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04)

사내가 어딘가 가리키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옷집 기와 담장 위, 금빛의 탈을 쓴 자. 청담이었다. 그는 키가 컸고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가려져 있으나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귀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청담이 높은 담장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거기, 비켜주시겠소? 그 자리가 마음에 드는군.”

그의 손짓을 따라가다 보니 그 끝엔 지성이라. 그가 어리둥절하여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 선 이들이 물러서 둥글게 자리를 만들자 그와 류도 뒤로 조금 물러섰다. 청담이 가볍게 날아 마련된 자리로 내려앉으니 그 모습이 나비와 같아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저 탈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얼굴이 너무 추해서 가린 것 아냐?”

“글쎄. 어쩌면 엄청난 미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윤 도령처럼?”

옆에 있던 이들의 말에 청담이 지성에게 다가왔다. 탈 속의 눈동자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 지성이 흠칫 몸을 떨자 청담이 몸을 돌려 말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터이니 모두들 앉으시오.”

그의 목소리가 마당에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류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깔고는 멍하니 청담을 보고 있는 지성을 앉혔다.

“왜 그러시오, 윤 도령?”

“아, 아닙니다.”

고개를 갸웃하던 지성이 류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으나 그는 지성의 반응이 퍽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류가 계속 지성의 옆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여전히 웅성거리자 청담은 손가락을 들어 제 입술 위로 가져다 댔다.

“쉬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이들의 소리가 사라지고 그 넓은 마당이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고맙소.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지. 오늘 여러분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청담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와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큰 파도를 일으켜 청중들을 집어삼켰다. 그가 이끄는 말(語)이 달리는 수레는 느리고 빠르게 달려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너른 평야로도, 복사꽃이 만발하는 무릉도원으로도 데려다주었다. 사람들은 청담의 들숨과 날숨 하나에도 집중하여, 그가 잠시 숨을 고를 땐 그들도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집중하는 와중에도 지성의 표정은 여전히 묘했다. 여덟 팔八자를 그리는 그의 미간은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의식적으로 펴질 뿐이었다.

“어디 불편하오?”

류의 속삭임에 지성은 고개를 젓고는 미소 지어 보였다. 이야기가 끝나고 청담은 가볍게 의복 집 담 위로 올라섰다.

“거기 용모 빼어난 도령께선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눈치인데?”

청담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와 닿자, 지성이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닙니다. 청담 선생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집중하느라 선생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지성의 말에 청담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뭐, 결례까지야― 하고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납시다!”

바람처럼 청담이 떠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생각에 잠긴 듯한 지성의 모습에 류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말해보시오.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소?”

“예전 청담과 오늘 본 청담이 다른 사람 같아서요.”

“다르다고? 어떻게?”

그리 물었지만, 이야기 내내 지성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그로서는 전에 청담의 이야기를 들었었더라도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그게, 말투나 이야기하는 투는 비슷한데, 몸태라든지 음성이 조금 다른 것 같은……, 하긴 꽤 오래전 일이니 그저 제 착각이겠지요.”

류는 모호한 지성의 말에 더 묻고 싶었으나 어쩐지 씁쓸하고 멋쩍은 듯 웃는 그의 눈에 입을 다물었다.

옷집 앞마당을 벗어나 말없이 걷다 보니 해가 벌써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나둘 가게에 걸린 등불이 켜지며 거리를 밝히기 시작하자 지성은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 멈춰 섰다.

“선배님, 저희도 풍등 하나 살까요? 오늘 풍등제 하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거리에 풍등이 이리 많이 나와 있었나 보군.”

“실은 아까 지나온 길에서 점찍어둔 풍등이 있습니다.”

“그새 봐 두었는가?”

그의 물음에 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시亥時에 풍등을 날린다고 하니 미리 사두는 것이 좋겠지요? 제가 가서 사 오겠습니다.”

“같이 가면 될 텐데, 굳이?”

