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이세계에 올 거면 적어도 애를 낳기 전에 왔어야지.
이세계의 오두막에서 눈을 뜬 주인공 이리. 그곳에서 행방불명된 딸이 남긴 편지를 발견한다.
이리 편 :
이세계에 올 거면
적어도 애를 낳기 전에 왔어야지.
이 세계에 온 지 1일 차.
"야! 이 세계에 올 거면 적어도 애를 낳기 전에 왔어야지! 왜 하필 지금이야!!"
이리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소리쳤다.
너무 뻔하니까 거울 같은 거 안 봐도 되겠지? 모르는 집에서 눈을 뜬거 보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거다.
아! 저것 좀 보라고! 아무리 봐도 한국은 아니잖아!
"아아아아! 지금 애가 없어졌단 말이야! 이럴 때가 아닌데!"
이리의 하나뿐인 딸 유리는 연락이 끊긴 상황이었고 핸드폰은 전원도 꺼져 있었다.
집 근처 경찰서에 방문하여 실종 신고를 했지만 가출인 것 같으니 기다려 보라는 답을 받았다.
그 상황에서 갑자기 여기 온 것이다.
"그래 뭐 좋아! 이 세계면 절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벌거벗은 상태의 이리는 우선 옷이 필요했는데, 여기가 판타지 세계가 맞다면 그냥 막 훔쳐도 된다고 생각했다.
게임에서는 아이템 보이면 그거 그냥 주워 먹거나 팔아서 옷을 사면 되잖아?
때마침 화로의 옆에 다락으로 연결된 것 같은 사다리가 있었다. 일어나서 그쪽으로 걷자 아무 처리가 안된 평탄한 바닥에서 독특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이리는 다락에 올라가 창문을 열어 시야를 확보했다. 다락은 침실이었고 지푸라기 침대 옆에는 벽 길이를 꽉 채우고 있는 긴 수납장이 있었다.
가구가 이것밖에 없으니 별수 있나?
수납장 앞에 앉아 묵직한 뚜껑을 위로 젖혔다.
쥐스토코르, 브리치스, 트라이콘 모자, 볼드릭, 크라바트, 가방... 시대극이나 판타지에 나올 법한 옷들이 수납장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이리는 너튜브로 서양 고전 영화 들을 많이 봤던지라 실물을 처음 봤음에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면… 고전 영화는 무료거든… 이리 같은 심각한 흙수저는 최신 유료 영화 같은 거 결제 못 한다.
따질 상황이 아니니 최소한의 의복들만 집어 들어 재빠르게 척척 착용했다. 옷들은 신기할 정도로 기장이 잘 맞았고 특히 부츠는 발에 완벽했다.
"아무리 이 세계여도 그렇지, 이거 남의 집 물건 아니야? 이게 가능?"
이리는 의문스러워하며 수납장의 옷가지를 모두 들어냈다. 그리고 그다음 물건을 보자 "와우…" 하며 감탄하고 말았다.
궁정검과 플린트 락 머스킷. 역시 고전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물건들이라 낯설지 않았다.
"가볍게 이야기 할 때가 아니었네. 여기 진짜 다른 세계가 맞구나. 정말 못 돌아가면 어쩌지?"
사람 죽일 때 쓰는 도구들이라 그럴까? 변해버렸을 자신의 외형이나 의복보다 이 무기들의 존재가 이 세계에 왔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이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수납함의 가장자리에 있었던 물건들을 꺼냈다.
화려한 상자와 놋쇠 열쇠, 정혈대 묶음, 지도와 문서 세 개, 마지막으로 보라색 늑대의 머리모양의 인장이 붙은 종이 서신이 있었다.
종이 서신을 펼쳤다.
"한글…"
그것은 이리가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문서였다.
시간과 차원을 거슬러 올라온 자매에게.
서신의 발신처는 에스페미아 왕국이라는 여성 국가입니다. 우리는 세간에서 에스페미안이라 불립니다.
