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마지막

by 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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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런 일이 있다. 마지막 남은 한 입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상황이. 지금이 바로 그랬다. ㅡ는 눈앞에 놓인 큐브 모양을 닮은, 한입거리의 브라우니를 보며 맹렬히 고민했다. 식사를 마치고 간식을 찾는 위장에 적당히 넣어주던 브라우니가 이런 골치아픈 문제를 끌고 오다니. ㅡ는 난감한 듯 웃으며 두 가지의 선택지를 나열했다.

하나, 그냥 먹는다. 다만 이거 먹으면 왠지 체할 것 같다.

둘, 버린다. 그치만 맛있어서 더 먹고 싶다. 거기다가 버리기는 아까워!

ㅡ는 결국 후자를 택했다. 그릇을 들어 접시에 남은 조각을 쓰레기통에 털었다. 빈 접시는 포크와 함께 설거지 통으로 넣었다. 설거지거리를 넣고 나니 어느새 꽤 쌓인 접시며, 식기도구들이 눈에 밟힌다.

''피곤한데….''

이왕 생각난 김에 해야겠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집안일이고 나발이고 얼른 씻고 자고 싶어졌다.

''으으… 빨리 하자…….''

미뤘다가는 더 하기 싫을 게 뻔하다. 그냥 해치우자! 비장하게 고무장갑을 끼던 ㅡ는 문득 오늘이 12월의 마지막 날이자 일 년에 마지막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정말로 문득.

스쳐지나가듯이.

휙하고.

그리고 ㅡ는 깨달아버린 것이다.

자신이 무감각해졌다는 사실을. 그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도 자신의 생일도 연말도 새해도 이것저것 챙겼던 거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돼버린 거지.

아, 몇 년 전이 아닌가?

ㅡ는 멍하니 기억을 더듬었다. 손을 움직여 설거지거리들을 헤치우고 있지만 의식은 이미 저멀리 날아가버린 채였다.

작년, 재작년, 그 전, 그보다 더 전, 그보다도 더…

마지막으로 건조대에 투가리를 올려놓은 ㅡ가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탁,

쏴아아ㅡ

적당한 온도의 물이 ㅡ의 머리 위로 강하게 쏟아져내렸다. 귓가에는 온통 물소리뿐이다. 완전히 폭포에 갇힌 상태에서 ㅡ는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이제껏 당연시 여기던 것이 무감각해지면 어찌해야 하지?

이거, 괜찮은 건가?

아하하, 뭐야. 어떻게 아무런 느낌이 없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거나, 트리를 장식한다거나, 생일 선물을 받는다거나… 그런, 그런 거에 무감각해질 수 있는 거였어?

ㅡ는 당황했다. 왜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다가 허둥대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ㅡ는 깨달아버린 것이다. 설렘도 기대도 없는 사람은 빈껍데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샤워를 끝내고 나와 킨 텔레비전에서는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댕ㅡ

댕ㅡ

댕ㅡ

종소리에 맞춰 ㅡ의 마음에도 파문이 일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계속해서.

제야의 종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리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12월의 마지막 날이 저물었다. 한해가 지나갔다.

ㅡ가 맞을 새해는 과거 지나갔던 새해들과는 다를 것이다.

ㅡ는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입가에서 하얀 김이 올라왔다. 품 속에서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렸다. 봉투 안 내용물이 아직 따듯했다. 싸락눈이 약하게 내리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거리는 잔잔해보였다.

ㅡ는 예전과는 다르게 설렘을 담았다. 현실에 짓눌려 무감각해졌던 마음에 여유가 생긴 까닭이었다.

눈송이 하나에 기쁨 하나

눈송이 하나에 기대 하나

또 눈송이 하나에 행복 하나

하나씩 하나씩 내려오는 눈송이 송이들이 가로등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삶에 희망이 빛이 났다. 하루 하루가 제각기의 의미를 지닌 채 빛이 났다. 심장이 뛰고 있다, ㅡ는 살아있었다. 살아있기에 빛이 났다.

ㅡ는 예전과 다른 한해들을 보낼 것이다.

지금 막 지나간 한해의 마지막을 다르게 보냈듯이.

한 입 남았던 브라우니의 진한 초콜릿 향이 문득 ㅡ의 코끝을 스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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