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폭행 당하는 것과 포식 당하는 것.
오두막을 나온 이리는 폭력적인 마을 감독관과 거대한 늑대를 조우한다.
이리 편 :
넌 에스페미아에서 온 첩자인가?
이리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산등성이 사이에 검은 털을 가진 늑대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덩치가... 산보다 거대했으니까.
장난해? 이렇게 크다고 하지는 않았잖아!
[ 쿵! ]
검은 늑대가 앞발을 딛자 바닥이 흔들렸다. 감독관이 손을 놓는 바람에 이리는 순간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했지만 간신히 섰다.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같이 가요!"
그는 혼자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리도 쫓았다.
툭. 그때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허리춤이 가벼워졌다.
"어? 잠깐만요, 내 돈…아…!"
이리는 금화 가방이 떨어진 것을 눈치채고 멈췄지만, 뒤를 보자마자 기겁하고 다시 뛰었다.
늑대의 발톱이 닿은 수풀이 재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화마가 휩쓴 것처럼.
돈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눈앞의 남자를 따라가야 했다.
"여기는…"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빛을 발하는 넓고 둥근 바닥이었다.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게 마치 개미지옥처럼 생겨 이리는 경계심부터 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서신에 없었는데 괜찮은 건가? 하지만 감독관이 주저 없이 들어갔기에 머뭇거리며 발을 내밀었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차단된 것처럼 고요해졌고 눈앞에 검은빛의 하늘과 강이 펼쳐졌다. 저게 뭐지? 이리는 뭔가에 휩쓸리는 것처럼 두렵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팔다리에 힘이 빠져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이봐! 멍 때리지마!"
감독관의 목소리가 들려 이리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은 빛나는 바닥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이상한게 보였는데, 이게 뭡니까?"
"뭐라니, 원래 빛의 돌리네 ( doline ) 에 들어오면 잡다한게 보이잖나."
"그…그렇군요. 늑대는요?"
이리는 고개를 들어 검은 늑대를 찾았다. 늑대는 어느새 그들의 근처까지 와 있었다.
"세상에! 너무 가깝잖습니까! 도망쳐야…!"
"아까부터 뭔 소릴 하는 건가? 밖에서는 이 안을 못봐. 그래서 펜리스 늑대 ( Fenrir )가 나타나면 여기로 대피하잖나."
"… …"
그의 말대로 늑대는 주변을 쿵… 쿵…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바닥은 중앙을 향해 주변 것들을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인력이 미약했다. 때문에 지금처럼 영역의 끝에 있다면 안전한 것 같았다.
"아하하. 참 편리하네. 그럼 빨리 저 중앙의 구멍으로 뛰어들어 텔레포트 하죠!"
"멍청이야?! 뒈지고 싶으면 너 혼자 해라! 우린 늑대가 자리를 뜰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해!"
"아앗! 그랬었죠. 차암~!"
하, 아는척하며 막 던지지 말아야겠어. 기왕 편지를 남길 거면 자세히 알려주지.
이리는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감독관은 이미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를 모르는 건 몇 명에게만 지시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 언행은 상식 밖이야. 너 여기 마녀가 맞나?"
"그럼요!"
"그런데 왜 늑대를 모르는 것처럼 굴지? 여긴 저 에스페미아 늑대의 영역이란 말이다."
"알고 있었는데 당황해서 그만…"
"돌리네는? 빛의 돌리네는 그걸 만드는 재료를 채취하는 곳이잖나."
"어, 음… 사수가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마녀가 저만 남았잖아요? 하하…"
이리는 마녀가 어떤 집단인지 몰랐지만,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 다 죽어서 몰랐다는데 어쩔거야.
"신원을 증명할게 있나?"
"이것을."
이리는 위조 신분증을 꺼내 감독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속으로 환호했다.
아~ 에스페미안들은 이래서 조작 신분을 만들어 준 거였어! 라고.
"인장을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난 글을 못 읽는다. 이름이 뭐지?"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마녀 아리에스'라고 합니다."
정말 쉽다, 쉬워! 이리는 속으로 흥얼거리며 서신에서 알려준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야. 이게 어디서 지금 개수작을 부려?"
"네?"
"내가 아는 '마녀 아리에스'는 다른 사람이다. 이 신분증은 어디서 났지?"
"… …"
감독관은 코웃음을 치더니 문서를 바닥에 던졌다. 아무래도 '마녀 아리에스'는 실존 인물이고 아는 사이였던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이글거리며 이리의 멱살을 잡았다.
"윽. 잠깐! 말로 합시다!"
"넌 여기 살던 마녀가 아니군! 이런 위조까지 한 것을 보니 에스페미아에서 온 첩자인가?!"
"아니, 이런 미친…"
이리는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웃을 뻔했다.
대체 이게 뭐임? 주작 신분을 대자 마자 와르르 들켜 버리다니. 진짜 최악이잖아.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지.
