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담00 :: 세 개의 별

[취담 00] 별 :: 세 번째 별 - la Luna

이은하. 소설. 2017

취담 by 소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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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랑에 빠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1.

 

까마득히 오랜 시간을 살았다. 탄생도 기억나지 않았고 끝을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정말 오랜 시간이었다. 누군가 나이를 물어온다면 한참을 헤아리다 까먹었노라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게 되면 모든 것이 풍화된다. 형체 뿐 아니라 기쁨과 슬픔, 분노, 바라는 것, 지식까지 자신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풍화되어버린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그 긴 시간 속에 그저 존재했다. 한때는 찬란한 꿈을 꾸었다. 어떤 때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몸을 떨었고, 또 어떤 때는 사무치는 슬픔에 괴로워했다. 그런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없이 긴 시간 속에서 꿈은 무의미했고 감정은 찰나였다. 나는 새로운 꿈을 꾸기에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에도 지쳤다. 너무 지쳐서 그저 살아있었다. 나의 모든 것이 사라졌음에도, 나의 존재만이 선명했다. 온전히 사라지지도 온전히 살아있지도 못한 채 그토록, 그토록 오랜 시간을 존재했다.

그런데,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다른 별에 사는 생물에게. 우리는 너무나도 달랐다. 동그랗고 울퉁불퉁한 나에 비해 그 생물은 아주 작았고 별에 저보다 큰 돌기가 자라난 모양이었다. 그는 커다란 푸른 별 안에 저만큼만 움직이며 살았다. 가끔 그보다 조금 커다란 생물에 타고 푸른 별의 다른 편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다시 제 사는 곳으로 돌아가 또 저만큼 움직이며 살았다. 나는 검은 공간 속에서 그 생물과 그 생물이 사는 푸른 별을 빙빙 돌며 그 모양을 지켜봤다. 나는 그와 대화조차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고, 당연히 그의 생각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이를 사랑하게 되다니, 재미없는 농담, 그 조차도 될 수 없었다. 악의에 찬 누군가의 장난은 아닐까 싶었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이 거대한 우주를 주무르는 이가 있다면, 날 아주 미워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녕 사랑에 빠진 게 맞다면, 이 감정이 사랑이 맞다면, 대체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 인식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생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한 이가 정말 저 푸른 별의 작은 생물 한 개체가 맞는 걸까. 비슷한 이를 두고 헷갈리는 것은 아닐까. 대체 어떻게 내가 그 작은 생물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이 신의 못된 장난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푸는 것 같았다.

 


2.

 

몇 번을 의심하고 부정한 끝에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작은 생물을 사랑했다. 내가 이토록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놀라웠지만, 그 대상이 그런 것도 믿을 수 없이 놀라웠지만, 나는 그 생물을 열렬히 사랑했다. 설령 그가 내 존재조차 모른다 하더라도, 나는 그 작은 생물이 나와 같은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그토록 미워한 신에게, 거대한 우주의 의지에게 감사를 외치기도 했다. 내 모든 시간이 그 작은 생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데 쓰였다. 내 시간은 마냥 죽어갔고 내 감정은 마냥 지쳐있었으니, 그에게 내 전부를 쏟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이토록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늘 새롭고 놀라웠다.

“안녕, 작은 생물아? 오늘은 꼬리별을 봤어. 너에게도 보였을까?”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 지금은 무슨 생각하고 있어? 내 말이 닿아?”

나는 늘 그 작은 생물을 향해 말을 걸었다. 닿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말을 걸었다. 언젠가는 가만히 듣고 있던 푸른 별이 화를 냈었다.

“제발 그만 좀 해. 듣고 있는 내가 민망하다. 그렇게 말 걸어봤자 인간한텐 들리지도 않아.”

“인간, 이라고 하는구나.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푸른 별아, 나 사랑에 빠졌어. 인간을 사랑해.”

푸른 별은 짜증스러운 듯 투덜대더니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이해할 수 없다며 불평했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푸른 별은 늘 인간의 이야기를 해줬다. 늘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의 하루를 들려주었다. 참 상냥하게도!

나는 행복했다. 인간과 같은 우주 안에 살아있었고, 그를 사랑하며, 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응원하는 친구가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감정이었다. 온 세상이 환희로 빛났다. 우주만물에게 감사했다. 저 검은 우주의 별들이 내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

내 사랑은 점점 자라났다. 나날이 새로운 행복이었으며, 나날이 새로운 기쁨이었다. 하지만 이 감정은 무엇일까. 마음이 벅차오르다 못해 터질 듯이 아려온다. 이 고통은 무엇일까.



3.

 

인간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나보다 훨씬 작은데도 그런 기분이 들다니, 거짓말 같았다. 나는 자꾸만 작아지고 작아져서 없어져버릴 것 같았다. 언젠가는 이 사랑에 잡아먹히는 것이 아닐까 무서워졌다. 나를 잃어가는 것일까, 그 거대한 시간처럼, 날 없애버리려는 우주의 의지가 아닐까. 우주의 의지가 날 너무 미워해서 이렇게 죽여 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는 무서웠다. 너무 좋아서 불안하다는 것이 무서웠다. 불안할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조차 무서웠다.

