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낡아빠진 사무실

3과의 기록 by 김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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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다. 지금의 날씨는 12월 한겨울 세상은 흰눈으로 가득해 깨끗하지만 나는 하늘과 같이 먹이나 끼였다. 이젠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서류잔업은 진작에 끝났고, 아마 이 부서는 내일이면 폐지되뎄지. 내 청춘이 가득했던 3번째 섹션. 3과. 사무실의 회색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뚜걱뚜걱 발걸음을 옮기자 복도엔 사람들이 그득했다. 다들 연말정산으로 바쁜가? 그렇겠지, 아마 이 지부에 나만큼 한가하게 월급 타 가는 사람은 없을걸. 하긴, 요샌 돈도 영 못 벌긴 했다. 우린 성과제니까. 나 혼자선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마지막 상부보고를 올리기 위해 푸른머리, 푸르고 둥근 눈동자를 가진 청년은 지부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문은 곧이어 철컥 소리와 함께 열렸고, 청년은 손에 쥔 서류뭉치를 놓기 싫은 듯이 팔에 안았다.

"...3과에요. 연말정산이고요..." 청년은 땀으로 눅눅해진 손으로 서류파일을 건넸다. 흰 정장을 입은 백발의 중년은 너그러이 이를 받아들었다. 땋은 머리가 전등불빛에 반짝였다.

"그래, 서류 고맙다. 마침 기회가 왔으니 잘 됐어, 나랑 얘기 좀 하지 않겠니 스루메." 중년은 다리를 꼬며 소파에 앉았다. 스루메라는 청년은 그 맞은편 소파에 잔뜩 긴장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게 꼭 면접이라도 보는 모습 같았다.

"홍차 마실래? 어떤 홍차가 좋아?"

"저, 지부장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아요."

"음? 나는 너와 홍차를 고르는 이야길 하고 싶은데."

"....얼그레이요?" 그는 중년의 이야기에 맞추듯 불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애시당초 아는 홍차 종류라곤 그것 뿐이다. 차가 다 거기서 거기 아냐? 향이나 맛이 조금 다르다고 해도 그걸 긴밀하게 구분할 정도로 차에 관심이 있지 않은걸. 어른들은 늘 저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심취해서 비슷한 정보값으로 이야길 한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니까.

"좀 더 편하게 이야기 해 봐. 넌 항상 얼그레이만 나에게 얘기하는데, 그것밖에 몰라서니, 아니면 그걸 제일 좋아해서니? 아니다, 됐어. 요새 어떻게 지내? 일적인 것 말고 사적인 것 말이야. 너는 항상 무슨 사춘기 온 여고생 처럼 항상 만나면 얘기하기 싫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잔뜩 긴장해선 나한테 뭐라도 얘기해 주는 게 없어."

"그야 저희가 그렇게 사적인 것을 대화할 자리에서 만나진 않잖아요. 일자리에서 만나는 건데 사적인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일 얘기가 다지."

"하지만 너는 일 얘기 하는 걸 싫어하잖니. 3년 전부터 뭔들 일 얘기만 하면 손에 땀을 쥐는 걸 내가 모르겠어? 게다가 넌 거짓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널 몇 년이나 봐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게다가 이 정도도 못 물어볼 사이는 아니잖아." 중년은 다리를 꼬며 홍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이래서 이 사람이랑 얘기하기가 싫다. 뭐든 자기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마음에 든 적이 없다.

"그걸 물어볼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여기서는요. 전 그냥 연말정산을 하러 온 것 뿐이에요."

"오늘도 그렇게 돌아가고 나가서 한숨 쉴 거지? '아~ 정작 하려고 했던 얘기 못 했어~' 하고 혼자 또 숙소에 들어가 술이나 마시면서."

"스토킹 당하는 기분이니까 그만둬 주실래요!" 스루메는 소리를 높였다. 진심으로 화낸 건 아니지만 사생활을 침범당하는 기분이다. 어떻게 저런 사소한 것까지 다 안 거지? 숙소 안에 CCTV가 있는 것도 아닌데. 크게 뜨끔했는지 심장이 크게 뛰었다. 순간 감정조절을 못 했다. 지금 내가 지부장님께 큰 소리를 낸 건가? 눈아래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스루메는 지부장님 앞에서 최대한 표정관리를 한다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으나 입술은 앙다물어 잘게 떨렸고, 눈밑아래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한 걸 보면 광대는 더 이상 한계인 것 같았다. 눈썹이 자연스레 미간사이로 좁혀졌다.