이리는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금화 가방을 떠올렸다.
"주인님! 우리 협상하지 않겠습니까? 저를 보내주시면 금…"
"뭐라는 거야. 다 됐고 너 집 안에 있는 것을 봤나?"
"… …"
감독관은 여전히 처음에 말했던 '그 물건'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고?"
"네…"
"후. 이것들이 하나도 안 만들었나."
"…???"
그때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 마을이 있는 것 같았다.
감독관은 "벌써 시간이…"라고 중얼거렸지만 펜리스 늑대는 귀만 쫑긋 세웠을 뿐, 이동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넌 일단 살려둬서는 안 되겠어."
그는 멱살을 잡은 손을 돌려 이리를 방패처럼 제 앞에 세웠다.
"… 주인님…? 앗!"
그리고 펜리스 늑대를 향해 툭! 하고 거칠게 떠밀었다.
"허억…!"
이리는 돌리네 밖으로 넘어갈 뻔했지만 있는 힘껏 몸을 앞으로 젖혀 감독관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뚱뚱하고 땀 냄새 나는 그의 허리는 양손에 다 감기지도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감독관은 매달린 이리의 팔을 떼어내려 했다. 단단한 손톱이 팔뚝을 파고들어 아팠지만 이리는 이 악물고 버텼다.
이 손을 놓으면 뭘 하려는지 아니까. 그는 지금 자신을 미끼로 던지려 하고 있었다.
"자수할게요! 제발!"
"어차피 에스페미안은 즉결 처분이 원칙이야! 이 곳을 본 이상 살려 보내는 것도 곤란하다고!"
"저 아무것도 못 봤다니까요!"
"왜 이렇게 힘이 좋아?!"
감독관은 막대기를 뽑아 이리의 어깨를 내리쳤다.
이리는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덜덜 떠는 손으로 맞은 부위를 감싼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검을 가져올 걸 그랬어.'
무기를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주먹을 쥐었다. 머릿속에 단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아, 여기서 죽으면 유리는 혼자 남겠지. 걔는 내가 없으면 안 돼. 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고.
빛나는 바닥에 붉은 점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더니 물감이 번지듯 커져 나갔고 순식간에 눈앞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포기해라."
이리는 머리 위에서 낄낄 거리는 감독관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붉은색으로 보였다.
'서신의 내용은 정말일까? 내가 이 남자를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는 것과 늑대에게 포식 당하는 것 중 지금은 누가봐도 전자가 나았다.
그래서 이 남자가 아무리 심하게 때려도 끝까지 매달릴 생각이었다.
이리는 감독관의 발목을 양손으로 있는 힘껏 움켜잡았다. 그런데.
[ 우두둑! ]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으아악!!!"
"어?"
감독관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고 이리는 화들짝 두 손을 뗐다.
그는 쓰러져 뒹굴었는데 부여잡은 발목이 마치 삶은 닭 뼈를 으깬 것처럼 너덜거렸다.
이리는 주저 앉아 멍하니 감독관을 바라보았다. 붉었던 시야는 어느새 되돌아와 있었다.
"이 개 같은 놈이! 아아악…!"
너무 아픈 나머지 늑대의 존재를 잠시 잊어버린 것일까.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밖을 향해 기었다.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엉금엉금 빛의 돌리네에서 빠져나갔다.
[ 쿵! ]
그러자 감독관의 머리 위에 늑대의 앞발이 내려앉았다.
이리는 순간 그가 사라졌다고 착각했지만 아니란 것을 깨닫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감독관의 등은 검은 발톱에 찔려있었다. 찔린 상처에서 곰팡이처럼 잿빛이 번지더니 전신을 뒤덮었다.
그는 이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늑대는 주둥이를 내려 잿빛 시신을 물어올렸고 긴 목을 검은 파도처럼 꿀렁꿀렁 일렁이며 시신을 삼켰다. 잔혹할 줄 알았던 포식은 의외로 빠르고 깔끔하게 처리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펜리스 늑대는 처음 나타났던 방향으로 쿵쿵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늑대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경작지는 조용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돌아왔다.
이리는 소나기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축축이 젖은 제 뺨을 만졌다. 하지만 빛의 돌리네 안에는 빗방울도 닿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이 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이거 꿈 아닐까?
그때 감독관의 나무막대가 눈에 들어왔는데, 아마 그가 죽기 전에 떨어뜨린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 세계가 게임 같은 건 줄 알았지. 하지만 전혀 아니었어. 막대는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아마 그대는 그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처럼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해 '이능'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진짜였어. 이리는 서신을 떠올리며 두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은박지처럼 찌그러졌던 인골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소름 끼치는 비명이 귀에 맴돌았다. 결국 뱃속에서 올라오는 울렁거림을 참지 못해 "우욱!" 하며 구토를 하고 말았다.
