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춘풍 도령 (05)
지성은 다시 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가 가는 방향은 풍등 가게가 즐비해 있던 곳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풍등을 사려면, 저쪽에 많이 있던데?”
“제가 점찍어둔 곳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시죠.”
작년까지, 류는 떠들썩한 곳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긴 했으나 집안의 엄격한 분위기 때문인지 설날이 다가와도 거의 집 안에 박혀 있었던지라 풍등도 뭔가 좀 다른 것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해마다 풍등을 날리러 왔다고 하니 풍등제를 구경하러 나왔더라면 지성을 볼 수 있었을까 하고 엉뚱한 아쉬움을 느꼈다.
‘하긴, 도령은 한성에 없었다고 했으니 구경을 나왔더라도 마주칠 일은 없었겠군.’
지성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풍등 가게가 아니라 주막집 앞이었다. 그는 혹시 제 후배가 길을 잘못 들었나 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령. 잘못 온 것 아니오?”
“아닙니다. 이쪽이 맞습니다.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지성이 어느 길목을 바라보자 류도 따라 고개를 내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에게로 작고 허름한 풍등 수레를 끌며 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볼과 코끝이 발간 것이 꽤 오래도록 밖에서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녹두야!”
“오라버니? 한성엔 언제 왔어요?”
“몇 달 됐다. 그래, 올해는 거의 다 판 모양이네.”
“운이 좋았죠. 옷집 앞마당을 지나는데 마침 그때가 청담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랬는지 사람이 많더라고요.”
류가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 지성은 소녀에게 말했다.
“인사하렴. 나와 같은 화방에서 지내는 분이시란다. 류 선배님이셔.”
“안녕하세요, 저는 녹두라고 합니다.”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는 녹두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려 보이는데도 행동거지며 말투가 어른스러운 것이 되레 귀여워 보였다. 류는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아이를 대하는 것이 능숙했다.
“이제 보니 자네, 마당발이로군! 그래, 이 아이는 또 어떤 인연인가?”
류가 웃으며 말하자 녹두는 두 사람 사이에 손을 휘적거렸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오라버니, 풍등 사실 거죠?”
“그래, 세 개 다오.”
사람은 둘인데 세 개를 달라니, 류는 의아했으나 아이는 딱히 묻지 않고 풍등 세 개를 건넸다. 지성은 풍등 두 개를 받아 제 선배에게 들고 있게 하고는 품에서 휴대용 붓을 꺼내 풍등에 무언가 그리기 시작했다. 쓱쓱 시원시원하게 붓을 놀리던 그가 흡족한 듯 웃었다.
“다 됐다!”
지성은 아이에게 풍등을 보여주었다. 그곳엔 녹두와 녹두의 어머니, 그리고 개 몇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인물들과 짐승들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였다.
“우와!”
“자. 그리고 이건 풍등값.”
“아이참 오라버니도. 매번 이렇게 저한테 하나 줄 거면서 뭐하러 세 개 값을 내요?”
지성은, 그래야 내가 선물하는 의미가 있지, 하며 녹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수레의 풍등을 모두 판 아이는 신이 난 듯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류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풍등에 그림을 그려준 것이오?”
“풍등엔 소원을 적지 않습니까. 한데 녹두의 어머니는 글을 모르시거든요. 그러니 글 대신 그림으로 소원을 적어준 겁니다”
류는 아이의 풍등에 그려준 그림을 떠올렸다. 녹두의 소원은 제 가족이 일 년 동안 행복하기를 바란 것이로구나. 그는 그러다 문득, 등을 돌리고 제 풍등에 소원을 적기 시작하는 지성의 뒤에 살금살금 다가섰다. 지성은 고개도 돌리지 않곤 말했다.
“붓으로 얼굴에 낙서해버리기 전에 좀 떨어지십시오.”
그의 말에 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직 아무것도 안 봤네! 하는 류의 말에 지성은 딱히 개의치 않는 듯 마저 제 소원을 다 쓰고는 류에게 붓을 넘겨주려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 제 풍등 보셨지요?”
“아, 아니! 난 절대! 아무것도 안 봤어! 맹세코!”
지성은, 말로는 안 봤다 못 봤다고 말하지만, 고작 풍등 빛에도 비쳐 보일 만큼 붉어진 류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이 소원이 그렇게 부끄러워할 소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였다. 실은 류는 정말로 그의 소원을 보지 못하였다. 그가 본 것은 다만 풍등에 “류”라고 적는 지성의 붓놀림이었다. 그는 그저 지성의 소원 속에 저도 있는 것이 기쁠 뿐이었다.
