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의뢰>
서늘한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눈앞의 시야를 덮쳤고 울퉁불퉁한 산길에 발이 아팠다. 발을 감싸 신발의 흉내를 낸 천은 바닥의 돌과 부러진 나뭇가지로부터 완전히 발을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맞잡은 손의 따스함과 눈앞의 등이 이끌어주는 대로 달리면 되니까.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따위 아픔도 상관없었다. 쉼 없이 달리느라 숨이 찼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붙잡힐지도 모른다. 그래선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헉, 헉…! 조금만, 조금만 더 힘내. 미오! 이대로 이 산만 넘으면, 옆 마을이야! 이제 곧 벗어날 수 있어! 너희 어머니에게서, 그 방에서!”
아아. 얼마나 든든한 말인가.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한 건, 이 사람을 만난 건 틀리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는 가운데, 감정마저 북받쳐, 물기를 머금기 시작한 목소리를 겨우겨우 내뱉었다.
“응…! 줄리… 난…. 나는, 줄리… 너와 함께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봄.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친 한 여성이 ‘미스트워커 탐정 사무소’라고 적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간판이 살짝 흔들렸다. 안으로 들어간 여자는 코트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흙 묻은 신발을 신은 채 책상 위에 발을 꼬아 올렸다.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헤집으며, 여자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망할! 그놈의 빌어먹을 고양이는 대체 왜 자꾸 집 밖을 나간대냐? 그쯤 되면 그냥 풀어놓고 마당에서 키우는 게 맞지 않나?”
책상 앞에 불량한 자세로 앉은 여자, 조세핀 미스트워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세피나(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탐정은 돈이 되지 않는단다. 네 명석한 두뇌로 다른 일을 하려무나.”
언젠가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무능을 지적하는 것만 같았기에, 알량한 자존심을 굽히지 못한 조세핀은 어머니와의 언쟁 끝에 짐을 싸 들고 이곳, 마크라(Mahkra) 마을로 출가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골과 도시의 중간 정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 마크라 마을은 아직 마차가 돌아다니고 보안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세핀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이곳에 탐정이 없어서였다. 근대화가 덜 된 만큼 자질구레한 잡심부름 따위나 하게 될 것도 예상에 있었지만, 마을 내에서 묻힌 비밀스러운 사건 따위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어떠한 기대감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하아…. 마을 놈들도 날 그냥 심부름꾼 정도로만 생각하고. 어디, 그놈들이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내 명성이 올라갈 큰 건수 하나 안 오나?”
혼잣말에 다가오던 발소리가 묻혔는지, 갑자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세핀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복장만 본다면 수상한 사교도의 사람과도 같이 보였다. 놀란 조세핀이 멍하니 있자, 로브를 쓴 사람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곤,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미스트워커 탐정 사무소 맞나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실 같은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기백이 느껴졌다. 얇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을 강한 실. 그 목소리의 첫인상은 그런 느낌이었다.
“예, 예?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무슨 일로 오셨는지…….”
“탐정되는 분이 그런 것도 몰라서 어찌 일을 하려고 합니까?”
뭐야? 조세핀은 괜히 열이 받았다. 하지만 어딘가 자식을 조용히 나무라는 단호한 어머니같은 그 느낌에, 조세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문을 닫은 뒤, 로브를 벗어 그 얼굴을 드러내었다. 결이 거친 게 눈으로 보일 정도로 관리되지 않은 짙은 애쉬 브라운의 머리를 머리망에 넣어 정갈하게 묶은 여자였다. 하지만 짧은 옆머리가 조금 흘러내려 있었고, 로브를 쓰고 벗는 과정에서 머리 위로 잔머리가 조금 나와있었다. 피부 역시 관리가 잘되지 않았는지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고 입술도 건조한 듯 부르터있었다. 그런 무채색의 칙칙한 인상 속에서 유일하게 채도를 유지하는 주장하는 것은, 타오르는 듯한 짙은 녹색의 눈동자였다.
“의뢰하러 왔습니다, 미스트워커 씨. 제 딸을 찾아주세요. 이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뿐이에요.”
로브 속 얼굴을 보자마자 조세핀에게 든 생각은, ‘올 게 왔구나’였다. 눈앞의 여자는 마을에서 유명한 스키조 D. 애스터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스키조 D. 애스터 부인. 내가 이 마을에 전입하기 전부터 이미 유명한 사람이라지.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10년쯤 전 마차사고로 남편을 잃은게 그 계기라던가. 함께 살아남은 외동딸을 좀 광적으로 아낀다던데. 그 광적인 집착이 여색(女色)과 닮았다던가.’
내게 그런 취향은 없지만. 조세핀은 그리 생각했다. 어차피 딸에게 집착한다면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므로, 오히려 안심해도 될 일이다.
“딸을 찾아달라니.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역시 당신은 들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무슨 의미죠?”
“외지인이 아니고서야 저를 이렇게 다정히 대해줄 리 없으니까요. 이 마을 토박이들… 아니. 10년 전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은 전부 저를 피하죠. 마치 제가 금기라도 범한 것처럼요.”
“…….”
조세핀은 어쩐지, 조금. 아주 조금 이 여자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눈앞에 있는 것은 ‘어머니’이다. 쌀쌀맞게는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게 설령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어머니라고 해도.