"그래, 알았어. 어쨌든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고 끝내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중년은 여유롭게 스루메의 긴장을 깨트리며 어깨를 으쓱인다. 스루메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고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분명했다. 분위기 또한 말 못할 것은 아니었다. 지부장은 충분히 시간을 주고 있었고, 단지 이 상황에서 따라가지 못하는 건 스루메 뿐이었다. 말 못하는 이 심정이 본인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소용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3과를 이제 폐쇄할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하긴, 요새 일이 없긴 했지. 서류작업만 계속 올렸던 것 같아."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전부 아시잖아요." 스루메는 표정을 더이상 숨기지 않았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눈빛에 지부장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너와 함께 이 부서를 이끌어줄 인간이 없어서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음, 이해해 주렴 스루메. 우린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아. 인력보충을 못 해준 건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해." 젠장, 유감스럽다는 말만 이 사람한테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지부장은 항상 그랬다. 무슨 3과에 나오는 이야기만 하면 유감스럽다, 미안하다 소리만 했지 특별히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왜 그러는 지 영문을 몰랐지만 스루메는 어쨌든 굉장히 이 사람이 미웠다. 아무것도 안 해주면서 감정만 얘기하면 뭐 해, 행동이 없으니 감정에 진실성도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손을 떨릴 정도로 쥐였다. 난 당신이 미워 죽겠다, 아니 사실 이 미움의 감정이 여기로 향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눈빛 좀 거둬라, 사람 한 명 잡아 먹겠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연말정산에 섞인 이 사직서는 못 받아주겠는데."

"네? 저는 3과가 폐쇄되면 갈 부서도 마땅히 없는데 절 붙잡아서 어디에다 쓰시려고."

"네가 갈 부서가 왜 없어, 정보팀은 네가 없으면 곤란해져. 그리고 말했잖아. 우린 인력난이야. 평범한 사무직도 뽑기 힘든데 현장부서인 네가 빠지면 진짜 곤란하다고."

"저 현장에 안 나간 지 3년이나 됐어요."

"음,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럼 이제 나가면 되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어차피 사직서 같은건 1개월 이내엔 효력이 생긴다고요. 당신이 거부해봤자 나가는 사람을 막을 권리는 없어요. 어쨌든 저는 1달 안에 제 숙소도 뺄 거고, 인수인계.....도 할 거에요!"

"인수인계 할 사람은 있고?" 지부장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멱살을 잡아다 간사한 얼굴에 홍차를 들이붓고 싶었다. 그럼 주둥이를 좀 여물던가 할 텐데!

"지금 저 놀리시는 건가요?"

"음, 놀리는 거 맞아. 하지만 이건 진심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사람이 생길 지도 모르잖니. 그리고 우리가 그리 나쁜 조건으로 계약한 것도 아니고. 네 실적이 나쁘다고도 할 수 없어. 이건....사직에 이유가 없다고." 지부장은 사직서를 스루메에게 다시 드밀었다. 거절의 의사표시는 명확했다. 스루메는 그 사직서를 받아쥐었다. 손 안에서 종이 한 장이 의미없이 구겨졌다.

"제가 원래 하기로 한 일은 현장직이에요. 하지만 전 현장직 일에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고요. 부속부서에 들어가서 사무직 일을 도와주는 게 주가 되어 제 실적의 주를 이루고 있잖아요. 이건 제 입사계약과 완전히 별개입니다!"

"아니면 혼자 나가도 돼. 넌 아직 파트너가 남아있어. 서류상은 말이야. 그냥 네가 현장직 일을 하나도 안 맡아서 없는 거잖아. 의뢰 수리소에서 네게 차별적으로 의뢰사항 공지를 안 했니? 아니면 일부러 막던가 했어?"

"당신 절 죽일 셈이군요. 제 상황을 알면서도 아주 잘 그런 소릴...!"

"음, 아니야, 네 사격 실력은 아주 훌륭한 편에 속해. 그냥 네가 안 나가는 것 뿐이지. 넌 스스로 네게 하자가 있다고 생각해서 일을 나가지 않는 거잖아. 그러니까 사람이 없다느니 위험에 빠트리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죄다 핑계일 뿐이야. 일반인들도 총을 들고 직업군인을 선택하는 일이 있는데 네가 그걸 못한다고? 네 머리와 눈을 봐, 네 피와 입 안은 무슨 색이지?" 지부장은 스루메의 앞에 다가가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었다. 스루메는 그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팍 구겼다. 그 사람들과 내가 같아? 지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그들은 그 직업을 스스로 선택했어요. 제가 만약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지금쯤 평범한 전산업무를 맡는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었을 거에요.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요."

"우리가 계약할 때 내가 네 멱살을 잡고 목숨이라도 협박했던가?"

"논지 흐리지 마세요 지부장님, 저는 하등 쓸모가 없다고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누군가 인력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스루메는 그 소리에 눈을 부릅 뜨며 그를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새로운 인력을 뽑아도 3과에 넣어주지 않았잖아요! 제가 그걸 몰랐을 것 같아요?" 입만 살아서는 별 소리를 다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스루메는 저 기만스런 얼굴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주먹이 떨렸다. 원래 상사들이 다 이렇게 뭣같은 건가? 하지만 스루메는 이제 고작 24살이고, 이번이 첫 직장이었고, 마땅히 그걸 가르쳐 줄 선배가 지금은 없었기에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널뛰는 감정을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지부장이 원하는 대로 감정을 발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하지만 내가 이번에 정말 적극적으로 네 사표를 막고 싶은 이유는 곧 있으면 3과의 인력을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야. 정말로."

