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햄] 용설란 (龍舌蘭) - 2/10
1부: 순백의 산신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형원의 별채에서의 기현의 하루는 동이 트고서도 늦게 시작되었다. 궁에서와 달리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 언제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저를 반겼고, 뜰에 나가 산책을 하다 보면 형원이 제 방 창문에서 저를 불렀다. 탕약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투덜거리며 침소로 가서 그가 내미는 약을 들이키고 나면, 형원은 잘했다며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고 불편해서 머리를 털어내던 기현이 그 손길을 당연하다는 듯 받기까지는 꼬박 이레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약을 먹고 나면 그와 함께 늦은 아침상을 들고, 형원이 잠시 별채를 비우면 기현은 방에서 서책을 읽거나 별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내부였으나,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덕에 매번 진귀한 것을 보는 기분이었으리라. 그러다 형원이 별채로 돌아오면 또 탕약을 먹고, 늦은 점심을 들고,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에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면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 그와 특별히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음식은 직접 하는 것인지, 장에서 재료를 구해 오는지 산에서 구해 오는지, 오늘은 무얼 하였는지 같은 소소한 주제들이었다. 이레가 넘는 시간 동안 기현은 간만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어찌 매일 같은 하늘인지, 어찌 매일 같은 온도의 날씨인지.
앞뜰을 거닐던 기현의 발걸음이 별채 뒤로 향하려 하자 저를 뒤에서 붙잡는 손길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면 형원이 빙긋 웃으며 서 있다.
"뒤는 함부로 드나드실 수 없는데."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저와 동행하지 않으면 걸음 하시기 힘들 겝니다."
매일 같은 지루한 하루 속에서 소소한 제약이 늘다 보니 기현은 작게 미간을 찌푸린다. 저 난도 만지지 말라, 별채 안의 방문을 함부로 열자 말라, 뒤뜰도 가지 말라.
"그럼 함께 가시지요."
"뒤뜰을요?"
"저 혼자서는 걸음 하기 힘들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형원은 맹랑한 소년의 엄한 얼굴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겨 멈춰 선다.
"대군께 무얼 보여 드리면 좋을까."
"예?"
간만에 도술을 부리려니 자신이 없긴 한데. 형원은 속내를 작게 속삭이며 굳게 닫힌 뒤뜰의 문을 힘있게 열어 젖힌다. 처음 형원의 별채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먼저 걸음을 하고 비켜 서면, 기현은 그의 눈 앞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다. 매화가 가득 피어난 정원의 바로 뒤로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에 금박 장식이 들어간 기다란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의 끝은 커다란 정자에 이어져 있었으며, 정자는 얇은 천으로 된 가림막으로 장식되어 꼭 어릴 적 이야기책에서 보았던 신선의 그것인 듯했다.
"가시지요."
기현이 멍하니 서 있자 형원은 그의 손을 이끌고 뒤뜰로 들어선다. 형원 자신도 저가 기현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유약한 소년이 아무것도 없는 별채에서 심심하였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내심 미안했기에 그런 것이겠지. 헌데 저렇게 맑은 얼굴로 좋아하는 것에 저까지 기분 좋아지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그의 손을 붙잡은 제 손끝이 약하게 아리다는 것 정도만 느낄 뿐이었다.
"이리 아름다운 곳에 어찌 걸음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대 혼자서는 올 수 없는 곳이기에 그렇지요."
"문만 열면 있는 곳인걸요."
형원은 제 도술로 만든 곳이라 고백할까 하다가 말을 삼킨다. 어차피 갈 사람인데. 헌데, 어차피 갈 사람에게 왜 이렇게까지.
"어, 형원, 어서 걸음을 서두릅시다. 하늘이 흐려진 것이 곧 소나기가 쏟아질 듯하니."
제 손을 이끄는 힘에 근심 서린 기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가 그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고서 아차 싶은 형원이다. 걸음을 서둘러 정자에 들어서고서 기현은 정자 턱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봤다.
