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X에게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 그대에게.

To. 친애하는 X에게

X, 그대는 제가 없는 그곳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전 그대가 내 우주에서 사라진 지 2년 만에 겨우 원위치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대, X. 그대가 지내고 있을 그곳은 이곳보다 훨씬 더 따뜻한 사람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대를 X라고 부르는 점 서운해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야 그대의 부재에서 겨우 괜찮아지는 과정에서 살고 있는데, 그대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언급한다면... 이대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운하더라도 조금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미리 사과드립니다. 그대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에 그대는 날 이해를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 메일이며 카톡, SNS까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도대체 왜 굳이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면서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저의 진심이 닿길 바라는 제 마음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며 부디 제 마음이 전부 전달되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쓰는 시점은 그대를 조금이라도 놓아주기 위해 그대의 짐을 좀 정리했습니다. 그대의 흔적이 제집에 가득해서 이사를 하거나 정리를 해야 했는데, 그대가 말했었죠. 둘 중 누구든 먼저 떠나게 된다면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가기로. 그래서 X, 그대의 짐을 정리하던 도중 엎어진 액자 한 개가 있더군요. 그 액자를 세웠을 땐, 어제 찍은 것처럼 생생하게 웃고 있는 그대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겨우 괜찮아진다 싶던 순간, 그대를 보니 제 진심을 전하고 싶어지더군요. 그래서 집을 뒤져 먼지가 뽀얗게 쌓인 편지지 몇장을 발견했습니다. 최대한 실수하지 않고, 그대에게 마음이 전달되길 바라며 조심스레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대, X.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전 빛바랜 필름 속에서 꺼낸 오랜 추억처럼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 제가 친구들에게 이끌려 간 놀이공원이었습니다. 평범한 대학교 3학년이던 그 시점, 억지로 끌려간 그곳에서 교복을 입고 놀았었죠. 그렇게 신나게 놀다가 지친 전, 귀신의 집을 간다는 친구들을 버리고 혼자서 앉아 휴식을 좀 취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바라본 그 곳은 평화로운 봄날의 토요일 점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누구도 화가 나지 않은, 그리고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이들이 있더군요. 그들을 보며 혼자 앉아있었을까. 그들 사이에서 눈부신 빛이 나타났습니다. 그 빛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햇빛보다 더 강했었습니다. 겨우 눈을 제대로 뜨고 봤을 때 어떤 여자가 홀로 앉아있더군요. 그게 X, 그대였습니다. 그대를 그렇게 처음 만났었죠. 그대는 놀이공원에 피어있는 벚꽃보다도 더 아름다웠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대를 빤히 쳐다봤었나 봅니다. 그대가 그걸 알아챘는지, 절 바라보더군요. 그러더니 한번 웃으시곤 저에게 걸어오셨죠. 그땐 당황해서 그대로 얼어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나에게 왜 쳐다보냐고 물어보면 뭐라 답해야 될지에 대한 생각으로 제 머리는 시끄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질문의 예상을 벗어나 버렸죠. 

- 저기. 번호 좀 주세요. 

- ㄴ... 네? 

그 때 전 진짜 당황했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다가올 때보다 더. 제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대는 내 핸드폰을 가져가 그대의 번호를 눌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떤 누구보다도 밝게 웃으며 꼭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름이 굉장히 예뻤습니다. 저도 이름은 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당황해서 버벅거렸습니다. 박종성이라는 이름을 왜 그리 버벅거렸는지, 박쫑생이라고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대는 그 모습을 보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 쫑생씨. 꼭 연락해요. ㅋㅋㅋㅋㅋㅋ. 

