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봄볕, 산들바람, 그리고 체육복 (5)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여루야, 네 체육복. 미안, 늦게 돌려줘서.”
“아니야. 괜찮아.”
“대신 집에서 세탁했어. 그니까 봐주라?”
9반의 이름 모를 여자애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미안하긴 한 걸까? 실실 웃는 게 일부러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티가 났다.
여루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지만 겉으로는 웃는 표정으로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여루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소연이 9반 애가 멀어지자 한 소리 했다.
“여루야.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나 별로 안 착해.”
“알아.”
“뭐라고?”
황당한 목소리로 반문하자 유소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싫으면 싫다고 말해. 말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게 없다니까, 저런 애들은.”
“...그런가.”
“그래. 앞으로 애들한테 뭐 빌려주지 마. 지난번에도 필기 노트랑 지우개 빌려줬다가 잃어버렸다고 못 돌려받았잖아? 그게 한두 번인가.”
“...”
“넌 나 말고 친한 애도 별로 없잖아. ‘진짜’ 친한 친구.”
“틀린 말은 아니네.”
“그치? 그러니까 너무 오지랖 부리지 말고. 좀 더 못되게 굴 필요가 있어, 넌.”
소연이 표현은 저렇게 하지만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 걸 여루는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돌려받은 제 체육복을 내려다봤다. 옷은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품이 넉넉했던 채주현의 체육복이 떠올랐다. ...일주일 만에 돌려받아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제 이름이 새겨진 옷이 낯설었다.
“유소연! 너 오늘 방과 후 없지? 같이 집에 가자. 누나도.”
“기다려. 우리 아직 짐 챙기는 중인 거 안 보이냐.”
“아하하.”
누나라는 호칭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몰렸다가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되었는데 아직도 시선이 쏟아지는 게 좀 쑥스럽긴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여루는 그 시선의 주인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주지 않았다.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주현이 자신과 소연이가 있는 자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급한 일이 생긴 것 마냥 소연과 함께 훌쩍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루야. 너 채주현이랑 뭐 있었어?”
“...아니. 왜?”
“그냥. 오늘 하루 종일 걔가 계속 너만 쳐다보길래, 뭐라도 있는 줄 알았지.”
“...나보고 친구하자네.”
“뭐? 채주현이?”
“응.”
“아하핫! 진짜 웃긴다. 이미 친구 아니야? 같은 반 친구.”
소연이 깔깔대며 웃었다. 하늘은 놀란 표정이었다. 소연의 오른쪽에서 걷던 하늘이 조금 멈칫하다 여루에게 물었다.
“주현이 형이 먼저 친구 하자고 했어요?”
“응.”
“별일이네... 그 인간이? 아니, 방금 말 취소. 흠흠. 그런 성격 나쁜 인간이 먼저 친구 하자고 했다니 특이하네요. 아차, 또 말 실수.”
“성격이 나빠? 걔가?”
“그러게. 서하늘 너보단 성격 좋아뵈던데? 애들이랑도 두루 친하고 선생님들도 다 걔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고. 수업 시간엔 좀 조는 것 같았지만.”
의외였다. 채주현에 대한 서하늘의 평가는 냉정했다.
“그 형, 연습실에서 아무도 못 건드려요. 집안 때문이 아니라 성격 때문에. 어떻게 소문이 안 났는지 몰라. 소속사에서는 그 지랄을 해대는데 학교에서는 또 얌전하고.”
“도대체 어떻길래...”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이거죠. 특히 저희 연습생 중에 류세운이라는 형이 있는데, 그 형이랑 사이가 되게 안 좋아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 으르렁거려요.”
하늘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애들끼리 둘이 못 마주치게 아예 연습실을 정해서 쓰면서 서로 감시하잖아요. 1연습실 애들은 주현이 형 담당, 4연습실 애들은 세운이 형 담당. 이렇게.”
자신에게 곱게 웃어주던 반반한 얼굴이 떠올랐다. 조용한 성격의 이상한 애인 줄 알았는데, 그냥 또라이였나보다. 여루는 납득했다. 그럴 수 있지.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다.
“야, 완전 상여우가 따로 없네. 쌤들한테는 꼬리치고 다니고 애들한테는 인기란 인기는 다 받아먹고.”
“...”
소연이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루야, 난 걔 연습생이라길래 좀 친해지면 재밌을 것 같았는데 아닌 것 같네.”
“너 지금 하늘이 말만 듣고 판단하는 거야?”
여루가 너 그런 애였냐는 듯한 시선으로 소연을 쳐다보자, 소연이 그런 거 아니라며 억울하다고 악악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아이돌 한다길래~ 친분 좀 쌓아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소연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하늘이 부러 여루를 탓하는 투로 말했다.
“누나, 그럼 제가 거짓말한다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닐지도 모르지.”
“허, 같이 연습생 생활하고 있는 제가 증인입니다만.”
“그렇지만... 아니다. 됐어. 이 얘기는 그만 하자. 그리고 소연아, 하늘이도 연습생이긴 하잖아.”
“얘는 나랑 꼬꼬마 시절부터 알던 사이니까 논외지.”
반 친구 말고 그냥 친구하자며 웃던 소년을 생각했다. 목덜미에 남은 자신의 체향을 확인하듯 고개를 묻던 소년이 떠올랐다.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과는 달리 왠지 자주 보게 될 것 같았다. 같은 반이라서가 아니라 이건 그냥 직감이었다. 앞으로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어떤 예감. 여루는 왼팔을 들어 손목에 코를 박았다.
“향수라니, 어이가 없어서...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무겁고 청량한 향내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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