숨쉴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그러길래 왜 갑자기 죽이려고 해서…!"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쳤지만 곧 절망감이 엄습했다.
"난 이제 끝난 거 아닌가?"
이리의 세계는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기준이 매우 엄격했고 특히 여성이 남성을 살해한 사건은 대부분 무거운 형이 선고되었다.
이 왕국은 어떨까.
마을에 가서 솔직히 고하면 무사히 유리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어쩌지?
"아니야. 진정하자. 생각해보니 내가 죽인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가 없어."
증거는커녕 시신조차 없다.
그리고 에스페미안들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그런 서신을 남긴 거야.이 상황은 모든 것이 끝났다 여길 만큼 특이하지 않아.
이리는 눈물을 닦고 나무막대를 챙겼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해서는 유리한테 못 가. 계획대로 밀어 붙어야 해."
비가 그치자 이리는 떨어뜨린 금화 가방을 찾았다. 다행히 안에 있는 것들은 무사했다.
그리고 다시 가옥에 들어가 내부를 살폈다.
"도대체 그 인간은 뭘 봤다고 난리 쳤던 거야? 역시 아무것도 없잖아. 돌아이 새끼. 잘 죽었지."
이리는 투덜 거리며 다락의 수납함에서 궁정검을 꺼내 들었다.
"마음을 바꿨어. 이런 곳에서 무기를 들지 않는 것은 미련한 짓이야."
한참을 내려오자 망루가 달린 마을 교회의 지붕이 보였다. 종소리는 여기서 들린 것이 틀림 없었다.
마을은 거대한 석조 위벽에 에워싸여 있었고 출입구를 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리는 가까이에 있는 나무 뒤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았다.
주민은 자유롭게 오갔지만 외부인은 양피지 문서를 위병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형제는 들어갈 수 없어요."
"나는 통행증이 있는데?"
앳된 목소리의 위병이 핼버트로 상인의 앞을 가로막자 그는 항의했다.
"다른 령 출신이니 이걸로는 안 돼요."
"무슨 소리야. 같은 국왕령이잖아."
"국왕 전하와 대공 저하께서 벌이시는 내전이 안 끝났으니 아직 이 마을은 대공령이라고요."
상인은 위병의 말이 재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은근히 전하께서 패하시길 바라는 것처럼 들리네.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입조심 하라고."
"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너와 마을 사람들 다 농노 아니냐? 노예 주제에 왜 이렇게 건방져?!"
"개소리 할거면 꺼져요!"
"더러워서 물건 안 판다. 꼬맹아! 망한 섬에서 이따위로 해서 너희 마을이 어디까지 가겠냐!"
"너 아니어도 우리 잘살아!"
상인은 씩씩거리며 되돌아갔고 위병은 그가 있던 자리를 향해 침을 뱉었다.
"그렇구나. 저 사람들은 농민이 아니라 농노로군…"
숨어있던 이리는 중얼거렸다.
농노 ( serfdom ). 타인의 토지에서 정착물 취급 당하며 살았던 노예들. 이 세계는 노예제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쩐다."
통행증은 위조 서류가 있으니 이를 활용하면 된다. 하지만 위병들과 마을 사람들이 마녀 아리에스를 이미 알고 있으면 어쩌지?
아무리 저들을 죽여도 된다 했어도 방금같은 일을 연달아 겪는 것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리는 일하는 농노들 중, 혼자 있는 자에게 말을 걸어 정보를 캐내기로 마음먹었다.
왜 반드시 혼자여야 했냐면 만약 문제가 생겼을 때 그나마 처리하기 편할테니까.
경작지는 보리, 밀, 방목지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리는 보리 경작지로 갔다.
"예상은 했지만…"
남성 왕국답게 일하는 농노들 중에는 다양한 남자들이 있었다.
덩치 큰 남자, 근육질의 남자, 날씬한 남자, 뚱뚱한 남자, 수염을 기른 남자 등등. 유아부터 노인까지 연령대는 물론이고 생김새도 다양했다.
여성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 남자, 남자. 이곳에 있는 자들은 전부 남자였다.
"이런…"
그제야 위화감을 느낀 이리는 고개를 숙인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일한 여성인 자신은 시선을 끌었기 때문에 얼른 사람이 드문 구역으로 빠져나왔다.
"캭캭캭!!"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 있어!"
한산한 곳에 오자 붉은 머리의 남자 아이가 뛰어 다녔고 주의를 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런데 여긴 애를 어떻게 만들어? 남자가 임신하나?"
이테루스 편 :
왜 정자 제공을 안 하는 게냐?
무정자증이니?
"빌어먹을 개저씨같으니. 그깟 정자가 뭐라고."
비가 그치자, 이테루스는 욕설을 하며 보리밭에 나왔다. 그는 여러 명이 해야 하는 이 작업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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