“뭐라 적으셨습니까?”
“나도 안 보여줄 걸세!”
“제 소원은 보셔놓구선.”
“자네, 정말 선배 말을 못 믿나?”
볼이 아직도 붉다고 말해줄까, 지성은 조금 망설이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풍등을 들고 저자 구경을 하며 천천히 옷집 앞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공기는 쌀쌀했으나 밤의 저잣거리는 낮 못지않게 사람들이 많았다. 잠시 후 해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색색의 풍등들이 저마다의 소원을 싣고 하늘 위로 떠 올랐다. 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조심하십시오!”
“어어!”
순간 발이 꼬인 류가 앞으로 엎어지려 하자 지성이 그를 붙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고, 고맙네. 한데…….”
두 사람의 풍등은 이미 하늘 높이 떠가고 있었다. 류가 아쉬운 듯 풍등을 바라보자 지성이 그를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소원도 다 적었는데요.”
“그래도 이건 너무 허망하네!”
울 듯이 외치는 그의 모습에 지성은 예의 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면, 내년에도 저랑 같이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설은 해마다 있을 테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선배님?”
류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별 마냥 총총히 오르는 것이 검은 비단에 오색실로 수를 놓는 것만 같았다. 풍등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성이 아니었다면 올해도 무던히 지나갔겠지.
“선배님!”
옆에서 지성이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턱 밑으로 내민 그것을 받아 들자 무에 그리 수줍은지 제 목덜미를 긁적였다. 꽃으로 류流 라고 적은 나무패였다.
“아까 선배님 몰래 만들었습니다. 선배님 글씨에는 못 미치지만…….”
“아닐세. 마음에 들어. 참으로 귀한 선물이네.”
―소중히 간직하겠네. 지성이 건넨 패를 금괴라도 되는 양 품에 꼭 끌어안는 류의 모습에 지성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
설이 지나고 며칠 뒤, 지성은 화방에 갈 채비를 했다. 이것저것 짐을 챙기는 그의 열린 방문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의 어머니인 이성연이다. 늘 그렇듯이 그는 아쉬운 표정을 하고 마당에 서 있었다.
“가면 보름 후 즈음에 돌아오지?”
“그렇지요. 아까 인사드렸는데 어찌 나오셨어요?”
“새삼스럽기는.”
지성은 짐을 잠시 내려 두고 밖으로 나와 성연을 끌어안았다.
“너무 서운해 마세요, 어머니.”
“서운하기는. 걱정이 되어 그렇지. 넌…….”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굽니까? 이 집 셋째 아들 윤지성입니다.”
씩씩하게 웃어 보이는 지성을 보며 성연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날이 차니 고뿔 들지 않게 조심하고. 오늘은 네 형님더러 바래다 달라 할까? 짐도 무거울 텐데.”
“괜찮습니다. 필요한 짐들은 이미 화방에 거의 다 있고 오늘 짐들은 저게 전부인데요.”
“그래도. 아니면 홍단이라도 데려갈래? 아니지 쇠돌이, 그래, 쇠돌아!”
“어머니.”
“응?”
“정말 전 괜찮습니다.”
그래? 네가 괜찮다면 괜찮겠지. 성연은 그리 말했으나 여전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지성은 제 어머니의 모습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머니가 안심할 수 있게 웃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가 대문을 나서자 성연이 따라 나왔다.
“조심히 다녀오렴.”
“감사합니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
“너 가는 것 보고.”
성연의 고집을 누가 당하랴. 지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그에게 인사하곤 화방을 향해 걸어갔다. 성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지성이 떠난 길을 바라보았다.
“아…….”
지성은 어쩐지 불안했다. 집에서 몇 발자국 떼지도 않은 느낌이건만 조금 전까지 창창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나쁜 예감은 적중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추적추적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성은 제 짐을 감싸 안고 뛰었다. 하필이면 이런 날 종이를 나무로 된 화구 통이 아닌 천에 싸서 들고 오다니. 심지어 그 종이는 까다로운 정 영감님이 주문하여 어렵게 구한 종이이거늘!
“환장하겠네.”
애타는 지성의 마음도 모르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져 마침내 한 치 앞이 안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지성은 하늘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으나 일단 달렸다. 이대로 가다간 종이가 다 젖어버릴 판이었다. 지성은 결국 숲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돌아서 가면 반 시진은 족히 걸리는 길이지만 숲길로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면 한 다경이면 되었다. 어찌 알게 되었냐 물으면, 지성도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나무 숲이라 겨울에도 잎이 무성하니 잘 되었어. 이러면 비도 어느 정도 막아줄 테니.’