그대와 깊은 인연이 있는 자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 낯선 장소에서 당황하실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만, 부디 오래 현념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 서신을 읽고 있다는 것은 가장 좋지 않은 장소에서 눈을 떴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대가 있는 곳은 에스페미아와 인접해 있는 마리스테라라는 남성 왕국이고 그 나라의 10개 주 중 최동단에 위치한 나탈리움 이라는 섬입니다.
마리스테라 왕국에 사는 남성들을 우리는 마리스라고 부릅니다.
양국 간 맺은 조약 때문에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송구하지만 자력으로 오셔야 합니다.
이를 도와드릴 여비와 의복, 무기, 지도 그리고 위장 신분을 위한 출생증명서와 위생증 그리고 통행증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당신의 위장 신분명은 '마녀 아리에스'입니다.
마리스들은 거대한 신장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지만 아마 그대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해 이능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얼마든지 죽이셔도 됩니다만 현실적으로 모든 마리스들을 도륙 내며 여기까지 올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것들을 잘 활용하십시오.
나탈리움섬의 남쪽에는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은 밀항선이 정박하는 무역의 사각지대입니다.
그 배를 이용하여 에스페미아 왕국으로 오십시오!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자… 유리."
이리는 중얼거리며 다음 줄을 읽었다.
아, 그리고.
기왕 그 섬에 계시게 되었으니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수확제의 다음날, 마리스테라 왕국의 대귀족이 항구도시의 경매장에 행차할 것입니다.
그 자를 에스페미아 왕국으로 데려와 주십시오. 반드시 사지를 부러뜨리거나 머리만 가져오셔야 합니다. 그게 서로 편할 겁니다.
만약 그대가 마리스테라 왕국에서의 삶이 만족스럽다면, 정착하는 것도 존중합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자매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대와 에스페미아 왕국에서 만나길 고대합니다.
그리고 서신의 마지막 줄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추신 : 그 섬에 서식하는 검은 늑대의 이빨과 발톱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배려 가득한 편지를 남겨놓은 이유는 하나뿐이지. 지금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은 분명히 유리가 틀림없어. 그 애는 지금 그쪽에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리가 보육원 출신에 한 부모 가정의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연고자가 딸 유리밖에 없었다.
유리가 이 세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 상황은 딸이 원래 세계에 있는 것보다 나았다.
아, 다행이야!
이리는 종이 서신을 접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대귀족을 데려오라니… 내가 어떻게? 이 몸, 척 봐도 작은데."
이리는 빙의된 몸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평범한 간호조무사 겸 가사 노동자였던 자신이 사람을 납치하거나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이능인지 모르겠지만 멘탈이 되겠냐고.
"하지만… 이건… 유리의 부탁이나 다름 없어."
유리는 언제나 이리의 말에 충실했다. 이리가 남자에게 의존하면 안 된다고 하니 유리는 남학생들과 거리를 뒀고 외모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하니 주저 없이 머리를 짧게 잘랐다.
여유없는 집인데도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가출하기 직전, 남자친구 문제로 싸웠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툴게 아니었어. 처음 사귄 남친이었잖아. 그 나이면 관심 가질 법하고.'
이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어떻게 싸웠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딸이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다니,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행여 유리의 부탁이 아니라 해도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딸이 거기서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원래 세상이 그렇잖아.
"좋아. 우선 그 수확제라는 게 언제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해."
그리고 수확제가 열리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생각해야 한다. 일단 마을에 가서 사람을 만나야 했다.
"돈은 조금만 챙기자. 대귀족을 기다리는 동안 너무 낭비하고 싶지 않아."
이리는 화려한 상자를 내려다봤다. 상자 속에 든 것은 금화 1000닢.
밀항선을 탈 때 비용을 얼마나 소요할지 알 수 없으니 가급적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돈은 가장 좋은 협상의 수단. 아예 안 쓸 수는 없을거야.
그래서 이리는 작은 가방이 꽉 찰 만큼만 금화를 집어넣었다. 100닢 정도가 들어갔고 가옥에 남은 금화는 총 900닢이 되었다.
"무기는… 글쎄. 그냥 마을에 가는 건데 쓸 일이 있을까? 거추장스럽기만 할 거 같아."
이리는 남은 금화가 들어있는 상자와 놋쇠 열쇠 및 무기를 도로 수납장 안쪽에 넣은 후 위에 옷가지를 덮었다.