“아닙니다. 잠깐 들를 곳도 있고 하니……. 하면 술시戌時에 옷집 앞마당에서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난 듯한 지성의 모습에 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좋을 대로 하게, 했다. 지성이 조금 멀어지자마자 류는 그의 뒤로 열 보쯤 떨어져 따라 걸어갔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짙은 어둠이 내리자 거리는 낮보다 더 붐비기 시작했다. 풍등제 때문인지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은 한껏 들떠있었다. 류는 지성을 놓치지 않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후 지성이 멈춰 선 곳은 장신구 가게 앞이었다.

“누이에게 선물하려 하는데,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누이가 몇 살이어요?”

“설 지나면 이제 열일곱 됩니다.”

“그럼, 이 댕기는 어때요? 수수하면서도 단아하여 인기가 좋답니다.”

“그걸로 하나 주십시오. 그리고 이 비녀도.”

상인이 눈치껏 나무함에 댕기와 비녀를 따로 담아주자 지성은 그것들을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이 무언가 그리운 것을 회상하는 듯 애틋하다. 지성은 그러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고는 수많은 사람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류는 지성이 일부러 몸을 숨긴 줄도 모르고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장이라도 크게 윤 도령, 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그를 따라온 것을 들켜버릴 것이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절 따라오신 겁니까?”

“으아……!”

갑자기 턱 밑에서 고개를 쑥 들이미는 지성을 발견한 류가 놀라 소리를 지르려 하자 지성이 그의 입을 턱 막았다.

“음음 음음!”

“술시에 보자고 했는데 서너 살 먹은 어린애예요? 혼자서 저자 구경도 못 하시는 겁니까?”

“음 으음.”

“뭐라구요?”

지성이 손을 떼지 않고 장난스레 웃자 류가 그대로 입을 열었다.

“손 떼지, 윤 도령.”

낯선 촉감에 지성이 놀라 제 손을 뒤로 빼자 류가 빙긋 웃었다.

“내가 정말 그대가 내 입을 막아 말을 못 하는 줄 알았소? 아니오. 난 그대가 곤란해할까 봐 몇 번 기회를 줬는데, 그대가 그 기회를 걷어찬 거요.”

하기야 그의 말이 옳았다. 지성이 제 선배의 입을 그리 세게 막는 무례를 저지를 리 없기 때문이다. 지성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입술만 괜히 삐죽거렸다.

“그나저나 뭘 샀소?”

“아, 그게……, 어머니 드리려고 비녀 하나 샀습니다.”

“그것뿐이오?”

류의 물음에 지성은 잠시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보셨습니까? 저의 집에서 지내는 아이의 것도 하나 샀습니다. 어리기도 하고, 저와는 남매 같은 사이여서요.”

변명이라도 하는 듯 늘어놓는 지성의 말에 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럼 이제 대답해주십시오, 선배님. 저는 왜 따라오셨습니까?”

“그야……, 내 어찌 자네를 혼자 보내겠는가? 자네 혼자 두었다가 한성 제일 미인을 누가 데려가 버리기라도 하면 어째? 내가 나서서 자네를 지켜주어야지!”

“선배님이 저를요? 됐습니다. 누가 누굴 지켜줍니까? 선배님이나 납치당하지 마십시오. 제가 구하러 가드려야 하니까요.”

지성의 신랄한 말투에 류가 갓 눈을 뜬 강아지처럼 끙하는 소리를 냈다. 잠시 후 후배의 옆으로 선배가 조금씩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선배님은 선물 드릴 분 없습니까?”

“나? 나는…….”

“설마 없습니까? 그럼 안됩니다. 가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다고, 베풀어야 받는 것도 있지요.”

그리 말하며 지성은 류의 팔을 붙잡아 어딘가로 이끌었다. 명절 선물이야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만, 류는 지성이 저를 어디로 이끄는지 궁금하여 그저 따라갈 뿐이었다.

두 사람이 멈춰 선 곳은 저잣거리의 끝,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한산한 책방이었다. 류가 의아한 듯 지성을 바라보았다.

“최 선생, 안에 계십니까?”