"제가 그 말을 믿을 만큼 지부장님께 신용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제 선배를 찾았다는 소릴 하고 싶은 거에요?" 스루메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지부장을 쏘아보았다. 불신이 가득한 목소리에 지부장은 웃으며 물러났다.

"비슷한 인과관계는 찾았다고 할 수 있지."

"정말로 나가시는 거에요?! 선배가 없으면 저는 어떡하죠!?"

"아니, 제가 없어도 잘 하겠죠. 하하하." 스루메는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전산실 한구석에서 그는 의자에 팔을 기댄 채로 직속후배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22살의 일반인 여성이였는데, 모든 사회생활이 처음인 탓인지 열정적이고 순하게 굴었다. 당황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기도 하는 평범한 사회 초년생. 우린 사무직에서의 선후배사이로 만났고, 그는 아마 내가 전 현장직이었다는 사실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스루메 씨는 그러니까 제 직속 선배였고... 그러니까, 좀 서운한 거예요. 어째서 나가는 거에요?"

"으음... 개인적인 사정이요...."

"여기보다 좋은 직장을 구하셨나요?"

"아뇨. 이제 백수죠." 스루메는 머쓱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떻게 '일을 안 줘서'가 사유라고 말할 수 있겠어? 아마 이 가여운 소녀는 그걸 알게 되어도 무슨 뜻인지 평생 이해하지 못할 텐데.

"하지만 선배는 능력자잖아요. 그, 저는, 음.... 솔직히 조금 걱정돼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알아요. 하지만 저는 말했다시피 능력을 하나도 못 쓰는 걸요! 그러니까 폭주의 가능성도 없고 위험성도 없고. 검사결과도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전 좀 특이하게 생긴 일반인일 뿐이에요."

"그치만 외관에서 오는 차별점이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맞다, 나는 특이하게 생긴 일반인일 뿐이다. 언제부터였지? 아직 백 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우리사회에는 크게 건강한 사람과 유병자가 섞여 살고 있다. 이 특이한 질병은 유전병과 닮은 것이라고 하던데, 아직은 연구가 제대로 진행중이라고 한다. 어쨌든 날 때부터 이 병은 갖고 태어나는 거라고. 이들은 날 때부터 극명하게 다른 것이, 멜라닌 색소에 의해 결정되는 특정한 부분,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같은 곳의 색이 특이하다고 했다. 이 정도는 염색이나 렌즈로 커버칠 수 있다지만 가장 문제는 피의 색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파란색. 따라서 입 안도 파란색이다. 이걸로 사람들은 유병자를 구분한다. 그리고 이들은 희한한 능력이나 파괴적인 기술을 쓸 수 있는데,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그냥 판타지 책에서 보던 마법이랑 비슷한 것도 있고, 신체능력이 비상하게 뛰어난 이들도 있고....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알게 된 때부터 그들을 유병자가 아니라 능력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가끔 이게 무슨 요인인지는 몰라도 폭주하거나 유병자와 타인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그런 유병자들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라는 게 역사에서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어쨌든 현재 사회에선 사회적 약자로 취급당하는 듯하다. 물리적인 힘은 일반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만, 절대적인 숫자가 훨씬 적고, 사회의 편견과 시선에 맞서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물론 누군가는 이들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발했다. 한때는 그저 위험적인 요인이 존재하니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게 옳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기도 했고. 다 옛날 이야기지만 현재까지 그런 기조가 없냐고 말한다면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아무튼, 그가 걱정하는 건 아마 이러한 부분이겠지. 내가 내 몸에 존재하는 많은 부분의 색에 의해서 사회적인 차별을 겪는 것을.

내가 일하고 있는 이 곳은 유병자의 폭주를 억제하고 치료를 병행하며, 그 능력을 올바른 사회적 공헌에 힘쓰게 하기 위한 기관이니 그런 차별은 훨씬 덜했다. 일이 없어도 3년이나 여기 근근히 붙어 먹고 살았으면 얘기 다 했지. 물론 종종 우리는 유병자와 일반인들 간의 분쟁이나 갈등 해결을 위한 전투에 투입되는 일이 잦고, 어떤 경우에는 정부의 임시군대의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일자리를 주니까. 일자리와 적당한 복지, 그리고 위험수당에 따른 많은 돈을 적절하게 챙겨주는 건 여기밖에 없으니. 다만 이곳의 문제라면 언제나 인력난인 것일까, 유병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도 유병자가 일하는 곳이니 위험에 휘말리기 쉽다며 기피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부장이 저렇게 잡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나는 비록 부모님이 두 분 다 유전병의 형질을 가졌지만,

아무런 능력도 없다.

진짜로.

나는 그냥 색이 다른 약골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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