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찰나의 여름 (2)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우리 진짜 친구 맞지?”
“......”
그 말 한마디에 채주현이 입에 걸고 있던 희미한 미소조차 거두고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건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주현은 아무 말 없이 여루를 응시했다. 그에 지지 않고 여루가 대답을 종용하듯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갸웃하자 주현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오른다.
“...응. 친구야.”
“그래. 우리 친구끼리 선은 넘지 말자. 너 좀 있으면 선 넘겠어.”
“그 선, 넘으면 안 되는 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얘는...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지켜야 할 게 있는 법이지. 너는 안 그래?”
“나는 안 그런데.”
“와... 말하는 것 좀 봐라? 너는 안 그래도 내가 그래.”
어이없다는 듯 주현을 타박하자 다시 희미하게 웃는다. 미지근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여루는 바람을 느끼며 다시 말없이 교실 내부를 응시했다. 이건 화해한 건가? 화해한 거 맞지?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싱숭생숭할까... 내가 진 것 같은 느낌인데.
여루는 입술을 한 일자로 꾹 다물고 시선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창문턱을 잡고 있던 여루의 손에 온기가 얹어졌다. 그녀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손에 얹은 온기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처럼 창문가에 걸터앉은 주현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얘 또 키 컸나... 언제 앉은키가 이렇게 커졌지? 성장기 남자애들은 참 빨리 자라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소녀가 멀거니 소년을 올려다봤다. 주현은 그런 그녀의 뺨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여루는 어색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내려 피했다.
그러자 한참 뺨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반대편 손과 함께 양 뺨을 살짝 붙잡았다. 이내 얼굴이 가까워지고 부드럽고 말캉한 무언가가 이마를 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 여루의 표정에 처음엔 의아함이, 그다음엔 당황스러움이, 마지막엔 부끄러움이 서렸다. 그녀는 목덜미를 붉히며 상체를 뒤로 물려 그와의 거리를 확 벌렸다.
“뭐, 뭐뭐 뭐 하는...?!”
“사랑해.”
“......”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소녀는 망연한 얼굴로 소년을 마주했다.
“...내가. 내가... 예전에,”
“응. 예전에 이미 차였었지, 나. 알아. 그런데 사랑하는 걸 어떡해?”
“주현아.”
“여루야. 사랑하는 사람을 더 알고 싶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으면 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거야?”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네가 했던 행동들은──”
“나는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거부하는 건 알겠어. 그런데 왜 내 사랑을 부정하는 거야?”
채주현이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매미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루는 지금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려 들고 강제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호적이다. 동등한 관계에서 건강하게 교류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어느 한쪽의 사랑이 더 크거나 더 작아선 안 된다. 그러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당시의 여루는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부모님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도 두 분은 같이 살았다.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너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해서. 너를 위해서.”
“아니... 왜 나 때문이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 그냥 우리는 적당한 친구 관계로 지냈을 거야.”
“주현아,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여루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채주현이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자신의 품에 가두어진 여루의 머리를 소중히 감싸 안는다. 그 이후 관자놀이에 다정하게 내려앉는 입맞춤.
왜 내가... 네 사랑을 책임져야 하는데?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여루는 생각했다. 내가 끈질기지 못해서. 내가 확실히 끊어내지 못해서. 하지만 소녀는 친구를 잃게 될까 두려웠다. 사실 전혀 자책할만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채주현은 자기 좋을 대로 지껄이고 있는 것뿐이다.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여루는 죄책감에 또다시 빠져들었다. 소년은 언제나 그랬다. 소녀를 정서적으로 학대했고, 그게 통하지 않으면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며 눈물로 협박했다. ...권여루는 그런 채주현에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결국─
“여루야.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먼저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줬잖아... 네가 먼저 나한테 웃어줬잖아. 나한테 애초에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아니...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놔. 너 또...!”
주현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리자 그는 그런 그녀를 더 꽉 잡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놓으라고! 여루가 신경질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주현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녀를 놓아버렸다.
“─!!”
격한 몸부림 때문에 몸이 휘청하더니 결국 여루가 교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아윽!... 아...”
눈물이 찔끔 배어 나왔다. 신음을 흘리며 여루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해 바로 일어나려 했다. 꼴사납게 뒤로 넘어지다니 이게 뭔… 그러나 주현이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는 바람에 다시 교실 바닥에 머리를 누일 수밖에 없었다.
“...? 무슨...?”
“여루야. 어차피... 우리는 이어질 거야. 괜히 힘 빼지 말고 가만히 있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장난하지 말고 당장 비켜. 나 진짜 화났어.”
“처음 본 순간 알았어. 이건 열병 같은 첫사랑이 아니야. 그런데 동시에 맞아. 지독한 열병이야. 나는 평생을 앓을 거야. 그리고 이 지독한 감정은 사후에도 계속되겠지.”
죽음을 거론하는 그의 모습에서 어떤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여루는 주현이 다리를 얽어오는 것을 느끼곤 그대로 굳었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 못하겠어... 사후라니...?”
“우리가 어떻게 만났든, 무언가가 우리를 만나게 했든. 결국 우리는 이어질 관계였고, 사랑할 관계였어. 알지?”
“...모르겠어.”
“그래, 몰라도 돼. 중요한 건 내가... 너를 이렇게나 사랑한다는 거니까.”
“...!”
주현이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단단한 두 팔에 가둬진 여루가 바르작거렸지만 그는 체중을 실어 더욱더 강하게 그녀의 몸을 고정할 뿐이었다. 하얀 교복 블라우스 속의 가는 허리를 건드리는 따듯한 손길을 느끼며 여루는 생각했다. 지독한 계절의 열기가 자신을 죽이고 있다고.
이번에 자신을 죽이는 건 ‘내’가 아니었다. 채주현이라는 한 소년. 그리고 남은 것은 지독한 열기와 어둠 속 메아리치는 매미 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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