진짜 쥐구멍에 숨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는 더 크게 웃으시더군요. 그리곤 그렇게 제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봄날의 꿈처럼 사라진 그대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고 그 자리에 한동안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귀신의 집에 다녀온 친구들이 뒤통수를 때리며 정신 차리라고 말할 때까지 전 그 자리에서 멍때리고 있었습니다. 뒤통수가 얼얼하자 그제야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다고나 할까요. 저도 모르게 그곳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친구들이 미쳤냐고 하면서 뒤통수를 너무 세게 때려서 얘가 정신이 나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 정상이었습니다. 완전히. 그저 사랑에 빠진 평범한 24살의 대학생이었죠. 저는 친구들에게 드디어 사랑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녀석들은 절 보더니 어떻게 생겼냐고 묻더군요. 24살 모솔이 드디어 사랑을 찾았냐며. 그대의 모습을 묘사하고 싶었지만,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대의 목소리뿐이었습니다. 제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리자, 너무 지쳐서 헛것을 봤냐고 하더군요. 그 녀석들이. 저도 그렇게 믿을 뻔했습니다. 그대가 준 그대의 전화번호가 없었더라면. 저는 그 친구들에게 전화번호를 보여주며 그대가 적어준 거라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번호를 준 사람의 얼굴도 모를 수 있냐고 말하더군요. 전 딱 한마디 했습니다. 여신. 그 단어가 그대를 묘사하기에 완벽한 것 같더군요. 내가 본 그대는 아프로디테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은 화이팅 해보라는 말과 함께 꼭 얼굴 알아내라는 말을 하더군요. 어떻게 사랑하게 된 이의 얼굴을 모를 수 있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구들 말이 맞더군요. 하지만 그대는 너무나도 빛이 나서 도무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 혼자 머리가 시끄러운 채, 놀이공원 폐장 시간까지 놀고 불꽃놀이까지 봤습니다. 그 불꽃놀이는 아름다웠지만, 그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빛나는 그 불꽃을 그대와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그곳의 저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 씻고 나왔더니 그대에게 연락이 와 있더군요. 

- 쫑생씨. 집이에요? 

뭐라 답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대는 여전히 날 쫑생씨라고 부르더군요. 제 정확한 이름을 알지 못해 그런 것인지는 알았지만 왠지 모르게 섭섭하더군요. 그대의 입에서 내 제대로 된 이름이 나오길 바랬습니다. 일단 그대에게 연락을 드리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 아 방금 집에 들어왔습니다.

너무 딱딱한가 싶어 보낼지 말지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대를 오래 기다리게 한 듯해 그냥 보냈습니다. X, 그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을 하셨습니다. 

- 근데 본명이 박쫑생인건가요? 

아...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셨더군요. 혼자 쿡쿡 웃으며 제 이름, 박종성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대는 이 이름보다는 쫑생이라는 별명이 더 정감이 간다며 쫑생씨라고 불러도 되냐며 정중하게 물어보셨죠. 그리고 전 조금 섭섭했지만, 그대가 그렇게 부르고 싶다 하니 어쩌겠습니까. 그러라고 해야죠. 그렇게 저희는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연락을 이어갔고, 그대가 먼저 잠이 들고 연락이 끊긴 뒤에야 저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심장이 너무 뛰었던 까닭이었던가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그날, 8시에나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는 매일같이 연락을 하고 잠이 들던 걸 반복했고, 저는 많은 걸 알았습니다. 그대와 내가 같은 대학교라는 사실을. 전 조리학과였고, 그대는 경영학과였더군요. 학교에서 우연히라도 그대를 마주치고 싶어서 매일같이 경영학과 강의실을 기웃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없더군요. 제가 그대의 강의 시간을 알 수가 없으니 매시간 기웃거리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그 짓을 했을까요. 그대를 만났습니다. 그대의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문 옆에 기대어 서 있었고, 때맞춰 나오는 그대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대는 눈이 커지더니 절 붙잡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귀만 빨개진 채, 저를 끌고 가는 그대가 너무 귀여워서 끌려가는 내내 웃음만 나더군요. 그대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저에게 말을 했습니다. 

- 여기까지 오면 어떡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저에게 뭐라 하는 그대가 그저 귀여웠습니다. X, 그대는 이미 익히 들었을 겁니다. 조리과에 엄청 잘생긴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제 입으로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그 소문 속 사람은 저였습니다. 그대도 알고 있었던 거겠죠. 소문에 휩싸이기 싫어하는 듯한 그대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그대의 머리를 쓰다듬었죠. 그대는 귀가 터지기 직전까지 빨개졌고,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 당돌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저 연하녀의 매력이 있더군요. 동갑이었는데도. 저는 혼자 피식 웃으며 학교에서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유유히 사라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제 팔을 붙잡더니 말을 했습니다. 

