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악산맥을 처음 방문하는 외부인 열에 아홉은 새빨간 땅이 불길하다며 처음엔 흙을 밟는 것조차 꺼리곤 했다. 오염지대라는 멸칭을 얻고선 그 편견은 더욱 강해졌다. 주술사 자양화는 그 다수에 속하지 않았다. 더는 오염지대에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마부를 설득하던 비연을 잡아당겨 마차에서 내리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이를 향해 그는 되려 비웃음을 날렸다. “겁만 많
오찬 식사는 간단히 주먹밥으로 이루어졌다. 모여 앉은 여섯 명 중 말문을 먼저 튼 건 온유였다. “그런데 소항에서 출발하셨다고 했는데, 왜 남대교를 건너오기로 하셨나요? 홍악산맥으로 가는 길이라면 북대교를 건너는 게 빨랐을 텐데요.” “저도 처음에는 진로를 그리 짰습니다만, 채경 형님이 고성을 거쳐 가는 길보다는 돌아가더라도 이쪽이 나을 거라 하시더군요.
밤늦게까지 이어진 수다에 일행은 아침에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다. 마차에 오르며 가람은 은근슬쩍 소명에게 이것도 네 도령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부린 수작이냐며 물었지만, 돌아온 건 황당하다는 눈빛이었다. “대체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채경 공이 검술 이야기를 꺼내자 가장 신나서 떠든 건 언니였잖아요.” 그건 그랬지. 가람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엇부터 얘기해 드릴까요? 스승님의 제자로 들어간 이야기부터요? 그거야말로 정말 별것 없는데…. 스승님을 만나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스승님에게 넣은 의뢰였어요. 귀한 도자기를 고성으로 유통해야 했는데, 주술사가 소유했던 것들이라 사람에게 해가 없다고 보증을 받아야 했거든요. 마침 소항에 방문했던 스승님이 적절한 가격에 의뢰를 받아주겠다고 하셨죠.” 그때
태천상단의 장녀가 손아래 여동생에게 급보로 보냈던 서신의 내용은 강렬하리만치 느긋했다. 소명 보아라. 소항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은 잘 받아보았다. 삼은고개를 떠나기 전에 네가 이 편지를 받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언니 된 도리로 알려야 할 용건이 있어서 붓을 든다. 이연상단이 새 거래를 트려고 홍악마을에 사람을 보낸다고 한다. 사절단원의 신원은
세상 잘났던 주술사 자양화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한 일은 그날 비연이 오염지대로 떠나겠다는 걸 말리지 못한 거였다. “도대체 그 저주받은 땅에 왜 자진해서 가겠다는 건데?” “몰라서 물으시는 거 아니잖아요.” 자양화는 제 앞에 반듯하게 무릎 꿇고 앉은 비연을 노려보았고, 비연은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사나운 보라색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양화를 처음 찾아왔을
“끝까지 거절당했는데도 용케 제자로 들어갔네요.” 가람의 회상을 듣던 온유가 중얼거렸다. 가람이 피식 웃고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동생 많은 장녀로 살아남으려면 무엇에도 밀리지 않는 기개가 필요한 법이거든. 스승님도 결국 두 손 들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지.” “아마 오래가지 않아 싫증 나서 스스로 돌아가리라
가람이 산에서 곰을 만난 건 열두 살 아이였을 때였다. 삼은고개를 이루는 산은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맹수를 마주칠 일이 없었으나, 멧돼지나 곰이 산 아래턱까지 출몰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었다. 보통 약초꾼들이 그 흔적을 먼저 발견해 마을 전체에 경고령을 내렸고, 사냥꾼들이 지대 전체를 수색하고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릴 때까지 마을 주민들은 산 출입을
일찍 잠자리에 든 온유를 깨운 건 갈증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긴장하거나 마음이 편치 않을 때면 목이 타는 증상을 겪었기에, 온유는 익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을 집이 아닌 타인으로 가득한 낯선 장소에 머물렀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가람네의 호의가 감사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온유는 혼자가 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었다. 물 주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