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ㄹㄱㅇ

집여우 취급 주의

ㄷㅊ / 123 / ㄱㅎㄱ X ㅈㅈㅎ

Tik Tak Tok by OR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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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끝으로 덧그리는 박자

잡고 있어줘 지금만큼은

모든 걸 잊어버리고

나만을 사랑해줘

/ Abyssmare <Take Me On>

…… 망했다.

그냥 그 생각부터가 먼저 들었다.

휴가철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나. 정지훈이 그걸 해냈다. 기침 하는 것도 힘든 볼멘 소리가 방에 울려퍼진다. 코를 훌쩍이면서 지훈은 과거의 자신을 저주했다.

“X발……….”

발단이 뭐였더라…. 원래 감기라는 게 갑자기 찾아오고 그러는 거지만, 이번만큼은 원인을 알 것도 같았다. 아니, 명확했다. 월즈 끝나고 미쳤다고 술 취해서 숙소에서 옷 벗고 돌아다니고…. 그 뒤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또 밖에 많이 싸돌아 다닌 것도 맞다. 연습도 없는데 여기 짱박혀 있어서 뭐하나. 또 월즈 8강이라는 애매한 성적에 지훈은 크게 아랑곳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인지라 분한 건 어쩔 수 없었으리라. 이 폼으로 본선 간 게 더 대단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맥주 마시는 손은 멈추지 않던지. 근데, 나는 항상 잘했는데…. 술을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서 벌 받은 거다. 에엣취! 콜록, 콜록…. 이런데 코로나가 아니라니, 그건 그거대로 기적이다.

거 아무나 없소?

있을 리가 없는데 괜히 이불 덮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조하듯 껄껄껄, 하는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또 잠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저녁 때가 다 지나가있었다. 프로게이머의 낮은 지금부터인데, 무슨 놈의 감기가 이렇게 독한 건지 의자에도 못 앉겠더라.

유독 춥게 느껴졌다. 날은 조금 풀려있었는데, 열 때문인 건지 온갖 살갗에 오한이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지훈은 이불 밖으로 눈만 빼꼼 내놨다.

“…진짜 아무도 없냐고오….”

에휴, 내가 왜 이래. 지훈은 혼자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약기운이 떨어진 건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어지러움이 엄습했다. 결국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으며, 방바닥에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뻗은 정지훈과 아무렇게나 펼쳐진 이불이 나뒹굴게 되었다. 이불과 같이 침대에서 떨궈진 휴대폰이 지훈의 정강이 위로 떨어져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정면에 형광등이 보인다.

“…씨이발…….”

왜 이렇게 서럽지? 별 거 없는데…. 이게 다 감기 때문이다. 외로운 것도 감기 때문이고, 솔랭에서 연전연패하는 것도 감기 때문이고, 어지러운 것도, 휴대폰 액정에 방금 금이 간 것도 다 감기 탓으로 돌렸다. 실제로 맞지 않나?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화나지 않았을텐데. 그런 걸 이성적으로 생각할 뇌세포가 지금 남아있을 리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밥을 먹지 않은 지훈에게는 혼자 날뛸 힘조차 없었다. 진짜 무슨,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바보처럼 한참을 누워있었다. 체감상 몇 십 분을 멍하니 천장이나 바라보면서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별안간 별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됐다. 밥이나 먹자. 에이씨, 하고 새어나오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과 이불을 침대 위에 대충 올려두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아직 키를 잡지 못한 균형감각과 함께 발을 몇 걸음 내딛으며 방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면―

“아악!”

그런 비명소리를 내뱉고 나니 다시 시야가 흐려진다. 뭐에 부딪힌, 부딪힌 거 같은데? 딱딱한 거, 아오 아파. 부딪힌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휘청거리다가 또 앞으로 몸이 기울어진다. …다행인 건, 그대로 안면을 바닥이나 벽에 박지는 않았다는 점인데….

“…너 뭐해?”

바로 귓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아리 없는데 얼척 없다는 듯한 이 말투…. 지훈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 목소리의 주인은 또렷히 인식할 수 있었다.

“…뭐야, 혁규 형이 왜 여기….”

“뭐긴 뭐야, 너 상태 어떤가 볼려고 왔지. 떨어져, 감기 옮겠다….”

그제서야 지훈은 자신이 앞으로 기대고 있는 대상이 김혁규라는 걸 알아차린다. 황급히 물러나려고 했지만 머리가 무거운 탓에 큰 덩치를 요란하게 움직이며 허우적 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제법 웃긴 건지 뭔지 혁규는 헛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지훈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런 헛웃음도 잠시간이었고, 혁규에게서 웃음기가 점차 사라져갔다.

“너…, 열 왜 이렇게 많이 나.”

“어, 어? 열 나? 춥, 춥긴 한데.”

“약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냐? 이런 몸으로 어딜 나돌아다니겠다고….”

“몰라, 자기 전에…. 아니, 형 뭐해. 잠시만,”

혁규는 지훈을 다시 침대에 앉혔다. 어질러져 있는 이불을 탁탁 펴고는 누우라는 눈짓을 했다. 지훈은 그대로 입만 뻐끔뻐끔 거렸다 뿐이지 중간 중간의 콜록콜록 소리 때문에 말은 나오지도 않아서 무기력하게 눕혀졌다. 아니, 기다려보라니깐?!

“걍 다시 자라…. 약은 내가 가져올 테니까……”

“형, 나, 나….”

