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저주 혹은 기회

그런 동화를 읽은 적이 있었다. 마음씨 착한 거지가 온종일 구걸해 얻은 음식을 친구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가 끝내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 신은 그를 가엾게 여겨 두 번째 생을 내렸고, 거지는 귀족 가문의 막내딸로 다시 태어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문장으로 동화는 끝이 났다.

까마득한 어둠이 자신을 덮치기 직전. 히엘리는 다섯 별의 신에게 빌었다. 그 동화처럼 새로운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좋으니 이 마을만 떠나게 해 달라고. 

자신이 죽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히엘리는 다시금 눈을 떴다. 하지만 제 앞에 있는 것은 그 달콤하고 포근하다는 솜이불도, 대가 없이 웃어주는 새로운 부모님도 아니었다.

그저, 기겁한 표정으로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아주 익숙한 얼굴들뿐.

“……?”

“너는 분명 죽었을 텐데.”

스라하르의 수장, 운트랄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엘리의 몸이 ′저주′에 삼켜져 새까맣게 녹아내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면서.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히엘리를 괴물 보듯 쳐다봤다. 그 중에는 히엘리의 둘 뿐인 친구, 필레니케와 마야도 끼어 있었다.

“저도 제가 죽은 줄 알았는데요.”

옷은 검댕으로 지저분했지만 피부만큼은 깨끗했다. 그것이 신기해 손을 쥐었다 펴며 꼼지락거리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무기를 겨누었다. 철그럭 소리는 오래도록 귀에 남았다.

“……안 죽었나 보죠.”

결국, 그 난리가 있었음에도.

히엘리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얗던 모래사장은 검은 액체로 얼룩져 있었다. 기묘하리만치 새까만 웅덩이는 노을빛을 받고도 반짝임 하나 없었다. 그 웅덩이 하나하나가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의 숨이 멎은 자리임을 알았다. ‘저주’라 불리는 괴물은 그런 식으로 생명을 먹어치웠다.

그러니 분명 자신의 숨도 이 자리에서 끝났어야 할 텐데.

새롭게 시작하기는커녕, 이어져 버렸다.

그 많은 사람이 삶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도. 오직 자신만이.

짓씹은 볼 안쪽에서 피 맛이 났다. 가진 것 없는 아홉 살짜리의 소원은 들어줄 가치도 없었나 보았다.

살아남은 처지에 원망해 봤자다. 문제는 끊임없이 들이닥쳤다. 머릿수가 줄어도 괴물들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지원이 오기까지도 시간이 걸린다. 결국 소박한 인원으로 마을을 복구하고 식량을 구비하며 앞으로의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히엘리는 다리에 달라붙은 모래알을 툭툭 털고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습격은 지나간 모양이니, 수습을 도와드릴…….”

“멈춰라. 움직이지 마!”

수장이 거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노련한 전사의 흰머리가 노을을 받아 주황색으로 빛났다. 히엘리를 매섭게 노려보는 흉흉한 눈꺼풀 위로 주름진 미간이 꿈틀거렸다.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이면 활을 쏘겠다.”

“……그럼 계속 여기에 앉아 있을까요?”

“괴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라.”

“네?”

“저주가 네 모습으로 둔갑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생존자 모두가 납득하기 전까지는, 너를 스라하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다짜고짜 사람임을 증명하라니. 히엘리는 눈만 꿈벅였다.

“대답해. 증명하지 못하겠나?”

“…….”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 하나에 꽂혀들었다. 낱낱이 해체당하는 기분에 히엘리는 그만 사라지고 싶어졌다. 그 어딘가, 소꿉친구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연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을 즈음.

히엘리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수장은 이미 자신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대답하든 갖가지 이유를 붙여서는 자신을 죽이거나 쫓아낼 셈이다. 언젠가 그의 명령에 불복종한 사람들의 결말처럼.

많은 생각이 들어 눈앞이 핑핑 튀었다.

‘이 마을을 나가게 되는 건가? 드디어?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추방당하면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잖아? 갈 곳이라고는 마을 뒤쪽의 산맥 뿐인데, 나는 아직 늑대 한 마리도 못 이기는걸. 은빛늑대를 마주치지 않고 옆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어른 걸음으로도 일곱 밤은 걸린다는 거리를?’

적막이 길어졌다. 운트랄르가 활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시위가 당겨지며 화살촉에 반사된 빛이 히엘리의 눈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찰나.

“멈춰라.”

낯선 목소리와 함께, 화살은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흩뿌려졌다. 무기들이 방향을 틀었고, 히엘리도 목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언뜻 보기에도 질 좋은 검정색 로브를 두른, 붉은 머리카락의 이방인이 서 있었다. 그의 뒤쪽에서 해질녘의 망망대해가 언제나처럼 철썩였다. 사람이 진입할 수 있는 지형은 아니었다.

이방인은 길쭉한 고동색 손가락을 뻗어 공중에서 물건을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처럼도 보였다. 장신의 이방인이 꺼내든 것은 대륙 통행증이었다. 그것도 제국의 고귀한 자들에게만 발행해 준다는, 하얀 바탕에 금빛 글씨가 적힌.

그는 무신경한 얼굴로 명패를 들어 보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엘노아 제국, 중앙 마탑 소속. 주안 마거릿이다.”

