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밤

[BL/낮밤] 1화

바둑이? 이름도 어쩜.

INTERLUDE by 렌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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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 뒤 하나둘씩 켜지던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어느새 길거리를 가득 채웠다.

낮에 보는 네온등은 때와 먼지가 덮여 구질구질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밤이 되면 불타오르듯 빛나며 벌레부터 사람까지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한편 쓰레기와 담배 냄새, 젊은이들과 취객들이 넘쳐나는 구도심 번화가를 벗어나 8차선 대로변으로 나오면 또다른 풍경이 나왔다.

일반 빌딩이라기에는 기묘하게 화려한 건물 앞으로 여자며 남자들을 태운 밴이 수시로 오갔다. 고급 차량도 마치 경쟁하듯 쉴 새 없이 지하주차장을 드나들었다.

넥타이까지 갖춰 맨 수트에 코트를 걸친 남자가 소란스러운 건물을 빙 돌아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길에 선 그는 낡은 지포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봄이라곤 해도 밤바람의 매서움은 겨울에 더 가까웠다. 남자의 얼굴은 하얀 담배 연기에 잠겼다가 다시 나타나길 반복했다.

허공을 보며 담배 몇 모금을 태우던 남자는 어둑한 골목 안에서 불야성인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쉴새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훑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이.

그때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남자는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 유이경 너 이 새끼, 경찰을 아주 흥신소로 알지.

핸드폰 너머의 남자가 다짜고짜 거친 말을 뱉었다. 유이경이라고 불린 남자는 상대의 험악한 말투에도 별로 놀라지 않은 듯했다. 그는 살짝 웃으며 담배 연기를 흘렸다.

“어떻게 흥신소를 경찰에 비벼요. 흥신소보다 실력 좋은데.”

— 어이구…. 말을 말자. 아무튼, 사진 받았지? 너는 그런 애 있냐고 업소에 확인해 봤어?

“그러면 사람 찾는다고 광고하는 것 같잖아요. 직접 확인하려고요. 마침 우리 회사 돈 빌린 가게라. 마담이랑 안면도 있고.”

— 신기하긴 하다. 이번 ‘강은재’는 너랑 동선이 많이 겹치네. 그래도 아닐 것 같은데…. 에이, 난 모르겠다. 삽질 열심히 해라.

“네— 삽질하러 갑니다.”

전화를 끊은 유이경은 반만 태운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넣어 끄고는 옷깃을 정돈했다. 이 골목처럼 좁은 공간에 있으면 공기까지 희박해지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업소에서 내놓았을 병이며 쓰레기에서는 독한 알코올의 향이 났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온몸에 덮여 있던 그림자가 골목 바깥의 빛에 서서히 잡아먹혔다. 그는 곧 소란스러운 빛과 떠들썩한 향락 속으로 녹아들었다.

***

달력은 봄으로 넘어갔지만 날씨는 따뜻해질 기미가 전혀 없었다. 다만 햇빛만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대형 강의실에 아침 햇빛을 받은 먼지들이 천천히 떠다녔다. 먼지들은 햇빛이 비치는 곳에서는 반짝 나타났다가, 그늘진 곳에 들어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월요일 9시가 전필이라니 진짜 미쳤음.”

“나 출석 못해서 F 맞을 거 같애. 오늘도 겨우 일어났다.”

강은재는 졸음이 쏟아져 친구들의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사실 대화에 낀다고 해도 말수가 적은 편이라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지만.

월요일은 특히 더 피곤한 날이었다. 그가 하는 알바는 밤에, 그것도 주말에 가장 바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은재는 사회 활동은 포기하고 책상에 엎드린 채 부족한 잠을 조금이나마 채워보려 했다.

강은재가 호스트바에서 웨이터 일을 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됐다. 강은재의 얼굴과 덩치는 그 가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매상을 올릴 수 있을 만했다. 하지만 성격은 호스트바는 고사하고 어느 서비스직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표정 변화가 별로 없었으며 말을 꾸며서 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도 접객업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호스트바에 면접을 본 이유는, 뻔하다. 돈 때문이었다.

그가 찾아본 알바 자리 중 불법과 사기인 곳을 전부 거르고 나면 호스트바 웨이터가 돈을 가장 많이 줬다. 강은재가 면접을 본 업소는 호스트바 중에서도 꽤나 고급스러운 곳이었는데, 마담은 강은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위아래를 한번 훑어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 얼굴로 뭘 면접씩이나 봐. 합격.”