"이리 갑자기 날이 흐려질 수도 있다니요. 오늘 도성의 날씨는 어떠하였습니까?"
"비가 내렸습니다."
"기이합니다. 그대의 별채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는데."
기현은 호수에 비친 자신의 옷자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그대의 별채에 온 이후로는 늘 날이 맑았습니다."
"불편함은 없으셨으니 다행입니다."
"헌데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산 아래에는 비가 오고 이곳은 맑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형원은 다른 뜻을 담고 있는 듯한 말에 기현이 내다 보고 있던 호수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러면 기현은 형원과 올곧게 시선을 맞추고서 다시 천천히 입을 연다.
"이곳은 기이한 점이 참 많습니다."
"하여 그대가 즐겁다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형원은 제 속에 짜증이 아닌 근심이 드는 것에 짐짓 당황한다. 그 또한 다른 인간들과 같을까 노파심이 드는 것이다. 인간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왕조차도, 제 도술을 어떻게들 저들의 이익을 위해 써 먹으려 하였으니까. 형원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서 묻는다.
"하시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수풀을 헤치니 호화로운 별채가 나온 것도,"
"…."
"이 산 속에 이처럼 큰 호수가 있는 것도,"
"…."
"인간의 상식 밖의 일입니다."
"해서?"
"그대는… 누구입니까?"
글쎄, 나를 무어라 말해야 할까. 일전에도 믿지 않았던 그대에게. 이제와서 다시 말한다 한들 그대가 믿어 줄까. 형원은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무겁게 입을 연다.
"용설란."
"이번에도 농입니까?"
"믿지 않을 것이라면 왜 묻는단 말인가."
"그야,"
"산 속에 별채를 숨겨둔 것도,"
"…."
"별채의 뒷편에 그대에게 호수를 보여준 것도,"
"…."
"나의 도술 덕에 가능했던 것이다."
기현은 형원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그 어떤 말도 얹지 않았다. 그저 제게 조곤조곤히 말하는 그의 눈에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나라의 왕이 네 번 바뀔 때까지 늙지도 않고, 그저 이대로, 내 뜻과 무관하게, 그저 살아 있을 뿐이다."
형원의 말 속에는 짙은 권태가 서려 있었다. 기현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괜한 것을 그에게 물은 것인가 하는 후회가 떠오를 뿐이었다. 형원은 기현에게 머무르던 시선을 거두고 허공을 응시하며 정자 위에 앉아 비스듬히 몸을 기댄다.
"그대에게 세자가 아니냐 물었던 것은, 내 존재를 아는 이는 왕과 그 왕위를 이을 세자뿐이기에 물은 것이니 혹 기분이 상했다면,"
"아닙니다."
기현은 형원의 옆에 자리하고 앉아 그와 같이 정자의 난간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다.
"만일 제가 세자였다면, 그대를 이리 편히 마주하지도 못했겠지요. 어쩌면, 내 이기로 그대를 부렸을지도 모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니까요."
형원은 허공에 머무르던 시선을 옮겨 기현을 바라본다. 어쩌면 이는 지금껏 봐 왔던 인간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기대와 함께.
"그저 신기하여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못하게 다그치시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하였고."
기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얼버무리듯 말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 가는 것이며, 그 삶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인데 이 자는 그것을 백 년 넘게 이어 갔으니 권태로울 만도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제 머리 위에 얹어지는 손에 기현이 형원 쪽을 바라보면, 아리게 웃고 있는 형원이 있다.
"해서 궁금증을 풀렸습니까?"
"말 편히 하십시오. 저보다 수십 년은 더 사신 분이신데."
"다른 장관을 보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더 귀한 것을 보여 드릴 수도 있으니."
"이번만 볼 수 있는 것이었더라면 그림이라도 그려 두게 종이를 챙겨 올 걸 그랬습니다."
형원은 아까와 같은 눈으로 주변을 눈에 담는 기현을 자신의 눈에 담는다. 매화와 퍽 잘 어울리는 것에 뿌듯함까지 느끼면서.
