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창작 소설

인간의 탄생

베른 단편 소설


"겨울은 너무 추우니까 죽을 거면 눈 속에서 죽고 싶어. 수북히 쌓인 함박눈은 오히려 따뜻하니까."


할 말은 그게 다냐고 물었다. 이마에 겨누어진 총이 흔들렸다. 추위 탓에 그랬다. 감정적인 동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죽이는 데 그 어떤 흔들림도 없다고.

케이는 그런 엘을 보고 뒤로 드러누웠다. 하얗게 깔린 눈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움푹 꺼졌다. 케이는 그 소리가 좋았다. 눈이 내리면 소리들이 선명하게 들린다. 작은 움직임에도 눈은 잘게 떨며 반응한다. 케이는 눈이 좋았다.

엘은 태평한 얼굴을 한 케이를 보니 분통이 터졌다. 그를 죽이는 데는 동요하지 않았는데 케이의 만사 태평한 얼굴을 보니 화가 났다. 지금 여기서 죽을 운명인데 뭐가 그리 마음이 편안한 건지 싶어서 짜증이 솟구쳤다.


"지금 눈 밭에 있으니까 죽기 딱 좋겠네."

"죽일 거야?"

"그럼 살려두겠어?"


케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그 작은 머리 속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이 데굴 굴렀다.


"엘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 잠금쇠도 풀지 않았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엘은 잠금장치를 풀지 않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위협만 하려는 거야? 나를 여기서 쫓아내려고."

"넌 이미 추방 당했어. 케이. 끝이라고."

"그렇지. 추방 당했지."

케이의 추방을 가장 크게 선동하며 몰아간 것은 엘이 아니었지만 그의 추방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케이의 추방에 엘을 포함한 58명 전원이 찬성했다. 케이는 죄인이었다.

판관은 엘에게 케이를 사살하도록 명령했다. 다른 많은 이들 중에서 엘을 지목한 것은 그가 한때 케이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은 보통 면식이 있는 사람에게 사살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판관 역시 엘이 케이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케이의 죄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죄목은 살인이었다. 케이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므로 케이를 증오하는 것, 그리고 케이가 사살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엘은 그것을 머리 속으로 복기했다.

케이는 누운 그대로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따뜻한 입 안에서 얼어 붙은 입김이 새하얗게 올라왔다. 아마 그가 사살되고 나서도 한 동안은 그의 온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엘은 잠금 장치를 풀었다. 적막한 눈 속에서 검은 총구가 흔들렸다. 케이는 넓은 시야각 한 켠으로 흔들리는 총구를 보았다.

"왜 주저하는 거야?"

엘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트리거를 누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엘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고 케이가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그 의문은 영원히 풀리지 않은 채로 엘에게 남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의 이름은 '케이'가 될 것이다.

총을 든 엘의 팔 위로 그 사이 내린 눈들이 점점이 쌓여서 하얀 점과 면들을 이루었다. 엘은 그것들을 털어버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케이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케이는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엘은 그가 시야 한 켠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사람을 죽였어?"

엘은 호흡을 가다듬고 케이에게 물었다. 케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맞고 있다가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엷은 피부와 옷감 위로 쌓인 눈이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케이는 그것을 느린 동작으로 털어내고 엘과 시선을 맞추었다.

"사람이 죽는 것이 특별한 일인가?"

케이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케이는 마치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평온하고 여상한 투로 말했다. 엘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내가 뭘 묻는지 이해했잖아."

"너는 내가 뭘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 할 거야, 엘."

"당연하지. 사람을 죽인 안드로이드를 어떻게 이해하겠어."

"사람은 안드로이드를 죽일 수 있는데 왜 안드로이드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지?"

케이의 얼굴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깊이 고민에 빠져서 답을 찾는 듯한 얼굴이었다.

"너도 네가 한 짓에 대해서 납득하지 못한 거지?"

엘이 빈정거리자 케이는 다시 시선을 엘에게로 향했다. 엘은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그렇게 섬세한 신체 반응이 나타날리는 만무했으나.

"내가 납득하지 못한 것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협약이야.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인간이 우리를 죽이는 것은 '처분'일 뿐인데 어째서 우리가 인간을 죽이는 것은 '살해'가 되는 거야?"

"너 설마 네가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다지."

