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1화. 봄볕, 산들바람, 그리고 체육복 (4)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조퇴서 쓰고 연습실 갔다더니, 여기 있었네.”

“...아.”

별관에 위치한 어느 교실의 문을 열었다. 오래 사용하지 않았는지 문이 조금 거칠게 열렸다. 드드득. 그 소리에 놀란 남학생이 문 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채주현은 제가 등장할 줄은 몰랐는지 생각보다 놀란 표정이었다.

옆으로 길어서 예쁜 커다란 눈동자가 올곧이 자신을 향했다. 여루는 다시 힘들게 열었던 문을 낑낑 닫고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고?”

“응.”

“몰랐어.”

“?”

“여긴 우리 동아리실이거든. 고전문학부. 안 쓰는 교실인 줄 알았지?”

여루는 주현이 엎드려 자고 있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옆자리 책상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부원이 나랑 내 친구 둘뿐이라 그냥 동아리실 말고 각자 교실에서 그때그때 만나고 있거든. 여긴 거의 축제 있을 때 홍보용으로 쓰는 곳.”

“그렇구나.”

“그런데 앞으로는 꽤 사용하게 될 것 같아서 청소할 겸 들어와 봤는데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네.”

“미안.”

“네가 미안할 건 없지.”

창문이 열려있었다. 기분 좋은 오후의 봄볕과 산들바람이 커튼 자락을 타고 교실 안으로 넘실넘실 흘러들어왔다.

여루는 가져온 종이가방을 주현에게 건넸다. 그냥 건네기는 뭣해서 선생님께 받아온 봉투에 담은 그의 체육복이었다.

“체육복.”

“아.”

“잘 빌렸어. ...? 뭐야?”

갑자기 주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루가 깜짝 놀라 책상에 앉은 자세 그대로 주현을 올려다보자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뭐 하는...”

“잠깐만 있어 봐.”

너무 놀라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주현은 여루의 목덜미 부근까지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멈추고는 잠시 그 자세로 가만히, 그저 가만히 있었다.

뭘 하는 거지.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이 느껴져 간지러웠다. 왠지 목덜미가 붉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닌가?

“잠깐...”

“...하아. 아냐. 됐어.”

“뭐?”

다시 고개를 뗀 그의 얼굴은 상쾌한 표정이었다. 뭐지, 방금?

“너 향수 안 쓰지?”

“...어, 어.”

“그런데 좋은 냄새 나네. 향수 쓰는 줄 알았어.”

“...”

샴푸향 말고는 좋은 냄새라고 할 만한 게... 문득 아까 빌려 입었던 옷에서 났던 청량한 향이 떠올랐다. 그러자 순식간에 목이 화끈거리며 붉어졌다.

“너, 너너 지금 뭘 확인한 거야?”

“아무것도.”

“변태야? 야, 우리 말 섞은 게 이번이 두 번째거든? 그런 사이인데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 안 들어?”

“별로.”

“말 참 짧게 하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주현이 작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 건지. 여루는 그런 소년을 흘기고 던지듯 체육복이 든 종이가방을 그에게 다시 주었다.

“이거나 받고 떨어져. 그리고 다신 나한테 말 걸지 마.”

“왜?”

“왜냐니. 그야... 너는 너무 눈에 띄잖아. 나는 주목 받는 걸 싫어해.”

“흐음.”

“피곤해지는 건 사양이야. 그러니까 그냥 같은 반 친구 사이로 알아서 각자 지내자.”

“그냥 친구 하면 안 돼?”

“뭐?”

“같은 반 친구 사이 말고, 그냥 친구 사이. 하고 싶은데.”

자신의 뭘 안다고 친구가 되자고 하는 걸까, 저 애는. 벌써 두 번째였다. 자신에게 알 수 없는 호의를 보이는 이가. 여루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소년의 곱게 휘어진 눈매를 멍하니 쳐다봤다.

잘생기긴 했네. 목소리도 은근히 좋은 것 같고... 아냐, 외모에 속지 말자. 저건 여우의 꼬드김이야. 평범하게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내게는 비일상과 가까워짐을 경고하는 알람과도 같은 것. 얘랑 엮이면 앞으로의 삶을 평범하게 살긴 글렀겠지. 소연이보다 더한 위험 요소였다.

“싫어.”

“왜?”

“자꾸 왜냐고 하지 마. 그냥 싫다고.”

“...이상하네. 다른 애들은 나랑 친해지지 못해서 안달인데.”

주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기가 막혔다. 여루는 발끈했다.

“야, 왕자병 걸린 애. 모두가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건 아니거든?”

“알아. 하지만 ‘보통은’ 나랑 어떻게든 연을 쌓아보고 싶어 하는데 넌 아니네.”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야. 이참에 배워. 그럼 난 간다.”

“잠깐만.”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팔목이 잡혔다. 따스한 온도가 서늘한 체온의 팔에 맞닿았다. 여루는 제 팔을 붙잡은 소년에게 놓으라는 듯 팔을 흔들며 짜증 냈다.

“놔. 또 왜...”

“권여루.”

이름을 혀끝에서 굴리듯 발음해보았다.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또한 좋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기가 팽창했다. 묘한 긴장감이었다.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여루는 제 팔을 잡은 주현의 손이 너무 뜨겁다고 생각했다. 주현은 제가 잡은 그녀의 팔을 들어 올려 손목 안쪽에 코끝을 가져다 대었다.

“...진짜네.”

“...뭐가.”

“향수 안 쓰네.”

“안 쓴다고 아까 말했잖아.”

“응. 알겠어.”

미련 없이 팔을 놔준다. 여루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한번 쏘아봐 주고는 다시 교실 문을 열고 나갔다. 둘만 교실에 있는 걸 누가 볼까 봐 일부러 닫아놨는데 괜히 그랬다.

어차피 별관에는 사람도 잘 안 오는데. 투덜거리면서 아까 붙잡힌 왼팔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그의 체온이 남아있는지, 아니면 제가 열이 오른 건지.

열기가 오래 머물렀다. 늦은 봄, 이른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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