정자 위에서 까무룩 잠이라도 들었던 것인지, 기현이 눈을 떴을 때는 붉은 휘장이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밖은 어느덧 날이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고, 주위를 둘러 보던 기현은 탁자 위에 올려진 두루마리를 발견한다. 침상에서 내려와 탁자 앞에 앉아 두루마리를 펼쳐 보면, 낮에 보았던 절경이 그대로 종이 안에 담겨 있다. 형원이 직접 그린 것일까, 아니면 그가 도술이라는 것을 부려 매화가 수놓인 호수 위 정자를 종이 위로 옮겨다 놓은 것일까. 기현은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창밖으로 몸을 빼 작은 못을 들여다 보고 있는 형원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침소를 나선다.
세상에 나고부터 궁중법도를 몸에 익힌 데다 몸까지 약하여 평소에 뜀박질 할 생각도 하지 않았건만, 기현은 너무 빠르지 않은 속도로 발을 움직여 한달음에 그의 곁으로 달려간다. 그 짧은 거리를 약하게 뛴 것만으로도 폐부가 터질 것 같기에 기현은 형원의 백의자락을 쥐고 헉헉거리며 숨을 고른다. 형원의 손이 기현의 가슴팍으로 향하고 둥글게 문질러 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호흡이 일정해지는 것에 기현은 그제야 몸을 들어 형원을 마주한다.
"일어나셨네요. 단잠에 빠지시기에 내일 이른 아침에 기침하실 줄 알았는데."
"그대가 직접 그린 것입니까?"
"아, 그렇지요. 다음에도 그와 똑같은 것을 부리기는 어려울 듯하여. 정확히 말하면 옮겨 둔 것으로 해 두지요."
"도술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지난 수십 년간 송장처럼 살았을 테니, 하늘이 내린 선물이지요."
기현은 꼭 하늘에 구름이라도 걷히는 것처럼 서서히 드러나는 별들과 휘영청 뜬 하얀 달을 올려다봤다가, 시선을 옮겨 못 옆에 자리한 용설란 앞에 쪼그려 앉는다.
"고운 눈으로 봐 달라 하셨지요."
"…."
"이 난은 참 곱습니다."
"…."
"꼭 시들지 말고 오래오래 살거라."
형원은 기현의 말이 꼭 자신에게 향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살아라. 스스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
이 지긋지긋한 삶 속에서 끝도 보이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으니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두렵지도 않았기에 매일 죽음만 바래 왔건만. 수십 년을, 백 년 가까이 그리 살아 왔건만. 저 하얀 얼굴이 하얀 빛을 받아 내 잠시 몽롱해진 게지. 그래서 그의 말처럼, 꼭 살아야겠다 생각하는 게지.
달빛마저도 빛을 잃어 가는 야심한 밤, 형원은 쉬이 잠에 들지 못해 홀로 앞뜰로 나와 못 앞에 멈춰 서서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연못 옆에 있는 것과 똑닮은 그 모습에 형원은 시선을 옮겨 푸르게 잎이 뻗어 있는 난 앞에 쪼그려 앉는다.
"참으로 질긴 숨이다."
형원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좋은 말은 해 준 적이 없었다. 이 지독한 삶이 지겨웠기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도 해 보았으나 베어내도 떨어지지 않고, 숨통을 조여도 고통만 더해질 뿐이니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본체를 썰어내려 해 보았으나 하늘이 그 뜻을 막는 것인지 어떤 수도 들어먹지를 않으니 그저 살아 있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살고 싶으냐?"
제 자신에게 물었다. 정녕 살고 싶은 것이냐고. 제 의지로 살아 가고 싶은 것인지, 그저 그가 살라고 해서 살고 싶어진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하긴, 누가 네놈에게 살라고 말해 준 적이 있더냐."
그 오랜 삶을 살아 왔음에도 참으로 씁쓸한 삶이었다. 헌데….
형원은 몸을 일으켜 기현의 침소로 향했다. 자고 있을 소년이 있는 방으로 향하는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던 것은 아마도 이 밤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이었을까.