그리고 문서들과 정혈대, 금화 가방만 챙겨 들고 가옥을 나왔다.
문을 나서자 당장 비가 떨어질 것 같은 하늘과 음산한 검은 산이 이리를 반겼다.
눈앞에는 허리 또는 머리까지 오는 식물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리는 옆에 놓여진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그 식물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기 경작지 였구나. 뭘 심어놓은 거지?"
진녹색의 농작물에는 손바닥을 펼친 모양같은 잎사귀들이 붙어 있었다.
이리는 이런 식물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 는 게 아니라 좀 익숙한데?
"… 아니 미친… 이거 그거 아니야?!"
이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을 때,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을 빠르게 옮겨 앞까지 갔다.
'…하아아아… 외국인이잖아…'
남자는 배가 나온 체형의 중년이었다. 목에 착용한 플랫칼라가 인상적인 그의 손에는 산가지가 그려진 짤막한 나무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어휴, 문자를 읽지 못했는데 대화는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번역기도 없으니 별수 없지 뭐.
"헤, 헬로? 하와유?"
"어? 그 마녀가 아닌데?"
"헉! 말이 통하는군요!"
신기하게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남자의 말은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이리는 이해했고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에스페미안들이 내게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하네! 유리 수능시험 칠 때 이런 거 있으면 꿀일텐데!'
정말 이상했지만 어쨌든 걱정스러운 부분이 쉽게 해결되며 찾아온 좋은 기회.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수확제가 언제…"
"너 누구야?"
"네?"
"방금 저 집에서 나오지 않았나?"
"… 어…그게 맞기는 한데요… 음…”
'뭐야, 저 집은 날 위해 준비된 게 아닌가? 이미 아는 것처럼 말하네.'
뭐라고 대응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하도 잡아먹히니 얼굴을 익혀두기가 힘들군. 못 보던 얼굴이라 다시 이야기 해두지. 내가 너희들을 관리하는 마을 감독관 ( Reeve ) 이다."
"… 아… 네, 네!"
"뭐 너희들이라 해봤자 이곳의 마녀는 너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다행히 감독관은 먼저 대화를 다음으로 이끌었다.
"차라리 너희들이 다 죽은 게 잘된 걸 수도 있겠군. 이 일은 당분간 중단해야 해. 그것은 어딨지?"
"네? 뭘요?"
"그거 말이야. 내가 오늘 받으러 온다고 말했었잖나."
"??????"
이리는 "야! 그게 뭔데?!"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설마 수량을 못 맞춘 건 아니겠지?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감독관은 들고 있던 막대를 허리춤에 꽂고 이리의 손목을 붙들더니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이리가 이곳 사람인 것 처럼 자연스럽게 마녀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이리를 서신에서 읽은 위장 신분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라고 만든 거니까 알아서 속아 준다면 고마운 일이긴 한데… 곤란한걸. 그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게다가 저 집에는 에스페미안들이 남겨준 금화와 무기가 있단 말이야.'
이리는 이대로 가옥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잠깐만요. 감독관님."
우뚝 멈춰 선 감독관은 허리에 찬 막대를 빼 들더니 몸을 거칠게 휙 돌렸다. 그리고 손을 치켜올려 때릴 것 같은 시늉을 했다.
"이게 확! 똑바로 안 부르냐! 주인님이라 해야지!"
"…앗…!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러니까 제 말 좀…"
이리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리며 얼굴을 감쌌다.
'아악! 깜짝이야! 뭐야! 웬 주인님?!'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강렬하고 넓게 퍼진 소리는 듣고 있는 이리의 귀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울릴 정도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행동을 멈췄다.
[ 쿵! ]
[ 쿵! ]
천둥 같은 땅울림과 함께 발밑이 흔들렸다. 이리는 얼굴이 굳어진 감독관을 보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에 에스페미안들이 남겨놓은 서신의 마지막 구절이 지나갔다.
그곳에 서식하는 검은 늑대의 이빨과 발톱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에 계속>
집 내부 구성 참고 출처 : https://www.wealddown.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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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일부 삽화 참고 출처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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