가게까지는 1시간을 들여서 왔는데 면접은 3초만에 끝났다.

하얀 티셔츠에 옅은 핑크색 투피스 수트를 입은 마담은 무슨 연예인 같았다. 그런데 본인이 연예인같이 생긴 마담이 강은재의 외모를 한참 칭찬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웨이터 말고 선수는 생각 없어? 이 사이즈는 딱 선수를 해야 되는 사이즈인데.”

강은재는 이 얘기를 듣고 있다가 가만히 물었다.

“죄송하지만, 선수가 뭔가요.”

“…….”

마담은 이마를 짚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다른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딱 보니까 너는 끼가 없다. 일단 웨이터로 하자.”

하지만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차차 배우면 되겠지.”

그렇게 강은재는 순조롭게 일을 구했다. 손님들은 선수도 아닌데 얼굴이 반반하고 어린 강은재를 흥미로워했다. 술을 서빙하러 온 강은재를 잠깐 옆에 앉혀 두고는 선수보다 팁을 더 주는 일도 있었다.

강은재는 그런 일이 생기면 다른 선수들에게 미운털이 박힌다는 걸 곧 깨달았지만, 그 돈을 안 받을 수도 없었다. 정말로 돈이 절실해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운털은 박혔다가도 곧 빠졌다. 강은재는 인사를 깍듯하게 잘했다. 조부모님 아래에서 자라며 몸에 밴 태도였다. 잘생긴, 시키는 일은 군말없이 하는, 인사를 잘하는, 그리고 빈말을 전혀 못해서 가끔 어수룩해 보이기까지 하는 강은재를 마담부터 손님들까지 가게의 모두가 꽤 좋아했다.

아무튼 강은재는 정말이지 교수님이 들어오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하지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자꾸만 바늘처럼 머릿속을 찔러 잠을 깨웠다. 뇌에 무슨 오류라도 난 것처럼, 어느 남자가 등장하는 한 장면이 자꾸만 반복 재생되었다.

강은재가 일하는 가게는 룸만 해도 서른 개가 넘고 선수들의 외모도 평균 이상인 고급 업소였다. 강은재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담과 선수들은 이 가게가 ‘정빠’라는 데에 자부심이 꽤 있었다.

그래서인지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도 대체로 점잖게 놀고 가는 편이었는데, 어제는 좀 달랐다. 한번 놀았다 하면 현금으로 몇 천을 뿌리는 VVVIP이자 진상이 왔다. 돈을 그 정도로 뿌리는 게 아니었다면 가드에게 백 번은 더 끌려나가고 블랙리스트에 천 번은 더 올랐을 것이다.

그 손님이 마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가게에 입성했을 때, 강은재는 약간 넋이 나가 있었다.

방에 술을 들고 들어갈 때마다 ”이런 얼굴이 왜 선수를 안 할까?”, “잠깐만 앉았다 갈래?”, “너 이 테이블에 묶으려면 얼마 줘야 돼?” 같은 소리를 듣고 거절하느라 진이 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 넋 나간 표정을 밖에서 보면 섬세한 표정 연기가 들어간 패션 화보 같았다.

VIP 손님은 트레이를 미는 강은재와 스치면서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아마 그때부터 오늘 제대로 진상을 부리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게에 있는 선수들을 전부 보고도 초이스를 하지 않았다. 그녀와 같이 온 친구들도 까다롭긴 마찬가지였다.

마담까지 나와서 선수들을 겨우 옆자리에 앉혔나 싶었는데, 그 뒤로는 선수들이 10분에 한 명씩 방에서 내쫓겼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오는 선수들은 하나같이 썩은 표정으로 욕을 뱉으며 나왔다.

그때쯤 됐을 때 마담이 눈치를 챘다. 아까 강은재와 스쳤을 때 그녀의 표정이 떠오른 것이다.

“은재은재, 4번 룸에 서비스 드려.”

“4번은 영호 형 담당인데요.”

“가라면 가세요~”

웨이터는 보통 손님이 집에 갈 때까지 한 테이블, 혹은 한 방을 책임진다. 강은재는 나중에 다른 웨이터의 테이블을 뺏었다는 원망을 들을까 봐 다시 물어본 거였다. 하지만 마담은 막무가내로 그 진상이 시키지도 않은 안주를 강은재 손에 들려보냈다. 그런데 강은재가 문을 열었을 때—

콰직!