그의 침소 문을 조심히 열면 일정한 숨을 고르게 내쉬며 깊은 단잠에 빠진 이가 있다. 형원은 기현의 침상으로 다가가 근처에 의자를 끌어 오고선 그 위에 앉아 기현을 빤히 바라본다. 실로 그대는 내가 시들지 않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지, 그러하다면 연유는 무엇인지. 행여나 그 속내가 삐뚤어진 것이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들면서도 바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저 또한 기현이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제 곁에서. 저와 다르게 늙어 가도 좋으니 그 마지막 순간까지.
기이한 일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저 자신보다도 먼저 제게 살라고 말해 준 이에게 마음이 동하니.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형원은 가슴에 커다란 통증을 느끼고는 제 가슴을 부여 잡으며 기현의 침상 위로 엎어진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고통이었다. 욱신거리던 통증의 정도가 갈수록 커짐에도 형원은 행여나 기현이 잠에서 깰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제 입술을 깨물다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낼 뿐이었다. 이 생경한 고통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형원은 이내 눈앞이 아득해지고, 힘겹게 팔을 뻗어 조용히 기현의 손을 붙잡는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세상에 가장 잔인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늘의 뜻임에 틀림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형원이다.
생전 제게 처음 찾아온 이것은, 개화통이었다.
용설란이 드디어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기현은 햇살이 제 눈을 부시게 할 시간이 되어서야 부스스 눈을 뜬다. 이제는 익숙해진 붉은 휘장을 겨우 눈에 담다가 제 오른손에 느껴지는 온기와 압박감이 고개를 돌리면, 제 손을 잡은 채로 제 침상 위에 고개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연분홍빛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손이 잡힌 느낌이 왜인지 싫지는 않아서 왼손을 들어 그만이 가지고 있는 연분홍 머리칼을 괜히 만져 본다. 제 손끝에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지고, 다시 그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손끝에 쥐면 그 작은 기척에 잠에서 깬 것인지 형원이 가만히 눈을 뜨고 기현을 눈에 담는다.
"어찌 그대의 침소에서 잠을 청하지 않으시고."
"간밤에 잠을 설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신 줄 알았더라면 침상을 내어 드릴 걸 그랬습니다."
"탕약 올리겠습니다."
형원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비틀거리자, 기현이 다시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는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괜찮으니 염려 마세요."
형원의 미소가 유독 쓰게 느껴지는 것은 제 착각이었을까. 조심히 제 손을 빼내고서 침소를 나서는 형원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조심히 따라간다.
"어찌 뒤따라 오십니까. 더 편히 쉬시지 않고."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저보다 더 몸이 약하신 분께서 그리 말해 주시니 면목이 없습니다."
"저를 놀리시는 거지요."
형원은 안심하라는 듯 늘 그에게 지어 보이던 웃음을 띤 채 기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앞으로 이레만, 이레만 두고 보는 것이 좋겠지. 늘 고대하던 죽음이었으나, 그대로 인해 살고 싶어졌으니. 조금만 욕심을 부려 그대를 내 곁에 두고 후에는 그대를 보내는 것이 맞겠지.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테니. 그럼에도 내가 그대를 그리고, 그대를 그리는 마음이 깊어지면, 나 홀로 죽음을 맞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니.
"돌아가 계시면 설탕과자와 함께 탕약 올리겠습니다."
"설탕과자는 되었습니다. 애도 아니고."
기현이 다시 돌아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형원은 밭은 숨을 내쉰다. 가슴께가 타들어갈 듯이 아려 왔으나 아직은 참을 만하기에 괜찮다 스스로 위안해 본다. 독한 한약재 냄새를 들이키면서 정성 들여 약을 달이고, 하얀 사발에 옮겨 담아 귀하다는 약과도 접시에 올리고서 천천히 걸음을 뗀다.
기현은 일전에 형원이 종이에 옮겨 둔 매화가 가득한 정자 그림을 벽에 대어 보다가, 그의 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그것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그럼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 아닙니까."