푸른 별은 상냥하게도 인간에 대해 계속해서 알려왔다. 인간의 생애, 언어, 그의 짧은 수명까지. 아, 인간은 어쩜 그리 사랑스러울까. 왜 그리 짧은 생을 살고 떠나는 걸까. 어째서 나는 그 작은 생물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이리 어려울까. 누군가의 상냥함에 기대야만 충족할 수 있는 나의 사랑은 고통이었다.

내가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존재와 그를 알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토록 사랑스러운 이에게 사랑한다 전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비참했다. 나의 무력이 괴로웠다. 내 모든 시간을 쏟아 사랑한다 전할 수 있다면 그러했을 터였다. 하지만 인간은 그를 기다려 줄 만큼 살지 못했다. 인간을 사랑해서 행복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자꾸만 날 초조하게 만들었고 욕심나게 만들었다. 나는 자꾸만 화를 냈고 슬퍼했고 괴로워했다. 인간을 사랑한 것은 행복한 재앙이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사랑이 이렇게 괴로운 감정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내 생에 인간이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평생 기쁨도 슬픔도 없이 살아있었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야?”

“왜 인간은 그렇게 금방 죽어버리는 거야? 난 왜 그런 생물을 사랑하게 된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기쁨과 슬픔을 오갔다. 분노와 증오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도 했다. 연민과 애통함에 잠겨있기도 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이 고통마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4.


"인간이 죽었어."

어느 날 푸른 별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인간이 죽었다. 내가 사랑하는 인간이 죽었다. 인간은 죽는다. 생물은 언젠가 죽으니까, 나도 인간도 죽는다. 인간은 나보다 짧은 수명을 가졌으니, 인간은 나보다 빨리 죽는다. 그래, 인간이 죽었어. 내가 사랑하는 인간이 죽었어. 아,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그건 아니지. 그저 닿을 수 없는 인간이 더 닿을 수 없게 돼버렸을 뿐. 내가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푸른 별이 오히려 나보다 시무룩했다. 푸른 별은 애써 날 위로하려는 듯 말했다.

"인간은 죽으면 별이 된대. 그러니까 인간이 죽어서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라. 아니, 잘 죽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상황이 좋아진 걸 수도 있다, 그런 얘기지. 아니, 모르겠다. 미안."

그런 푸른 별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인간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믿을 수 없었지만 나는 말했다.

“난 괜찮아.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지 않았다. 인간이 없는 푸른 별을 보았다.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그리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데, 우주는 변함없이 움직였다. 그가 날 바꿔놓았는데, 그가 내 우주를 바꿨는데! 그가 없어졌는데 똑같이 돌아가다니, 변한 것이 없다니! 그것이 제일 괴로웠다.

“인간의 존재는 내게만 이렇게 커다란데, 대체 그가 살았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를 사랑한 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인간의 존재가 무의미했다면, 아무리 짧을지언정 그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의미조차 없었다면, 대체 인간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왜 태어난 걸까. 왜 죽은 걸까. 인간은 너무나 작았다. 우주는 너무나 거대했다.

“그럼 역시,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나았어? 인간 같은 거 모른 채 예전처럼 살고 싶었어?”

푸른 별이 말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는 나와 너무 달랐고, 나는 그에게 닿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 사랑이 모두 무의미했을 수도 있었다. 그 존재도 내 사랑도 의미 없는 순간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 인간을 사랑해서 다행이야.”

그랬다. 나는 여전히 인간을 사랑했고, 앞으로도 인간을 사랑할 것이다. 설령 그가 죽어, 어쩌면 별이 됐어도.

“그를 사랑하는 동안 나는 살아 있었어. 너무 기뻐서 세상이 반짝거렸고, 너무 슬퍼서 모든 것이 빛을 잃기도 했어. 확실히 인간이, 그 작은 생물이 태어나 죽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거야. 하지만 그 존재를 알게 돼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난 행복했어.”

슬펐다.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인간의 죽음이 실감났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더 선명했다. 인간이 있었어. 이 우주에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었어. 그는 죽어 없어졌지만, 분명히 존재했어.

“인간이 정말 별이 되었다면, 언젠가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오랜만에 꿈을 이야기한 것 같았다.



5.

 

인간은 죽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살고 있다.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여전히 날 행복하게 만들기도 했고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그저 존재한 채로 시간 속에 남겨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랑하며, 그 덕에 비로소 살아있었다. 어쩌면 찰나일지도 모를, 무의미할지도 모를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제 그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죽었어도, 별이 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어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 인간의 삶에 달이 존재하듯이, 내 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령 슬픔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시간에 묻혀 흐릿해 보여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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