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귀가 먹먹해졌지만 오스카에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남자의 말이 오스카의 귓바퀴에서 뱅뱅 돌았다. 짧은 문장이지만 오스카의 뇌가, 18년간의 상식이 그것을 거부해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마침내 이해한 오스카는 온 얼굴의 구멍을 확장하며 멍청하게 되묻는다. "네?" 오스카는 지금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스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10학년 미술사 수업 시간 때 배운 것이 뇌리를 스쳤다. 스탕달 신드롬, 뛰어난 예술 작품을 봤을 때 충격으로 혼란, 어지러움 등의 증상이 생기는 것으로 그 당시 오스카는 그저 지나치게 사고가 드라마적인 사람들이 과장하는 것이라고 비웃었었다. 하지만 오스카는 약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개념을 확실
해당 소설 속 등장하는 이야기는 전부 허구이며, 작 중 인물의 사상과 작가의 사상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https://youtu.be/rz1zBDdm56Q?feature=shared 입시가 끝난 12학년의 겨울방학은 지나치게 평온하고 지루했다. 특히 작은 영화관이나 공원, 4층짜리 쇼핑몰이 전부인 빌어먹을 지루하고 작디 작은 마을이라면 더더욱. 그
0. 우리는 모든 생에서 조우했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말 것임을 알았다. 음울하고 조도 낮은 색채가 자꾸만 시선에 걸렸다. 눈꺼풀 사이에 갈고리를 끼운 듯 여러번 주의를 끌던 얼굴이 이내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험난한 시대였다. 목숨을 챙기기 급급한 곳에서 사랑은 사치였고 나는 사제관계라는 말 뒤에 숨어 마음을 감췄
유이경은 오늘 강의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밖으로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땡땡이였다. 강은재는 조금 의아했다. 물론 수업에 출석하는 이유는 하나고, 땡땡이를 치는 이유는 수만 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강은재는 조금 이상한 이유를 떠올렸다. ‘혹시 자기랑 같이 다니는 모습을 안 보이려고 먼저 나간 걸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지
그날 저녁, 강은재는 출근을 했다. 그런데 가게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번씩 흘긋 쳐다보는 듯했다. 그럭저럭 말을 섞고 지내던 선수 하나가 말없이 어깨를 토닥이고 가기도 했다. 그때 마담이 손짓으로 강은재를 불러냈다. 강은재는 마담을 따라 사무실의 소파에 앉았다. 마담은 따뜻한 카모마일 차 한 잔을 강은
유이경이 나간 뒤, 강은재는 부엌에서 조심스럽게 집을 둘러보았다.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유이경의 집은 정말 넓었다. 유이경네 집으로 경영학과 전체가 엠티를 와도 될 정도였다. 이런 집을 펜트하우스라고 하던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는 정말로 돈이 많은 것 같았다. 신세를 졌으니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인 없는 집을 여기저기 뒤
이것이 간밤에 벌어진 일의 전말이었다. 유이경은 조금 후회했다. 뭐하러 깰까 봐 조심조심 했을까. 깨든 말든 확 올려서 옆구리를 볼걸. 강은재가 놀라며 일어나면 ‘한번 어떻게 해 보려고 그랬다’고 말했어도 됐을 것이다. 어차피 강은재도 제 소문을 들었을 테니 그런 멘트를 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겠지. 괜히 미적거린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이
강은재는 이상한 꿈을 꿨다. 꿈에서 그는 결국 유이경의 집 가사 도우미로 일하게 됐다. 유이경의 집은 어둡고 방이 많았다. 그는 어느 방의 문 앞에서 말했다. 너는 모든 방에 들어갈 수 있지만, 이 방에는 절대 들어가선 안된다고. 하지만 오랜 동화가 그렇듯, 들어가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야 이야기도 진행된다. 그래서 강은재는 문을 열었다. 그 방에는 진
폭탄주는 더럽기도 더러웠지만 양이 상당했다. 그러나 유이경은 숨 한번 돌리지 않고, 또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그걸 한 번에 마셨다. 강은재를 비롯한 모두가 크게 오르내리는 그의 목울대만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상황을 모르던 테이블에서도 이쪽을 보고는 수다를 멈추었다. “뭐야, 뭔데?” “저 선배가 과대 흑기사 해준다는데.
강은재는 수업을 마치고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벗어놓고 작은 침대에 낑겨 눈을 붙이려는데, 유이경이 했던 말이 첫 글자부터 마침표까지 빠짐없이 재생되었다. 그는 갖은 애를 쓴 끝에 겨우 잠들었다. 그런데 저녁 10시가 되어 눈을 뜨자, 그 순간부터 유이경이 한 말이 도돌이표를 그리며 다시 머릿속에 울렸다. 샤워를 할 때도, 버스를 타고
등나무 벤치에서의 대화 이후로, 강은재는 유이경이 입고 다니는 코트와 비슷한 옷자락만 봐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을 떠벌리고 다닐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기에게 빚을 졌다는 말도 반쯤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가 ‘뭘로 받을지 생각해 보겠다’로 끝나버린 탓에, 유이경을 보기만 하면 그가 대체 뭘 달라고 할지가 신경쓰
“화석이 있군 그래. 1학년 강의를 또 듣고 있나? 내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던가?” 출석을 다 부른 뒤 교수가 나름대로 농담을 했다. 강의실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강은재는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유 실장’은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이 강의실에 ‘화석’이 몇이나 있는지는 몰라도 유 실장이 화석인 건 확실했다. 그의 이름은 ‘유이경’이었다
낯선 향 다음으로 도착한 것은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들어섰다. “네, 박 실장님. 그러면 R2룸 비워주세요. 지금 보낼게요.” 그 남자는 말하는 도중에 강은재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고 눈을 마주쳤다. 아마도 가만히 있으라는 뜻 같았다. 그리고 남자가 말하는 ‘박 실장’은 이 호스트바의 마담이었다. 마담이랑 아는
축축한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눅눅한 먼지 냄새는 언제나 뭔가가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지만, 그 사람은 가벼운 먼지 만큼이나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따뜻한 추억을 가질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잉게르는 마법으로 작은 빛 덩어리를 만들어 두 사람 주변을 둥둥 떠다니게 했다. 맥스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구체를 보며 순진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시원하게 날렸다. 마
맥스는 찬찬히 뒷걸음질 쳤다. 아주 느릿하게 일어나고 있는 저 코볼트가 금방 이라도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잉게르라고 했던가? 그래, 아주 귀족처럼 귀티가 묻어나는 얼굴이다. -... ...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야, 여기..돌려줄게. 난..오늘 아무것도 못 본 거니까... -당연히 아무것도 못 본 거겠지..! 잉
해가 진 뒤 하나둘씩 켜지던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어느새 길거리를 가득 채웠다. 낮에 보는 네온등은 때와 먼지가 덮여 구질구질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밤이 되면 불타오르듯 빛나며 벌레부터 사람까지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한편 쓰레기와 담배 냄새, 젊은이들과 취객들이 넘쳐나는 구도심 번화가를 벗어나 8차선 대로변으로 나오면 또다른 풍경이 나왔다. 일반 빌
“네가 그걸 왜 갚아. 내가 쓰고 싶은 데에 내 돈 쓴 건데.” “…선배 진짜 미쳤어요?” 사채빚 때문에 호스트바 웨이터로 일하는 강은재는 업소에서 우연히 사채업자 유이경을 만난다. 그런데 그가 뜬금없이 학교 선배로 나타나더니, 이상할 정도로 호의를 베풀기 시작한다. 이건 그저 돈 많은 사채꾼의 변덕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 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