지성의 예상대로 숲으로 들어서니 확실히 비를 덜 맞았다. 이대로 가면 종이는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세상 열심히 달리던 그는 무언가 발견하고 발을 멈추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로구나.”
그는 이제 울고 싶어졌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갈 길 바쁜 숲에서 어슬렁대는 수상한 사람들이라니. 모르는 체하고 지나고 싶었으나 그의 앞에 있는 두 사내는 그가 얌전히 지나간다 하여 곱게 보내줄 것 같은 인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그에게 걸어왔다.
“제가 갈 길이 바쁜데 그냥 지나가도 될지요?”
“선비님 미안하게 됐소. 그냥은 보내드리기가 힘들겠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들은 누가 보아도 도적의 행색이었다. 그들의 말도 참 일리가 있었다. 어떤 복면인이 복면 벗은 얼굴을 본 사람을 살려 두려 하겠는가? 훤한 대낮에 도적이라니, 도대체 무얼 하던 사람들인지는 모르겠다만 운도 지지리 없어라. 지성은 한숨을 쉬며 짐 보따리와 외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등에 멘 칼을 꺼내 들었다.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고작 그의 팔뚝보다 조금 긴 단검이었다.
“서생, 칼을 잡아본 적은 있소?”
도적 하나가 비아냥거렸다.
“칼을 잡아본 적은 있냐고?”
지성은 숨을 고르고는 검집에서 칼을 빼내어 단단히 쥐었다. 그의 눈이 일순 차게 가라앉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저를 비꼰 이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도적의 발목을 베어 힘줄을 끊어내고 정강이를 찔렀다.
“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사내는 당황했는지 검을 막아내지도 못했다. 뭇사람들로부터 학이라 불리던 지성의 그 눈빛은 지금 영락없이 매의 그것과 같았다. 나비처럼 날아 춤을 추듯 돌며 빠르게 베어내는 지성의 검신劍身에 사내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말을 꺼낸 것을 후회해라.”
지성의 말에 또 다른 도적 하나가 날을 세우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지성은 피하려 했으나 제 앞에 있는 젖은 돌부리의 존재를 뒤늦게 깨달았다. 삐끗하는 순간 예리한 칼날은 이미 그의 왼쪽 손목에 박혀 있었다.
“윽!”
지성은 칼날을 쳐내고 도적을 발로 걷어찼다. 뒤로 넘어진 도적은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는지 끙끙대며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게 날 그냥 보내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니오.”
“네놈이 감히!”
제 동료가 숨이 넘어갈 듯하자 발목 힘줄을 끊어 놓은 도적이 일어나 지성에게 칼을 겨눴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대로 힘줄이 끊어지지 않은 것인가? 실제로 베는 것이 처음이라 실수한 것일까? 지성의 머릿속에 잡생각이 흘러들어오는 동안 도적의 칼날은 이미 지성의 눈앞에 다다랐다. 이대로 끝인가 하여 눈을 질끈 감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지성은 슬며시 눈을 떴다. 눈앞의 사내의 눈이 뒤집히더니 앞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이는…….
“어라? 그쪽은 그때 그!”
키가 멀대 마냥 크고 험상궂게 저를 노려보았던 그 사내! 지성은 이런 날씨 이런 곳에 어째서 저 사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감사 인사는 해야 했기에 살갑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인사는 필요 없다. 나는 이 두 놈에게 볼일이 있던 것이거든.”
볼 일이 있던 사람치고는 꽤 살벌하게 두 사람에게 칼을 들이미신 것 같습니다만. 지성은 어색하게 웃음 짓다 그제야 종이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봇짐을 내려놓은 곳으로 달려갔다.
“악!”
“뭐, 뭐야?”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모습에 사내가 기겁하여 말했다. 지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짐을 살폈다. 봇짐의 매듭이 조금 풀려 있어 그 사이로 비가 조금 새어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냐, 종이는 조금 안쪽에 있으니 빨리 가서 말리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중얼거리던 그는 제 짐과 검을 챙겨 서둘러 달려가다 저를 도와준 사내를 향해 뒤돌아 인사했다.
“다음에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를 보던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데 언제 봤던가? 낯이 익는 것 같기도 하고.”
사내는 제 턱밑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면서 칼날은 제 발밑에서 바르작대는 도적의 몸통에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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