지성의 부름에 책방의 문이 덜거덕 열리더니 안에서 나이 서른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나왔다. 서역에서 건너온 돋보기를 찬 그는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귀찮은 듯 투덜거리며 나오더니 지성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도련님 오셨네.”

“예. 재료들은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거? 당연하지. 오늘 온다는 기별이 없어 누군가 했어. 한데 이분은?”

“아, 저번에 말씀드렸지요? 류 선배님입니다.”

그의 말에 최 선생이란 사내는 류를 위아래로 힐끔 훑어보고는 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단 멀쩡하게 생겼는데?”

“최 선생!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선배님 외모 품평이라도 한 것 같잖습니까!”

지성의 말에 그는 허허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지성이 어색하게 류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고는 최 선생을 따라 들어갔다.

안은 조금 어두웠다. 곳곳에 등이 있긴 했으나 오는 손님을 예상 못 했는지 불을 환히 밝히지는 않았고 그나마 있는 불들도 빼곡한 책장에 가려져 있었다. 낡은 책들도 있는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에 꿉꿉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리저리 구경하던 류의 앞에 책장으로 된 벽이 나타났다. 다른 책장들과는 달리 한쪽 면이 막혀있었다. 그가 어리둥절하여 지성을 부르려는데 다리 아래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선배님, 아래로 들어오십시오.”

“아래로?”

“여기요, 이 문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머리 조심하시고요.”

류가 물으며 몸을 숙이는데 크지 않은 손이 작은 문에서 쑥 나와 휘적거렸다.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귀신인 줄 알았을 터였다. 류는 돌연 그 손을 잡아채고 싶은 장난기가 돌았으나 그러지는 않고, 알았으니 손 좀 치워보게, 하고는 그대로 몸을 구겨 넣었다. 처음부터 작은 줄로 알았던 문은 사실 여느 문의 크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책장에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적당한 구멍을 뚫어 놓은 모양이었다.

“여긴?”

비밀 공간처럼 펼쳐진 방은 ‘조금 큰 편’이었다. 한쪽 구석엔 작은 수납장, 찻그릇이 놓인 선반이 있었고 글을 쓰지 않은 채 엮은 빈 종이책, 여러 개의 붓과 몇 개의 벼루 등의 글을 쓰는 도구들, 작은 단지 몇 개, 또 한쪽 구석에는 이불장이 있었다. 최 선생은 방 곳곳에 있는 등불을 밝히며 말했다.

“내 작업실이오. 뭐, 지성이 이놈도 가끔 들르니 공동 작업실이라 하면 좋으려나.”

두 사람의 공동 작업실이라면, 이 ‘크지 않은’ 공간에서 두 사람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차도 마셨다는 말인가? 두 사람이 같이? 류는 어쩐지 불만스러운 기분에 눈썹을 씰룩였다.

“저 단지에는 뭐가 들었나?”

“말린 꽃들이 들어있소. 지성이가 내게 부탁한 것이지.”

“꽃은 한 철 피고 마는 것이지만, 잘 말리면 색이 곱습니다.”

류가 저것들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데 지성이 그 생각을 알아챘는지 빙긋 웃었다.

“이 꽃들로 글씨를 쓸 겁니다.”

“꽃으로 글씨를 쓴다고?”

그의 말에 지성이 선반에 있던 단지들을 하나씩 바닥에 늘어놓았다. 가만히 지성을 보던 최 선생이 입을 열었다.

“내 풀을 쒀 올 테니 자네는 공자님이랑 여기 있게. 찻잎을 어디에 두는지 기억하고 있지?”

“예. 고맙습니다.”

최 선생이 방 한쪽에 난 문으로 나가고 지성이 차탁茶卓을 가져와선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끓는 물을 숙우에 붓고 다관에 찻잎을 넣고 숙우의 물을 다시 다관에 붓는 일련의 과정이 끊임이 없고 능숙했다. 그 손끝을 멍하니 바라보던 류는 지성이 자신의 앞에 잔을 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성에게 고맙네, 하고 입을 열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어, 음, 아니. 이렇게 예를 차려서 차를 마시는 것은 오랜만이라. 내 벗들은 차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다도하고는 담을 쌓고 살거든. 아마 다구들의 이름도 알지 못할걸?”

