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장난감

by 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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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한때 아이였다. 아이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라 어른이 되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아이 자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부정하는 순간 아이를 거쳐 어른이 된 스스로마저 부정하는 게 되어 버리고 마니까.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가 갖고 있는 가장 최초의 기억은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었다.

뭐 때문에 혼났었는지까지는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했지만 부정적인 기운이 직격하던 그때의 느낌은 꽤나 선명했다. 어른이 된 아이가 종종 생각해낼 정도로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 기억을 뿌리로 삼아 기억은 천천히 나이를 거슬러 올라갔다. 무작위의 과거가 무질서하게 떠올랐다 침몰하기를 반복한다.

다수의 희뿌옇고 영양가 없는 기억들이 한바탕 휘저어지고 나서 조금 의미있는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의 초등학생 시절인 것으로 추정된다. 초등학생들이 으레 그렇듯이 아이는 실내화 가방을 빙글빙글 돌리며 걷곤 했다. 별달리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기 보단 움직이고 싶어하는 몸의 의지를 적극 따른 거였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그날따라 실내화 가방의 입구는 제 속을 쉽게 내보였다. 입이 쩍 벌어지고 희고 작은 실내화가 휘릭 허공을 그었다. 실내화가 다다른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면 재빨리 실내화를 가방에 쑤셔넣고 시치미를 뗄 수 있었을 텐데.

가벼이 날아간 두 짝의 실내화는 앞서 가던 사람의 뒷모습을 이곳저곳 치고서야 땅으로 추락했다. 앞서 걷던 이는 난데없는 실내화 세례에 몹시 어리둥절한 모양새로 주위를 번듯거린다.

정면으로 마주친 눈에 고개를 숙인 아이는 사과의 말조차 내밀지 못했다. 주저하며 다가간 아이가 상체를 어정쩡히 숙이며 머뭇거리는 손길로 실내화를 끌어모았다.

실내화에 맞은 사람은 아이가 하는 양을 그저 보고는 다시 제 갈길을 바삐 떠났다. 아이는 이제 실내화 가방 돌리기 같은 것은 안하기로 굳세게 마음 먹곤 집으로 달음박질 쳤다.

그러나 이 기억이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아이가 굳센 다짐을 잊어버리고 다시 실내화를 공중에 풀었기 때문으로, 아이는 두 번째의 곤경에 빠지고 만다.

채 일주일도 되지 않는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에 명중시킨 사람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기에 아이는 과거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짐했던 걸 잊은 대가가 가볍지 않았어서 이 기억이 의미를 가진 거지만 이제 와선 무슨 소용인가 싶다. 모든 게 갑자기 부질없이 느껴져서 어른이 된 아이는 기억을 전환했다.

또다시 여러 기억들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닌다. 아주 사소하고 단편적으로 끊긴 기억들이 드문드문 뇌리를 장식했다.

식빵 테두리를 우유에 찍어 먹다 빠트린 기억, 개울에서 올챙이를 잡아보겠다며 몇 번이고 손을 뻗었던 기억, 손톱 아래로 흙이 가득 차는 것도 모른 채 구덩이를 팠던 기억, 친구와 그네를 탔던 기억,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던 기억, 열매를 따 입에 넣었던 기억, 학교 숙제를 베끼던 기억, 거짓말을 하다 들켰던 기억, 정말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조각난 기억들이 파도에 쓸려오는 조개 껍데기처럼 밀려왔다. 그러다 어느 기억이 조금 더 긴 분량을 가진 채 밀려왔다. 조개 껍데기가 아닌 둘둘 말린 종이가 들어있는 유리병쯤 되겠다.

바닥에 엎어지진 않았지만 여차하면 그럴 기세로 떼쓰던 기억이었다. 백화점인지 마트인지 실내로 보이는 그곳은 장난감 코너였다. 어쩌다가 거길 지나치게 된 건지 이미 할당량을 골랐는데 또 사달라 하는 건지 정확한 사정은 안개 속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장난감을 원하고 있었는지는 선명했다.

어릴 적에 한참 유행하던 굴리면 저절로 펴져 모양을 갖추는 장난감이었다.

동그란 구의 장난감을 자석으로 된 카드 위로 굴리면 구가 펼쳐지며 이런저런 형상들을 갖췄었다. 딸깍하고 펼쳐지는 그 소리가 유달리 경쾌하게 느껴졌다. 친구에게 허락을 받아 손에 쥔 장난감을 몇 번이고 딸깍거린 기억이 스쳐갔다.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감에 대한 열망이 아이의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을 거다.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사달라고 한 과거를 떠올리곤 작게 키득거렸다.

그래서 그걸 부모님이 사줬던가 안 사줬던가……. 잠시 고민해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장난감에 대한 기억이 고구마 줄기 캐내듯 끌려나왔을 뿐이다.

레고(lego)

조각조각나 있는 조립 가능한 플라스틱 덩어리. 작은 조각을 밟기라도 하는 날에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몸의 통제를 잃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는 레고를 좋아했다. 사실 어른이 된 지금도 좋아한다. 레고는 아이에게 보잘것없는 조각 하나가 어떤 거대한 형체에 기여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작고 볼품없는 한낱 티끌과도 같은지에 대해.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제한적이었고, 제대로 된 의견을 피력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중 아이가 고른 건 손에 꼽혔다. 선택의 자유가 있었을까.

분명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박탈당한 순간들만 떠오르는 건지.

씁쓸한 듯 쓸쓸한 듯 오묘한 쌉쌀함이 입안을 스쳤다. 이제는 어른인 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작은 방 안에서 새우처럼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으면 다시 아이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력감이 다시 피어올랐다. 아니, 사실 아이일 적에도 어른이 된 지금도 무력감은 신체일부처럼 붙어있었다.

어릴 땐 레고를 조합하며 자신도 어딘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변한 건 없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문댔다. 물기 하나 없이 버석하게까지 느껴지는 감촉에 눈을 꾹꾹 누른다. 레고, 레고를 조립하고 싶었다.

희망, 아이는 레고에서 희망을 봤고 어른이 된 아이는 과거의 희망을 꺼내고 싶었다. 자꾸 장난감에 생각이 미치는 건 희망을 엿보고 싶은 마음에서 였을까.

…서늘함이 올라오는 방바닥이 현실을 명징하게 일깨울 뿐이다.

아니, 아니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는 알고 있었다. 제 어린 시절도 그렇게 꿈과 희망이 넘치지 않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이 존재하고 땅이 있고 바다가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만큼 알고 있었다.

아니면 레고에서 희망을 쥐려 했을리가 없으니까. 생각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희망과 레고가 끈덕지게 자국을 남기며 뇌 속을 어지럽힌다.

부모님이 했던 말들이 기억난다. 돈이 없었다는 건 투정이었을까 실제였을까 힘들다는 건 습관같은 거였을까 너무너무 지쳐있었던 걸까. 그들에게 아이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었을 텐데.

때로는 사랑만으로 안 될 때도 있는 법이지, 하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도 어른이 된 지금도. 그들의 애정은 진짜였으며 그들의 힘듦도 괴로움도 진짜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열심히 조립했던 레고가 감정이 격해져 동작이 커진 어른에 의해 바닥으로 떨궈졌을 때는, 그래서 산산조각이 나 의미없는 조각들로 변했을 때는, 정말 많이 슬펐다.

부서진 장난감을 끌어안고서 할 말을 잃었었다. 오히려 어른이 된 지금 눈물 흘릴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작게 중얼거린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니 확실히 알겠다. 부서진 장난감이 상징하던 게 무엇인지.

그건, 아이의 부서진 유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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