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standard cherisher 14
칡 뿌리와 등나무가 서로를 의지해서 휘감아 오를 때, 자립할 수 없었던 나무들이 곧게 서서 자랐다.
지금까지 칡나무와 등나무가 마주쳐 성장하기 시작한 이야기였다.
아침이 오자 맥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저의 다리로.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나 한 손과 한쪽 팔로 익숙하게 옷을 챙겨입었다. 이젠 맨살에 닿는 차가운 아침 공기도, 잉게르에게 가벼운 장난을 걸며 그를 깨워주는 것도, 한 손으로 열심히 식자재를 다듬다가 잉게르에게 핀잔을 듣는 것도, 식사 내내, 정리하는 내내, 집안을 돌아다니거나, 잠시 집을 나가 숲속을 같이 산책하면서 그의 곁에 늘 잉게르가 있고.
손을 잡거나, 코를 비비거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선잠에 빠지는 것들. 모든 것이 익숙하고 당연해졌다.
“오늘 오후 다섯 시에 내 친구 두 명과 술을 마시며 놀 예정이다.”
잉게르는 공용어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소리를 내 말했고, 맥스는 익숙하게 손에 쥔 펜을 능숙하게 움직이며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문자를 써 내려갔다. 잉게르는 그가 쓰는 것을 찬찬히 바라봤다. 맥스가 눈치채고 몸으로 막아버리기 전까지는.
-아, 보지 말라고….
-아니, 어차피 제가 채점 하면서 볼건데…!
-...창피하니까 한꺼번에 놀려….
-이미 틀릴 거라고 확신을 하면 어떡해요….
-....
-아~ 알았어요~ 안 볼게요. 틀려도 안 놀릴 테니까 편하게 써요.
-...
맥스는 부릅뜨고 잉게르를 노려보던 눈을 내리깔고 제 앞의 종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끔 잉게르를 날카로운 눈으로 힐끔힐끔 훔쳐봤지만, 그이는 고개를 돌리고 먼 산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문제 줘….
"좋아요.... 이거랑 거래할 말랑이 있나요?"
맥스는 ‘그게 뭐지?’라는 얼굴로 그 사람을 바라봤지만, 잉게르는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후로도 잉게르는 알 수 없는 받아쓰기 문제를 내기 시작했다. 어라 잠깐만….
"오늘 같이 시장에 다녀올까?"
-...오늘... 같…. 이... 시장에….
"창고정리 할 건데 좁은 곳에 들어있는 거 대신 꺼내줘"
-창…. 고…. 정리…. 할 건데…. 좁은..은….
"잉게르 사랑해~"
-잉게르…. 사…. 랑….
-킥킥….
-...? 야, 이거…!
-아~ 저 사랑한다고요~? 아이 기뻐라~
맥스는 잠시 얼빠진 얼굴로 잉게르를 바라봤지만, 곧 저도 새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렇게 장난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 왜 이렇게 날을 세워서 잉게르를 원망한 거지? 내가 틀리더라도 잉게르는 날 진지하게 놀리진 않을 텐데. 기껏 해봤자 어딜 틀린 건지나 짚어주겠지….
-....그래, 그런 것 같네….
-...헤헤….
잉게르는 더 이상 맥스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팔 한 짝의 기억이 그의 가방에서 뽑아낸 기억과 거의 비슷하기에, 맥스는 이제 보호가 필요한 기억상실 환자가 아니었다. 행복한 농담을 나누다가도 문득 제 팔을 돌려달라고 보채는 당당한 자아를 가진 투견이었다. 물론 팔을 돌려달라고 보채는 말은 자연스럽게 못 들은 채 했지만.
-...야
-네?
-...나 다리 붙은 지 몇 주는 지난 거 같은데. 팔 안 돌려줄 거야?
-아~…. 음~…. 글쎄요~…. 어…. 맥스, 받아쓰기 다 하고 창고정리 도와줄 거죠?
-말 돌리지 말고.
-아…. 음…. 어…. 그…. 글쎄요…. 음…. 글쎄요….
-했던 말 또 하지 말고. 그냥 있는 대로 말해. 주기 싫다면 싫다거나, 뭐 엿 바꿔 먹었다면 솔직히 말하라고.
-아…. 안 바꿨어요…! 지하에 그대로 잘 있는 거 알면서…!
-그럼…. 다리가 안 나았나? 그래서 붙여주기 꺼리는 거야?