- 그... 점심... 같이 먹을래요? 

눈도 못 맞추고 말을 하는 그대는 햄스터 같았습니다. 저는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대는 맛있는 곳을 안다며 데려간 곳은 의외의 곳이었습니다. 생긴 건 파스타 같은 것들을 파는 레스토랑을 갈 것 같았는데 우리가 간 그곳은... 첫 데이트를 돼지국밥집에서 할 줄은... 저도 예상 못했었습니다. 잠시 당황했습니다. 그러자 그대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 의외죠? ㅋㅋㅋ. 저도 알아요. 근데 전 이런 한식이 좋거든요. 느끼한 것 보다는. 뭔가 먹고 나서도 속이 불편하지 않아서 행복하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걸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어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 큰 의미가 있었더군요. 그리고 그대도 날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물었습니다. 혹시 고백한 거냐고. 그러자 그대는 귀가 빨개지더니, 또 제 팔을 잡고 절 끌고 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능숙하게 주문을 하더니 날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처음 만난 그때의 당돌함과 함께. 

- 쫑생씨. 저 좋아하죠? 

당연한 게 아닌가요. 저는 그냥 웃으며 역으로 질문했습니다. 

- 어떨 거 같은데요? 

그대는 잠시 고민하더군요. 그때 볼 빵빵하게 바람을 넣고 고민을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습니다. 

- 음... 좋아하니까 제 연락을 받았겠죠? 

- 정확한 정답이네요. 

그대는 구슬이 굴러가는 듯 예쁜 목소리로 웃으며 좋아하더군요. 그 사이에 X, 그대의 얼굴에 약간의 수심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웃어 보였습니다. 

- 어? 농담곰 닮았다. 

저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농담곰이면...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서 웃는 그 캐릭터였던가요. 저도 몰랐는데 웃을 때 한 쪽으로만 웃었나 봅니다. 그대는 그 후로 쫑생씨, 아니면 농담곰이라고 절 부르더군요. 한 번씩 본명을 알려주었지만 그대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더군요. 뭐 그렇게 별 중요하지 않은 잡담을 했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 카페에 들렸다가, 그대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전까지. 그대가 사는 그곳은 부자들이 살 법한 그런 엄청난 대저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대에게 물어봤습니다. 이런 저택에서 혼자 사는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대는 능글맞게 웃으며 자고 가려고 그러냐고 묻더군요. 정말이지... 절 당황하게 할 수 있는 건 그대뿐일 겁니다. 너무나도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더니 그대는 웃어 보이더군요. 집에 부모님과 같이 사는 곳이라고 말을 하면서. 그 뒤에 그대는 몇 번 더 데이트 해주면 하나씩 알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승낙했었습니다. 그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인사를 하더니 그대로 들어갔고, 전 한참을 그대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대는 잠시 저에게 허락된 오아시스와 같은,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가다가 잠시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그렇게 저흰 거의 매일 만났죠. 시험 기간 2주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대에게 대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그런 클리셰가 존재하더군요. 그대가 재벌가 딸이라는, 그것도 외동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사는 그 대저택을 생각해보면 말이 아예 되지 안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진지하게 물어봤습니다. 왜 저에게 번호를 물어봤는지, 그리고 왜 그날 혼자 그곳에 있었는지. 그대는 이런 말을 해주더군요. 

- 정략결혼 상대가 있어요. 그리고 전 그 사람과 결혼할 생각도 없구요. 그날 그곳에서 쫑생씨를 만난 건 운명이었어요. 혼자 아무것도 하기 싫어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놀이공원에 가게 되었고, 그때 쫑생씨를 만난 거예요. 딱 보자마자 ' 아 저 사람이 내 운명이야. '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정략결혼 상대도 있는 그대가 나와 이러고 있는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그대는 별처럼 반짝거리는 새까만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 아빠가 그랬어요. 만약 그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을 데리고 오면 그 결혼, 없던 걸로 해주겠다고. 미안해요. 이용해서. 