“환자가 말을 하네….”

“…… 배고파….”


똑, 똑, 똑. 지훈이 대답 대신 기묘한 곡소리를 내면 혁규는 천천히 문을 열고 플라스틱 통과 수저, 물컵을 들고 방에 들어섰다. 그걸 그대로 눈으로 좇는 지훈의 안색은 혁규가 방을 나서기 전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연신 기침을 해대는 지훈의 목에서 피맛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죽 사왔으니까 먹어.”

“…아, 웬 죽…. 더 맛있는 거 없어?”

“말이 많네…. 먹지 마라 그냥.”

“죄송….”

바닥의 탁자에 그것들을 내려 놓은 혁규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지훈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고 인상도 찌푸린 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애는 애네…’ 같은 생각이 들어버리는 게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숟가락을 건네 받은 지훈은 죽을 한 숟갈 떠서 호 호 불어 입에 넣더니 혀가 데여가지고는 금방 빼버렸다. 무슨 고양이야?

“허무흐거워….”

“그냥 먹어.”

그렇게 방에는 한동안 지훈이 죽을 떠먹으며 식기들이 서로 맞부닥치는 소리만이 울렸다. 김혁규는 폰을 보면서 간간히 지훈에게 “입맛에는 맞냐”, “이제 안 뜨겁냐” 등의 자질구레한 말만 던질 뿐이었다. 지훈은 열감으로 한껏 상기된 볼 안 쪽을 음식물로 채우면서도 흘깃흘깃 혁규를 곁눈질했다. 작은 용기를 다 비우고 나면 약 먹기 귀찮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뻗대는 지훈과 얼른 먹으라며 독촉하는 혁규가 방에 남았다. 어찌저찌 뜨거운 물을 꿀꺽 넘기며 약까지 다 먹고 난 지훈은 그제서야 한결 나아진 얼굴로 침대 등받이 쿠션에 기대는 것이다.

“근데 형 간 거 아니였어?”

멍한 얼굴로 그리 던져봤다. 혁규는 그 질문에 묘하게 눈썹을 움직이며 지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곤, 다시 폰으로 시선을 옮긴 혁규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너 아픈데 어딜 가.”

그 말은 두 사람을 모두 침묵시키기에 충분했다. 지훈의 눈은 혁규의 옆얼굴에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던 혁규는 뒷머리를 긁적이곤 덧붙였다.

“…팀원들 다 본가 갔잖아. 와중에 넌 앓아누워서 어디 가지도 못하고…. 원래 그렇잖아. 아픈 사람을 어떻게 혼자 두겠어.”

나도 아프고.

… 같은 소리도 하였으나 원체 데프트의 어조에는 힘이 없다. 지훈에게 제대로 들렸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 전에도 정지훈의 머릿속에는 이상하게 자꾸만, 아파하던 작년의 김혁규가 맴돌던 것이다. 이번년도라도 다른 건 별로 없었다. 물론 작년보다야 훨씬 관리가 잘 되고 있었지만…, 정지훈은 훔쳐 본 적이 있다. 혼자 숨어서는 숨을 헐떡이던 김혁규의 모습을. 기분 나쁜 탈력, 무력감이 아직도 머리 한 구석에 자리잡혀 있을 정도이다. 혁규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지훈을 옆눈으로 계속 쳐다보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니까, 나간다?”

그 말을 듣자마자 지훈은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더니 급하게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는, 걸음을 떼려는 혁규의 손목을 덥썩 한손으로 붙들었다. 평온한 얼굴로 돌아보는 혁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훈이 무어라 말을 할 때까지 내려다보았다. 손목을 잡고 있는 지훈의 손이 뜨거웠다. 지훈은 쉰 소리를 좀 내더니, 곧 어렵사리 그 말을 꺼낸다.

“…… 안 가면 안 돼?”

아까부터 종종 두 사람의 사이를 침범하는 정적이, 지훈은 너무나도 거슬렸다. 지금 이 시간을 도려내고 싶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던 게 아니였나? 어찌됐든 좋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저 다섯 글자라니, 최악에 가까웠다. 단호한 거절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은 지훈의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뜨겁다.”

순간 지훈의 이마에 비교적,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면 지훈의 시야에는, 김혁규의 얼굴만이 있었다.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어느새 혁규의 손목을 붙잡던 지훈의 오른손에는 힘이 풀려있었고, 대신 그 손등을 혁규의 왼쪽 손바닥이 누르고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바로 앞에 사람의 얼굴이 있으니 자신의 숨결이 얼마나 뜨거운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고르지 못했던 호흡이 더 거칠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혁규는 아랑곳 않고 그대로 자신의 오른손으로 지훈의 빈 손도 잡았다. 손목을 휘감았다. 그걸 자각한 지훈은, 자신의 호흡 뿐만 아니라 김혁규의 입을 통한 공기의 흐름까지 의식하게 되었다. 닿고 있는 세 점의 모든 살갗이 차가웠다…….

“…혀, 형. 감기 옮을…….”

그런 지훈의 경고가 마침표를 찍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지훈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촉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지훈은 남의 숨결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고,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그곳에는 언젠가 자신에게 지어줬던, 김혁규의 부드러운 미소가 있었다.

“푹 쉬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지훈은 아직도 그 손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달라 붙어 있는 듯했다. 그림자는 서늘했는데, 눈동자에는 그 미소가 인두로 새겨지기라도 한 것 마냥 열감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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