 짙은 혼혈이어서 지금까지 정정하게 살아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만약 저 수수께끼의 저자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관련 자료가 발견되었을 테고, 그랬다면 아마…… 따위의 생각을. 일부는 정답일 수도 있고, 그렇다고 굳이 알 바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는 열심히 걷다가도 걸음마다 그 요주의 책장 앞에서 멈추었다가, 묵직한 책을 한 아름 그러안아서인지 연신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귀를 기울이니 들리는 것도 같을- 책이 새로 들어서거나, 자리를 내기 위해 다른 책이 밀려나는 소리를 따라서, 그리 복잡하지는 않지만 단순하지도 않은 책장 사이의 길을 따라서 한 걸음, 쥐었다 핀 주먹이 하나. 적당한 틈이 있는 책장마다 어울리는- 어쩌면 그저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인 책을 꽂으며 틈틈이 난 빈 공간 사이를 줄곧 눈길로 좇았다. 저 낡고 볼품없고 텅 빈 책장이 분명 움직이지 않을 것이 뻔함에도 줄곧. 탁한 연보라색 역십자 무늬가 선명한 레몬색은 매듭과 끈을 따라 맨 위 칸까지 상승해 누운 채로 방치된 두 권에 머물렀다가, 적당히 책 꽂아넣는 소리에 감기고, 다시 끈을 따라 똑바로 세워진 두어 권에 멈추고, 손에 쥔 손잡이의 매끄러운 감촉에 떨어졌다가, 고개를 숙여야 겨우 보이는 가장 아래의 두어 권에 도로 얽매이고, 곧은 자세로 일어서는 동안 다시 감기며 헤매었다. 끝끝내 열어보지는 않을 것처럼 굴다가도, 기어코 펼쳐보고야 말겠다는 손짓의 교차 끝에 결국 책은 펼쳐졌다. 반 이상이 여백인 낡고 볼품없는 종이뭉치가 결국에는 펼쳐지고야 말았다.
어느 장의 네 번째 줄부터 한 장 내내 마나석 가루를 소량 사용하여 수제 금속의 형질 일부를 극대화하는 방법이 적혀있고, 저기에는 경질인 마나석을 다시 연질로 변화시키는 방법과 관련된 이론만 덩그러니 적어놓았다. 덤으로 이 과정을 거친 마나석을 빵에 발라먹으면 보기에는 상당히 그럴싸하지만 맛은 아주 경이로우리만큼 없으니 절대로 따라하지 말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며 저자가 자신을 뛰어넘는 괴짜임이 틀림없을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새다. 그래, 누가 저걸 빵에 발라먹을 생각을 한 걸까. 보통은 모르는 척 넘어가 줄만한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내심 마나석 바른 빵은 대체 어떤 맛일지 궁금증을 가진 모양이다. 아마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유리를 씌운 맛에 가깝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다음 장의 열여섯번째 줄에는, 마법사의 기본 소양은 건강하고 곧은 척추라는 굵디 굵은 글씨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유감스럽게도, ‘하지만 필자는 짝다리를 자주 짚어 척추측만증을 얻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직업 불문, 짝다리를 짚지 말고 허리를 곧게 피자. 당신은 할 수 있다. 건강한 척추를 통해 건강한 미래를 쟁취해내라.’라는 대목도 있었다. 아담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폈다. 곧게 펴다 못해 아주 바닥과 수직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도 지금 생긴 모습 그대로 쭉 건강할 듯 하다. 유감인지는 잘 분간이 가지 않는 결론이지만 결국에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넘어가자.
“의미가 없다 말씀하심은 역으로 의미가 있음으로 인식하여도 됨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유감이지만, 반박은 듣지 않겠습니다.”
넘어가라고.
“거절합니다.”
그냥 나가.
“해당 문단까지 기억한 뒤 그리 하겠습니다.”
말에 따라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그냥 이쪽에서 넘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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