류는 과장된 어투로 말했으나 대충 둘러댄 변명이었다. 그는 그저 지성에게,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어여쁘다 생각했다고 말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류는 괜히 부끄럽고 죄스러운 기분에 볼이 붉혔으나 다행스럽게도 지성은 차를 마시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지성의 눈치를 보며 차를 마시는데 최 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이 좀 더운가, 공자님 얼굴이 조금 붉네.”

“더우십니까?”

류가 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최 선생이 돋보기 너머로 그런 류를 보고는 불순한 무언가를 보았다는 듯 따라 고개를 흔들었다.

꽃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간단했다. 나무로 된 크지 않고 얇은 패 위에 화선지를 바르고, 종이가 마르면 그 위로 꽃송이와 잎들을 붙이면 되었다. 조금 큰 꽃잎은 잘게 가루 내 붙이기도 했다. 류가 열심히 꽃잎을 떼어 붙이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지성에게 말했다.

“이런 생각은 어찌하게 되었소?”

그의 말에 지성이 잠시 손을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고, 어렸을 때 동…네에 살던 친구가 알려줬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만들고 나면 꽤 예뻐서 주변에 선물했더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제가 부유하지는 않아 값비싼 것들을 선물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쪽에 소질이 있지 않겠습니까.”

묘하게 조금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최 선생이 옆에서 지성이 들고 있던 꽃줄기를 가져다 잎을 조금씩 뜯으며 말했다.

“지성이 이놈이 섬세해서 매번 제일 색이 고운 꽃들만 구해온다오. 언젠가 거들겠다고 같이 갔었는데, 이 꽃은 이름이 뭐고, 어떻게 관리를 하고, 어떻게 채집하는지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도중에 그냥 올 뻔했지.”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는 최 선생의 모습에 지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최 선생께선 윤 도령과 어찌 알게 되셨습니까?”

“선생이라니 됐소. 이 녀석이나 저를 선생이라 부르지, 그저 책방 주인한테 선생은 무슨.”

“도령에게 선생이니 제게도 선생이 아니겠습니까.”

“내 팔자에 이리 귀하신 분들께 선생 소리를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최 선생이 절하는 체하며 과장되게 말했다.

“실은 선생이라 불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지성이 저놈이오. 난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그저 언문을 조금 알아 어린애들이 읽을 만한 이야기책을 쓰는 사람이었소. 몇 해 전인가. 길을 지나는데, 지성이가 그 동네 애들을 불러 모아놓고 내가 쓴 책을 읽어주더이다. 그 이야기를 내가 썼다고 하니 그날부터 날 선생이라 부르지 뭐요? 그러더니 내게 매일 찾아와 한문을 알려줬소. 덕분에 내가 책방을 차리게 됐지. 처음에는 이리 책이 많지는 않았는데, 지성이 읽은 책, 지성이가 필사한 책들을 조금씩 가져다 놓으니 저리 많아졌다오. 지성이 저 녀석이, 자기가 한성으로 가는데 나도 함께 가면 어떻겠냐고 말하기에 여기 와 책방을 열었지.”

류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벽면을 가득 메꾸던 책들을 떠올렸다. 지성은 제 얘기가 나오니 쑥스러운지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류는 그런 지성의 모습을 보며 이유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류와 지성 두 사람은 금방 꽃 글씨를 완성했다. 처음 해보는 것이었으나 류도 누가 그림 그리는 사람 아니랄까 봐 곧잘 써냈다. 지성이 최 선생과 재료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해시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글쎄, 이제 한 반 시진쯤 남았으려나.”

“저와 선배님은 풍등 날리러 가려고 하는데, 선생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됐네. 내가 거길 왜 껴? 난 빌고 싶은 소원도 없으니 젊은이들끼리 노시게.”

퉁명스러우나 배려심 깊은 말이었다. 두 사람은 만든 것들을 품에 넣고 책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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