문을 열자마자 옆의 벽에 글라스가 부딪혀 깨졌다. 강은재는 몸을 살짝 웅크려 파편을 피했다. 가까스로 안주를 지키기는 했지만 유리 조각이 들어갔을 것 같았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선수와 손님이 싸우고 있었다. 이런 가게에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 누나. 적당히 좀 하자!”

“누가 니 누나야? 우리가 엄마가 똑같냐? 그리고 사장님이라고 해, 새끼야.”

손님은 선수의 뺨을 툭툭 치면서 한 마디씩 씹어뱉었다.

“그러면, 돈을, 꽁으로, 벌려고 했어?”

이 손님의 방에는 친구 서넛이 더 있었다. 하지만 이 꼴을 보면서도 킥킥대며 옆에 앉은 선수를 잡고 늘어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테이블을 보니 밀가루를 뿌린 것처럼 하얀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딱 봐도 술병으로 무슨 약이든 빻아서 섭취하신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술병이 깨진 파편과 안주가 뒤섞여 흩어져 있었다. 이미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한풀 꺾인 게 지금 상태인 듯했다.

“해준아, 그만해. 누나도 좀 진정하세요.”

결국 보다 못한 다른 선수가 나섰다. 그는 시비가 붙은 선수와 손님을 서로 떼어놓으려 했지만, 손님은 팔을 쳐내고 테이블을 발로 찼다. 술병 몇 개가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강은재는 바로 무전기 이어폰에 “b4 클레임”이라고 말한 뒤 일부러 손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치즈 플래터 서비스 나왔습니다.”

하지만 손님은 못 들은 것처럼 자기 할 말만 했다.

“나는 이거보다 더한 것도 하면서 돈 벌었어. 왜 니네는 못 하는데?”

“아니, 할 만한 걸 시켜야 하지.”

“그래? 내가 못할 거 시켰나 한번 보자. 야, 너!”

손님은 치즈 플래터를 든 강은재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강은재의 명찰을 읽었다.

“바둑이? 이름도 어쩜.”

“아, 누나. 쟤는 그냥 웨이터야.”

“너한테 말했냐? 니가 안 할 거면 닥치고 있든가, 꺼지든가.”

강은재의 편을 들어주려 했던 선수는 결국 “씨발” 하고 욕을 뱉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다른 선수들은 손님 친구들의 주정을 받아주며 강은재에게 입 모양으로 벙긋거렸다. 가드와 마담을 불렀는지 묻는 거였다. 강은재는 최대한 손님에게 티가 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아.”

“네.”

“대답 크게 안 해?!”

손님이 난데없이 강은재를 부르더니 고함을 질렀다. 룸은 대체로 방음이 잘 되지만 문이 열리면 소용없다. 과열된 소음이 밖으로 확 퍼졌다. 복도를 지나던 손님이나 다른 방에 있던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기웃기웃 몰려들었다.

“여기까지 기어 와서 꼬리 흔들어 봐. 귀엽게 잘 하면 백 만원 줄게.”

강은재의 장점이자 단점은 표정 변화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듣고도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솔직히, 강은재는 아까 방을 나간 선수가 이걸 못 해서 그렇게 화를 냈다는 게 의아했다. 까짓것 기면 되는 거 아닌가? 키가 180이 훌쩍 넘는 자신이 강아지 흉내를 낸다고 해서 귀여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설령 백 만원이 그냥 던진 말이라 하더라도, 저 난폭한 손님을 진정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강은재는 몸을 숙여 치즈 플래터를 내려놓았다. 바깥에 몰려든 사람들, 방 안의 선수와 손님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는 괜찮았다.

그런데 강은재의 차분함이 손님에게는 다르게 와닿은 모양이었다.

“이제 웨이터 같은 것도 나를 무시하네….”

손님은 부들부들 떨며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와인병 하나를 들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엄청난 파열음이 울렸다.

“꺄악!!”

“저기요!”

“대박이다….”

여기저기서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남은 와인이 흩뿌려지자 이 난장판은 이제 살인 사건 현장처럼 보였다.

“말로 할 때 기어.”

손님은 이제 툭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해버릴 듯했다. 게다가 손에 흉기까지 들렸다. 강은재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말한 대로 기어갈 준비가 만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집중된 시선,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 깨진 병을 들고 다가오는 여자…. 강은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때였다. 강은재의 뒤, 룸의 문 밖에 모인 사람들을 누군가가 헤치고 오는 듯했다. 청량한 향이 먼저 도착해 코끝을 스쳤다. 그 향은 술과 약, 짓뭉개진 음식과 여러 향수 사이에서도 정확하게 후각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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