이용이라... 절 이용하는 거라면 마음껏 이용해도 괜찮았습니다. 전 이미 그대에게 빠져들었고, 그대라는 물감이 저라는 물통에 점점 번져가고 있었으니 말이죠. 그대가 번진 그 물을 버려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에겐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우린 연인은 아니었죠. 그리고 더군다나 썸이라는 그런 관계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썸과 연애, 그 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대도 아마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1년 이상 그런 관계를 유지했고, 그대는 졸업 후, 그대의 아버지 기업에 인턴으로 들어갔습니다. 전 아직 대학교 4학년이었고요. 그대가 인턴으로 들어간 이후, 우리는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못해도 일주일에 1번은 꼭 만났습니다. 요일에 상관없이. 그리고 우린 여전히 반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서로 어색하기 때문이었겠죠. 처음 밥 먹었을 때, 말을 놓았더라면 그대와 전 그냥 친구로 남아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이런 관계로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대는 제 자취방으로 와 지냈고, 그렇게 그대의 물건이 하나둘씩 늘어갔습니다. 그대는 내가 해주는 요리들을 다 맛있게 먹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먹으러 가끔 일과가 끝난 밤, 저에게 한마디도 없이 찾아오기도 했었죠. 그때마다 귀찮지 않냐고 물어보는 그대에게 전 항상 이렇게 답했습니다. 

- 괜찮습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죠.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만들어 줄 테니까. 뭐 먹을래요? 

그대는 매일 메뉴가 바뀌었지만, 재료는 늘 있었습니다. 그대가 언제 올지 몰라 미리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X, 그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몰랐을 것 같지만, 그대는 눈치가 빠르기에 알았을 것 같군요. 그대를 제가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밥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그대는 씻고 나와 제 옆에 앉아 함께 영화나 드라마를 봤었습니다. 불이 다 꺼진 집에서 그대와 한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켜 로맨스, 액션, 공포 등등... 다양한 장르를 봤습니다. 공포를 볼 때마다 무서워하는 절 보며 그대는 웃겨 죽겠다는 듯 웃으셨습니다. 그때마다 전 무섭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된 거 같네요. 무서웠습니다. 로맨스 영화를 볼 때 그대의 눈은 유독 반짝거리더군요. 가끔 키스신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그대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대는 귀만 약간 빨개진 채 그 장면을 보곤 했습니다. 한 번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습니다. 저도 놀라서 빠르게 그대에서 떨어졌고, 그대도 귀가 터지기 직전까지 빨개진 채 그 자리에 얼어있었습니다. 그날 그대는 종일 고장이 나 있더군요.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습니다. 그날 이후, 그대는 로맨스는 빼고 다른 영화나 드라마만 찾더군요.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로맨스를 봤고, 그대는 키스신만 나오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또 한 번,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대가 이번엔 절 영영 떠나버리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대의 허리에 제 팔을 감고, 그대를 저에게 밀착시켰습니다. 그대에게서 저의 향기가 나더군요. 너무 행복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와 함께 소소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그리고 있더군요. 그렇게 6개월 정도 지냈을 겁니다. 그리고 그대가 내 우주를 떠나기 2일 전, 이번에도 연락 없이 제집에 방문했었죠. 왠지 모르게 힘들어 보이는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망설이던 찰나에 그대가 입을 때고 말을 했습니다. 

- 쫑생씨. 미안해요. 나 좀 멀리 떠날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저에게 걸어오시더니 절 꼭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 쫑생씨, 아니 종성아. 사랑해. 많이. 

처음으로 그대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왔고,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그대에게 말했습니다. 

- 언제 돌아오더라도 난 널 사랑해. 

그대는 눈물이 살짝 고인 커다란 눈으로 절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제 얼굴을 잡으시곤, 그대로 키스를 했습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대가 하는 대로 그저 받아들였습니다. 아주 멀리 떠나는구나.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수 있는 그곳으로. 그렇게 그대는 제 집에서 자고 갔고, 다시 한번 인사를 했습니다. 

- 잘 있어... 보고 싶을 거야. 많이. 

- 연락... 자주 해. 얼마든지 기다릴게. 