“성공하면 보수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드리지요. 그만큼 이번에 제가 드리는 의뢰는 확실하게 성공해주셨으면 합니다.”
전 재산. 그 말에 조세핀은 저도 모르게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경악할 뿐이었다.
‘아무리 딸에 미쳤어도 그렇지 제 전 재산을 걸 정도라니. 보통 미친 여자가 아니구나.’
한편으로는 이 여자의 모성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딸을 생각할 수 있는지. 이런 사람이 어머니라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을 접어두고, 조세핀은 스키조 부인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스키조 부인의 의뢰는 마을 사람 모두가 쉬쉬하는, 그녀가 미쳤다는 소릴 듣는 이유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면 분명 마을 사람들도 저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하면 ‘탐정님’ 소리를 듣게 되는 것도 그리 멀지 않겠지.
스키조 부인을 배웅하고, 조세핀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듯 한쪽 얼굴을 쓸어보았다.
‘정리해 보자. 남편을 사고로 잃고 유일한 핏줄인 딸에게 집착하는 부인. 그리고 그 부인의 딸을 데리고 도망친 게 이웃집 여자…. 어떻게 된 게 죄다 여자들하고 엮이는 거지 그 딸은…? 미오 D. 애스터. 넌 대체 뭐냐? 사실은 딸로 키워진―’
거기까지 불경한 생각이 미쳤을 즘, 어느샌가 조세핀의 옆에서 "여어~" 하고 운을 띄우며 억양이 강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면, 그곳에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짧은 금발에 푸른 눈. 양 뺨에 주근깨가 살짝 있고 크게 펌이 들어간 곱슬 앞머리를 2 대 8로 넘긴 그녀는 이 마을의 보안관 셰리 윌리엄이다.
“오늘도 꼬맹이들 고양이 찾아줬다며? 이야~ 우리 탐정님 정말 고양이 전문 탐정이신걸~?”
“…놀리러 온 거면 그냥 가주시겠어요, 보안관님?”
“놀리러 왔다니.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지. 우리 탐정님은 이게 농담인지 아닌지까지는 아직 잘 모르시나? 추리력이 좀 부족한 것 같은데?”
“…….”
조세핀이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자, 셰리는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가슴께까지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세핀을 바라보았다. 워워. 진정하라고.
“다름이 아니고. 방금 다녀간 여자 말인데.”
“의뢰를 받지 말라는 거라면 이미 늦었어.”
"어차피 선금받은 건 아닐 것 같은데. 거절하는 게 좋겠어."
“하… 이거 웃기네. 이봐. 남의 돈벌이에 신경 쓰지 마시죠. 날 먹여주고 키워줄 거 아니면?”
“바꿔 말하면 먹여주고 키워주면 그 의뢰는 안 받겠다?”
“말이 안 통하는군….”
“안 봐도 뻔해. 그거, 딸에 대한 의뢰지? 이건 권유가 아니라 경고야. 그 의뢰는 받지 마. 알겠어? 친구 이전에 너도 여기 주민이고. 나는 직업상 이 마을 주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러니 그 의뢰는 거절해.”
조세핀은 셰리의 말을 가만 듣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마을의 주민을 지킨다고. 무엇으로부터? 그 여자로부터? 이봐. 그 여자도 미친 여자 이전에 이 마을 주민 아니야?”
“…….”
“그 여자, 나한테 와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이젠 부탁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대. 그렇다면 보안관인 너희나 경찰이 죄다 부탁을 거절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입주 3년 차 외지인인 나보다 토박이 마을 주민을 등한시하는, 이게 지금 맞다고 생각해? 너, 거기에 그 일가와 생판 관계없는 제삼자가 엮인 건 알고 있어? 그 사람은 주민아냐?”
“…그래. 알고 있어. 그래서 그렇게 지적하면. 뭐… 내가 솔직히….”
“그리고. 말 나온 김에 10년 전 애스터 가의 일이나 제대로 알려주고 가는 건 어때? 전입 3년차 나보다 그 여자를 내쳐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라면―”
뒷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셰리가 조세핀의 멱살을 잡아 올렸기 때문에.
“…윽!”
셰리보다 5센치는 작은 조세핀은 발끝으로 겨우 셰리의 손으로부터 버틸 수 있었다. 셰리는 그런 조세핀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숨만 거칠게 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5분 정도 그 상태가 지속되는가 싶더니, 셰리가 거칠게 떠밀듯 조세핀의 멱살을 놓았다. 덕분에 조세핀은 바닥에 내팽개쳐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악! 젠장, 아프잖아. 이 자식…!”
“…그건 단순히 말할 수 없는 일이 아니야.”
“뭐?”
“나는 그때 그 일을 직접 봤어…. 너는 상상도 못 할 광경을…. 덕분에 나는 보안관이 됐지만, 머리맡에 총을 두지 않고는 밤에 잠을 잘 수도 없게 됐지.”
셰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조세핀은 주저앉은 채로 셰리가 쥔 주먹에 피가 몰려 붉어진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공포에 질리게 한 건지, 지금의 조세핀은 알 리가 없었다.
“그건 단순히 미친 여자가 아니야. 우리 모두의 악몽이지. 네가 아직 이성이 작동하고 있다면, 의뢰는 받지 마. 미스트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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