탁자 위에 그림을 내려 놓고 사발을 받아 든 기현은 입에 대기를 망설이다가 형원을 올려다본다.
"이곳에 온 이후로 몸이 많이 좋아진 듯한데."
"달여 온 정성이 있으니 드시지요."
"…."
"드시고 나면 저 정자보다 더 귀한 곳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더한 절경이 있단 말입니까?"
기현이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것에도 형원은 가슴이 아린 것이다. 거센 고동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형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현은 힘겹게 사발을 비워 내고서 쟁반 위에 놓인 약과를 하나 집어 입에 물고는 형원의 손을 잡아 이끌려다가, 걸음을 멈추고는 남은 약과 하나를 집어 형원의 입에 물려 준다. 형원의 손을 잡아 이끌며 옮기는 기현의 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서 좋은 기운을 받은 덕인지 그의 가슴께에 주홍빛 파장도 옅어진 걸 보면 이 요양을 끝내도 될 듯한데. 그래도, 그래도 조금만 더 있다가.
뒤뜰로 향하는 문 앞에 멈춰 선 기현이 그의 손을 잡은 채로 형원의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형원이 그에게 보여 줄 풍경을 잠시 상상했다가, 뒤뜰로 난 문을 열면 눈부시게 빛나는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다. 형원이 먼저 한 걸음 들어서고 기현에게 고갯짓을 하면, 기현은 입에 남은 약과를 마저 삼켜 내고서 신난 아이처럼 제 눈 앞에 펼쳐진 백사장으로 한 발짝 내딛는다.
"그대는 제 생각도 읽을 줄 아십니까?"
"아쉽게도 그런 도술은 부릴 줄 모르는데."
"신기합니다. 바다가 보고 싶다 속으로 외고 있던 참이었는데."
기현은 천천히 한 걸음씩 떼며 제 눈 앞의 눈부신 광경을 눈에 담는다. 잘게 일렁이는 바다도, 그 앞에 펼쳐진 모래알도, 그 뒤로 무성히 자란 나뭇잎들이지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형원이 기현의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에, 기현이 그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걸음을 맞춘다.
"이 해변의 끝도 있습니까?"
"제 기력이 충분하다먼 끝없이 펼칠 수도 있지요. 부족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궁금하여 여쭈었을 뿐입니다."
기현은 제 발치에 채이는 작은 모래 알갱이들마저도 아름답다 생각한다. 잘게 흩어지는 그것들은 진짜가 아님에도 이리 생생히 느껴지니, 궁에 있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이라는 생각에 기현은 괜히 형원의 손을 더 힘있게 쥐어 본다.
"차라리 환궁하지 않고 여기서 지내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대와 있으면 근심이 사라집니다."
"무슨 근심이 그리도 많으셨습니까?"
기현은 지난 날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을, 이 공간을 빌려 허심탄회하게 늘어 놓아 본다.
"언제 궁에서 내쫓길까 하는 것들, 또 언제 어머니를 두고 왈가왈부할까, 오늘은 또 형님이 무슨 말로 속을 긁어 놓을까 하는 것들요."
형원은 기현의 말로도 궁에서의 그의 생활이 어땠을지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 건강이 호전될 리가 없지.
"형원."
"말씀하세요."
"저는 실은, 환궁을 원치 않습니다."
"…."
"그래도 전하께서 부르시면, 가야만 하겠지요."
형원은 그의 말이 저를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듯 들렸다. 그런데, 그래도,
"어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형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현은 느린 걸음을 멈춘다. 그럼에도 잡은 손은 놓지 않은 것에 형원은 맞잡은 손을 슬쩍 바라봤다가 다시 기현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어명은 받들어야만 하는 것이니."
기현이 잡은 손에 힘을 풀자 형원이 되려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제 뜻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대군."
기현아.
형원은 다시금 가슴팍에 이는 통증을 참아 내며 한 글자씩 힘 주어 내뱉는다.
"저 또한 그대와 함께 하여 기쁩니다."
해서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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