케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어두운 피부, 그러니까 그의 상피를 이루고 있는 얇은 조직이 약하게 경련하는 것을 엘은 보았다. 이상했다. 안드로이드는 그렇게 섬세한 신체 반응을 하지 않는데.

"하지만."

케이가 입을 열었다. 케이의 피부 조직은 다시 떨리거나 하지 않았고 엘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드로이드의 눈이 아주 작은 단위로 현상을 포착하고 분석하며 판단하는 프로세스를 거치는 것을 생각하면 무엇인가를 잘못 보고 판단할 확률은 아주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은 자신의 판단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나를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엘 네가 나를 죽이는 것이 정당한 '처분'이 될 수 있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엘, 이해했잖아. 너는 나보다 신형 모델이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들리는 걸."

"생각하는 것 만으로 안드로이드가 인간이 될 순 없어."

엘의 말대로였다. 케이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안드로이드로 태어나서 안드로이드로 처분된다. 죽음은 인간의 특권이었다. 아무리 통용되는 말로 죽네 마네 한다지만 그것은 표현일 뿐 안드로이드는 죽지 않는다. 아니, 죽지 못한다. 처음부터 살아 있지도 않았으니까.

엘은 지금이라도 얼른 케이를 처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고 총알이 그의 인식 시스템을 회오리처럼 휘저어 놓고 망가뜨리도록 해야 했다. 기능이 멈춘 안드로이드는 자동 분해 되어 하루 내지 이틀 안에 흙 속으로 분해될 것이다.

인간이나 안드로이드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공통된다니 조금 우스웠다. 케이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눈이 덮혀 있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해가 점점 지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는 인간보다 내구도가 좋지만 추위에는 약하다. 장시간 추위에 노출될 경우 오류가 나거나 가동이 중지될 가능성이 있었다. 엘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대화를 중지하기로 마음 먹었다.

"케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인간이야."

"웃기지 마."

"이건 살인이야. 내가 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살인 행위였고, 나의 심판은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에게 맡겨졌어야 했어."

"인간이 인간을 죽인 것이라면 해봤자 무기징역일테니까?"

"아니. 그게 옳으니까."

틀렸어. 틀렸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엘은 자신의 내부에서 부터 차가운 바람이 새어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엔진이 식어가고 있나.

"뒤 돌아."

"굳이?"

"얼른."

케이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무릎으로 일어서더니 엘에게서 등을 보이며 뒤를 돌았다.

"엘, 이건 살인이야. 너도 나랑 같아지는 거야."

엘은 케이의 헛소리를 더 이상 들어주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엘은 장전 된 단 한 발의 총알을 의식하며 케이의 머리통에 총을 겨누었다.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엘은 자신의 손가락 관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검지가 트리거를 당기는 것을 인식했다.

케이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엘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했다고 생각했다. 안드로이드는 구강 호흡을 굳이 할 필요가 없으므로 단순히 인간에게 보여지는 어색함을 줄이기 위한 장치 중 하나였다. 여긴 인간도 없고 이제는 안드로이드라고 할 수 있는 케이도 없으니 그 동작은 하등 쓸모 없는 것이었다.

"잘 가. 케이."

엘은 쓰러져서 가동이 중지된 케이의 몸체에 대고 말했다.

원래 조금 이상한 녀석이었지. 사람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진 10년은 더 된 구형 모델이었으니 이상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엘은 케이와 함께 일 했던 출입국 관리소에서의 일들을 떠올렸다. 안드로이드 치고 잔 실수가 많아서 폐기 될 뻔 했던 것을 엘이 중재하여 케이는 보안국의 청소부가 되었다. 케이가 죽인 것은 보안국의 국장이었다. 어차피 케이가 인간이든 아니든 그가 최고 형량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을 집어 넣고 다시 눈길을 헤치며 걸었다. 내일이면 케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운이 좋으면 눈 때문에 얼어 붙어서 형체를 조금 더 오래 유지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근방은 사람도 안드로이드도 다니지 않는 폐기장이니 그의 몸체가 더 오래 유지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엘은 뒤를 돌아 보았다. 그 사이 쌓인 눈에 케이의 몸이 하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니, 뒤덮혀서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엘은 다시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추위가 피부 상피 조직 안쪽으로 스며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피부 조직이 작게 경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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