제국 소속이라는 말에 수장이 활을 거두고, 마을 사람들도 서둘러 무기를 내려놓았다. 허겁지겁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주민들의 앞에서 운트랄르가 느릿하게 목례했다.

“스라하르의 수장, 운트랄르입니다. 고귀한 마법사님께서 어찌 이곳에 방문하셨는지요. ……보시다시피 한 차례 습격이 있었던지라, 걸맞는 대우를 해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마법사의 촘촘한 속눈썹 아래로 금빛 눈동자가 마을을 한 바퀴 훑었다. 그리고는 히엘리를 향했다. 그의 눈은 밝은 금색을 담고 있었다. 

“본론부터 말하지. 이 아이를 내가 데려가도 되겠나?”

아무런 감정도 깃들지 않은 사무적인 말씨가 쿡 박혀들었다. 마법사의 한 마디는 온 마을에 파문을 일으켰다.

히엘리의 가슴이 쿵쿵 요동쳤다. 마을 사람의 웅성거리는 목소리를 한데 모아 갈비뼈 안에 억지로 가둔 것처럼.

‘제국 사람이 나를 데려간다고? 왜?’

의문은 잠시였다. 수장의 고민도 길지 않았다.

“그렇게 하십시오.”

미련 없는 문장을 끝으로 소란이 잦아들었다. 수장의 얼굴에서 속내가 훤히 읽혔다. 차라리 잘됐어. 저 애가 어떤 위협이 될 지 모르는데 제국에서 데려가 주신다면야 안심이지. 노골적인 안도의 표정에도 히엘리는 그다지 상처받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히엘리도 마찬가지였다.

“좋다. 그럼 해산하도록. 다음날 아침 출발할 테니 묵을 자리를 마련하라.”

마법사의 명령이 울려퍼지고 마을 사람들은 분주히 할 일을 찾아 나섰다. 히엘리의 어깨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볍게 얹어졌다.

“이름이 무엇이냐?”

“히엘리…… 입니다.”

“그래, 히엘리. 따로 가져갈 소지품이 있다면 지금 챙기거라.”

“……네.”

마법사가 어서 준비해오라는 듯 턱짓했다. 은색 단발의 아이가 마을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자 사람들이 주춤했다. 불편한 기색이 자신을 향해 쏟아져도 히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박사박 발을 떼었다.

‘사실 개인 소지품 따위 있을 리가 없지만.’

히엘리는 점차 발에 힘을 실었다. 동쪽 산맥 사이에 세워진 거대한 장벽을 향해 질주했다. 바다를 등지고 마을을 가로지르며, 함께했던 이들의 시선을 동력 삼아서.

쿵쾅거리던 가슴은 달릴수록 점점 더 차분해졌다. 고요가 찾아온 가슴 한 자리에는 신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그동안 온갖 핍박을 받아가면서도 몰래 기도했던 결과가 지금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조심스레 싹을 틔웠다.

***

다음날 아침. 히엘리가 챙긴 소지품은 달랑 셋이었다. 평소 쓰던 검 한 자루와 낡아빠진 여벌의 튜닉 한 벌, 그리고 장벽 아래에 땅을 파서 숨겨 두었던 오래된 동화집 한 권까지.

마법사 주안 마거릿은 조촐한 소지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히엘리는 혹여 꾸지람을 들을까 입안이 바짝 말랐지만 마법사의 반응은 그것이 전부였다.

“한 가지 일러둘 것이 있다.”

“네.”

“내가 이 마을에 올 때는 마법을 썼지만, 너에게는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첫 번째 경유지인 라크라 지방까지 걸어서 가야 한다는 뜻이다.”

라크라 지방이라면 익히 들어 알았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인가. 즉 산짐승이 날뛰는 산맥에서 최소 일곱 밤 이상을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말이었다. 히엘리는 그의 의도를 짐작하려고 머리를 굴리다가 이렇게 뱉었다.

“문제 없습니다. 마법사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그럼 잘 따라오도록.”

마법사는 길죽한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는 마을의 외곽, 산으로 진입하는 입구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히엘리는 널찍한 보폭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발을 놀렸다.

아홉 해를 머물렀던 마을을 떠나는 일은 참 쉬웠다. 그저 사냥을 나갈 때 그랬듯이, 빽빽하게 설치된 울타리의 문을 열고 부드러운 갈색 흙을 디디면 되었다.

문을 닫기 전 틈새로 살피니 사람들 틈으로 필레니케가 밀빛 금발을 푹 수그린 채였다. 매일같이 이야기했던 소꿉친구건만 어제의 습격 이후로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작별인사도 하지 않는 친구가 야속하지는 않았다. ‘같이 떠나자고 약속했으면서, 나를 버리고 가는 거냐’라며 울상을 하고 있을 얼굴이 눈에 선했다. 어젯밤에 편지라도 남겨둘 걸 그랬다.

“두고 온 것이 있느냐?”

그 물음이 어쩐지 지체하게 만들지 말라는 질책으로 들려서 히엘리는 황급히 울타리를 닫았다.

“……아니요.”

친구들을 두고 왔어요. 그 말이 괜스레 목구멍에 맴돌았다.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일은 조금 아쉬운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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