그대는 제 말에 희미하게 웃어 보이더니, 배웅하는 절 뒤로하고 떠나갔습니다. 왠지 모르게 이젠 그대의 그 뒷모습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전 그대가 사라질 때까지 창가에 서서 그대의 뒷모습만 바라봤습니다. 그대가 사라지고 나서도 계속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군요. 이렇게 첫사랑이 끝난 건가 라는 생각만 제 머릿속은 가득했습니다. 아직 그대의 흔적이 제집 곳곳에 남아있는데, 그대가 이리 떠나가면 전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인가요. 그다음 날, 그대가 영영 제 우주에서 사라진 그날. 일요일 아침 9시 뉴스. 첫 시작부터 그대의 죽음을 알리더군요. 속보로. HY 그룹 회장의 외동딸이 자택에서 자살한 채 발견. 그리고 그곳에서 유서 한 장이 발견되었다는 소식. 그 유서에는 정략결혼은 죽어도 할 수가 없다,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평생을 하고 싶지만 그대의 아버지가 그 사람을 어떻게든 죽이려 했다는 것, 매일 정략결혼 상대에게 정서적으로 폭력을 당했다는 것, 그래서 그대가 죽지 않으면 이 지옥을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다는 얘기까지. 9시 뉴스를 보는 전 제 심장을 가위로 도려내는 듯 아프더군요. 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종일 울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당시 저는 X, 그대가 왜 저에게 어떠한 마지막 편지도 남기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이제서야 발견한 그대가 제게 남긴 짧지만 진심 어린, 그런 편지가 있더군요. 저도 몰랐습니다. 그대가 가장 좋아하고 제가 가장 많이 사용하던 그 부엌 찬장 속에 놓여있더군요. 얼마 전에 조심스레 열어보았습니다. 그 편지를 다 읽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대가 남긴 편지 속 내용은 이러하더군요. 

쫑생씨. 아니 종성아. 갑자기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네.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아서 반말 좀 할게. 마지막에는 너에게 조금이라도 친근한 사람으로 남고 싶거든...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갈게. 나 이제 도무지 살아가기 힘들어... 매일같이 정략결혼 상대인 그 미친 새끼가 나한테 욕을 퍼부으며 너와의 관계를 정리하라고 하고, 아빠는... 널 어떻게든 나한테서 떼어내겠다고 그래. 아마 널 죽이려는 거겠지... 그냥 아빠한테 네가 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걸. 도무지 난 그 미친 새끼의 협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널 포기해야만 하더라. 평생 너랑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하겠네, 이젠. 고마워 종성아. 덕분에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너무 행복했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연락도 안 하고 찾아가도 웃으며 맞이해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한 10년 만에 겪어보는 그런 다정함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자주 널 찾았나 봐. 그리고 그날. 네가 내 이마에 입맞춤한 그날. 솔직히 키스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어. 키스를 하면 그 모든 게 사막 가운데 있는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종성아, 사랑해. 이제야 너한테 진심을 전하게 된 것 같네. 더 오래 너의 곁에 남고 싶었는데... 정말 미안해.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게. 네가 언젠간 내 곁에 돌아오는 그날, 물어볼게. 날 잊고 새로운 사랑을 잘 찾았는지. 나한테만 얽매여 살아가진 않았는지. 너의 남은 그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았는지. 종성아, 그리고 나만의 쫑생씨. 다시 만나게 될 그날까지. 안녕. 

이런 편지였습니다. 왜 빨리 알아채지 못했던 걸까, 그대가 이렇게 힘들어했다는 걸. 그대는 저에게 반말을 썼지만, 전 도무지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우리의 이 관계가, 이 사이가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관계로 끝이 나는 걸 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대라는 세계가 무너지고, 오로지 저만 남은 이곳에서, 전 아무래도 그대 말처럼 새로운 인연을 찾아 나가야겠죠. 위에 있는 눈물 자국들은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게 마지막 편지지인지라, 새로이 다시 쓸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게 더 진심이 우러난 편지일 수도 있겠죠. X, 그대. 그래서 그대가 지내는 그곳은 따뜻한가요? 그대에게 모두 잘해주리라 믿습니다. 그대는 봄날의 학교 교실에 들어온 4교시의 그 햇빛처럼 따뜻한 사람이기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대를 사랑하겠죠. X,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 그대. 내 우주에서 조금만 더 빛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직 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대를 떠나보내기엔. X, 아니 내가 가장 사랑하고 사무치게 그리운 여주씨.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길고 장황한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몸 건강히 지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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