-그…. 그것도…. 아닌데…. 맥스 당신 지금…. 엄청 건강한 상태에요….
-그럼 뭔데? 왜 안 돌려줘.
-...
-...
잉게르는 눈을 어디에 둘지 찾지 못하고 방 안 여기저기를 시선으로 훑었다. 뭔가 핑곗거리를 찾는듯하게 당황한 얼굴이다. 맥스는 그 얼굴을 잘 안다. 입에 과자 부스러기를 잔뜩 묻히고는 쿠키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말하던 어린 동생의 얼굴. 열심히 먹어 치웠으면서도 누이의 몫을 먹어버린 것이 미안한지 잔뜩 당황한 그 눈이었다.
-...잉게르. 화 안 낼 테니까 말 해줘.
-...왜 갑자기 어린애 타이르는 말투에요?
-그럼 아냐?
-아니에요.
-아니라고? 정말?
-...그런 거…. 아닌데….
-잉게르.
맥스는 그런 잉게르를 사랑스러운 동생을 보는 눈으로 바라봤다. 평소엔 그렇게나 착한 동생이니, 이 정도의 작은 실수는 어린이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성장 과정이었다. 자, 내 팔 가져간 거 오래전에 용서해줬으니까, 이젠 돌려줄 차례야.
맥스는 잉게르에게 가만히 미소를 지었고, 잉게르는 그 미소를 이길 수 없었다.
-.. ... 당신 꼭…. 팔 돌려받으면….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말하잖아요….
-내가 그랬어?
-... ... ...
-...떠나긴 떠날 거야.
-...
-그리고 일단…. 익숙해지긴 했어도 말이야…. 밥 한번 먹기도 꽤 불편하고, 부엌에서 요리하는 거나 설거지도 힘들어.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 그게 다야.
-... 방금…. 진짜로 떠날 거라고 말 꺼냈으면서…. 그런데 제가 어떻게….
-잉게르. 날 사랑한다고 말했지?
-....그런데요…?
-나도 사랑해 잉게르.
-... 그래서요…?
-...왼팔도 어서 돌려줘.
-... 떠날 거…. 죠…?
-응.
-...싫어요. 떠나지 마세요….
-...잉게르. 내 왼팔 돌려줘. 알았지? 내일 아침에.
-아니…. 안 해줄…. 건데….
-잘 부탁해.
-...
맥스는 마지막으로 싱긋 웃었고, 잉게르의 어깨를 한번 토닥이고 일어서서 그를 꼭 안았다.
-...갈 준비나 해야겠다. 산 아래는 봄이니까…. 얇게 입어야 하려나?
-...보온 마법…. 걸린 거 하나 줄게요. 더우면 벗을 수 있게….
-고마워.
-... ...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잉게르는 도저히 뱉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말이 생각보다 건조하게 잘 나오고 있음에 스스로 놀랐다.
-...편지…. 빨리 도착하는거…. 대신 써줄 수 있어?
-네…. 쓸 내용이 많은가요?
-별로 없어.
잉게르는 맥스의 받아쓰기 시험을 위한 종이 뭉치 중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자…. 보낼 곳은 어디며…. 누구한테 뭘 쓸 건가요?
-꼭 대필소 직원처럼 말하네….
-그런데 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죠 뭐….
-ㅎㅎ…. 뭐….
맥없이 웃으며 잉게르의 옆으로 앉았다. 이 따뜻한 공용어 선생님은 펜을 쥐는 모양새도 곱고 힘이 있었다. 맥스가 사랑하는 수많은 모습 중 하나였다.
아버지, 차콜, 도지에게.
아무 말 없이 나와서 미안하다. 그럴 사정이 있었다.
생각보다 길게 나오게 된 것 같아 연락한다. 곧 돌아가니 걱정 말고 있어라.
맥스 로스카이 II
-그게 다예요?
-...뭐가?
-....아, 아녜요….
-글씨 쓰는 것도 어려운데…. 멍청하기까지 해서 멋진 글 같은 거…. 생각도 못 하거든.
-아이, 그렇게까지 뭐라고 한 적 없어요.
-...미안. 좀…. 그런 거 있나 봐…. 자격지심이니 뭐니 하는 거.
-제가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겠어요.
-자격이라니….
-...당신이 전에 그랬잖아요…. 부잣집 가출청소년이라고….
-..아, 그랬었지….
-...거의 맞으니까요….
-나 참…. 됐어. 말할수록 이야기 꼬인다.
-그렇지만….
-뭘 자꾸 사과하려고 드는 거야? 내가 글 못쓰는데 네 잘못이냐?
-그…. 그게….
-넌 나한테…. 코볼트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줬잖아…. 글자도 가르쳐주고 말이야. 안 그래?
-그…. 그거…. 괜찮았나요…? 아니, 저…. 괜찮은 거에요…? 고작 그 정도로….
-말 했잖아? 네가 나한테 사과할 것도, 보상해줄 이유도 없어. 난 그냥 네 호의가 눈물 나게 고마운 것 뿐이야.
-....
-막말로…. 네가 나를 불법 격투장으로 이끌었냐? 아니지?
-아…. 아아…! 맥스…. 그렇게 말하면….
-그래 인마. 괜히 사과고 뭐고 하지 마.
-그…. 네…. 알겠어요….
잉게르는 편지를 마무리하고 편지 봉투에 마법을 불어넣었다.
마력이 달라붙은 편지지는 혼자서 이리저리 접히더니 종이접기로 만든 듯한 종이 나비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윽고 날갯짓을 시작하더니 찬바람을 따라 나풀나풀 창밖으로 사라졌다.
종이 나비가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슬쩍 미소 지었다.
내일이면 이별이다.
그런데도 지금 행복해서 미소가 나왔다.
이 불안한 행복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잉게르는 맥스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천천히 그와 가까워졌다. 불안함이 곧 사랑이었다. 금방이라도 떠날 듯이, 사라질 것 같이. 먼 곳을 바라보는 그 눈이 저를 사랑하게 했다.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해서 모든 사람의 눈에서 사라진 불쌍한 어린아이. 제때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해 무엇이 결핍된 건지도 모르고 아무나 골라잡아 제 인형으로 만들려는 이 바보 같은 아이를….
그래, 내가 널 거둬줄게.
언제 어느 때에 방문하더라도 춥디추운 어느 만년 설산 한 구석. 이 산의 사계절을 아는 이가 있다면 따뜻하다고 말할 영하 한 자릿수의 온도.
봄이다. 생명이 움트는 봄이 찾아왔다. 영영 차가울 거라 믿었던. 영영 변하지 않을 거라 믿어왔던 만년설에도 봄은 온다.
맥스는 양손으로 짝 소리가 나게 박수를 쳐봤다.
양손이 아렸다.
왼손도, 오른손도. 깊은 흉터가 남았지만, 어쨌든 튼튼히 잘 붙어있다.
-...어디 아프진 않아요? 접합부가 시리다든지 열이 난다든지….
-멀쩡해
-안 아픈 척 하는 건 아니고요?
-아니야 정말로 멀쩡해.
-....
잉게르는 맥스가 앉아있는 소파 너머로 놔둔 가방을 힐끔 바라봤다. 어제 예고한 대로 팔을 붙였으니, 그대로 저 가방을 들고 떠나겠지.
영영 떠나버릴까? 돌아오진 않을까? 나를 중앙청에 신고…. 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영영 너를 다시 볼 방법이 사라지는 걸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당신 안 가는 생각.
-갈 거야.
맥스는 가벼운 봄 잠바를 두 손으로 들어 옷깃을 꼭꼭 닫고는 따뜻함을 유지하는 마법이 담긴 목걸이를 걸었다. 팔을 뻗어 가방을…. 가방이….
-..가방 내놓고.
-...떠날 거예요? 정말? 영원히?
맥스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언가 생각하더니 아차! 하는 얼굴로 변했다.
이제 알겠다는 듯한 미소 사이로 작은 웃음을 흘리며 잉게르에게 팔을 뻗어 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곧장 등 뒤로 메고는 애인에게 미소 지었다.
-다녀올게. 자기야.
그리고 잉게르가 미처 다른 말을 꺼내기 전 뒤돌아 달려가듯 집을 나섰다. 난생 처음 소리 내 뱉어본 단어였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기 전에 숨을 참아가며 달려 나왔다.
이만큼이나 확신을 준다면, 불안해하진 않겠지.
갈 葛은 시간이 쌓이고 성장하는 것을 회피한 채 만년설에서 저를 길들인 등 燈을 기다렸다.
등은 산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더욱더 성장하라고, 할 수 있다고. 봄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저를 길들인 갈 에게 돌아가기 위해. 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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