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06)

“이제야 오는……, 아니 도령! 꼴이 그게 다 뭔가?”

류가 문 쪽을 바라보다 벌떡 일어났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모양을 하고 나타난 지성은 그러나 호들갑을 떠는 류는 거들떠보지도 않곤 탁자 위로 봇짐을 펼쳤다.

“도령?”

지성은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았다. 봇짐 안에 든 짐은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푹 젖어 있었다.

“망했습니다.”

“왜, 왜 그러나? 종이 때문에? 종이는 우리 화방에도 많이 있잖은가.”

“잘 보십시오. 저게 어떤 종이인지.”

종이를 펼쳐 보던 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푹 젖어 있었으나 금방 알 수 있었다. 잘 짜인 종이의 질감, 은은하게 깔린 금사. 그는 고개를 삐걱대며 지성에게 물었다.

“이 종이 설마 정, 영감님……, 그 종이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성의 얼굴이 너무나 허탈하여 류는 애써 웃으며 지성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래도 지금 바로 종이를 구하면 영감님이 말씀하신 날까진 어찌 되지 않을까?”

“이 종이를 구하는데 거의 보름이 걸렸습니다. 심지어 설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금에서야 구하면 일자까지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턱도 없습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모습에 류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오. 이러다 병들게 생겼소.”

“아닙니다. 전 병이 들어도 쌉니다.”

지성은 그리 말하고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제 주제에 새 옷이 가당키나 합니까? 차라리 지각하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사는 걸까요, 저란 사람은? 저잣거리 쪽으로 가서 우산을 살 것을요. 그럼 이리 종이를 적시지도 않았을 테고 도적을 만나지도 않……,

“도적? 도적이라니!”

아잇, 깜짝이야!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류의 목소리에 지성이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의자로 돌아가 앉으려던 류가 다시 성큼성큼 걸어와 지성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안 다쳤소? 여, 여기! 피가 나잖소!”

그가 소매 끝에서 손등으로 흐르는 핏방울을 발견하고는 손목을 쥐었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성을 다치게 한 그 도적이 눈앞에 있었다면 아마도 그 불꽃으로 활활 불태워버릴 수도 있으리라.

“저, 저는 괜찮습니다. 살짝 찔린 건데요. 그리고 선배님. 선배님이 잡으신 곳이…….”

지성이 안절부절 난감하다는 듯 류를 바라보자 류가 놀라 손을 뗐다. 그의 손바닥에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검은 소매라 그저 비에 젖은 줄로만 알았건만! 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안하오. 많이 아프오? 걷어보시오. 내가 봐야겠소.”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다 덧나면 어째? 자네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는 습관을 들이게. 매번 어찌 혼자서만 끙끙 앓는 건가?”

“제가 언제 혼자 끙끙 앓았습니까? 애초에 전 그렇게 병에 자주 걸리는 허약체질이 아닙니다.”

“그대는 허약체질 맞소! 가만히 좀 있어 보게! 소매를 걷어야 치료를 하지!”

“글쎄 별것 아니라니까요!”

두 사람이 소매 걷는 일로 투덕거리는 사이 화방 앞으로 누군가 걸어왔다.

“선배가 말을 하면 좀 듣게!”

“평소엔 형님이라 불러 달라더니 왜 이럴 때만 선후배의 위계를 따지려 하십니까?”

“그럼 이제 형님이라 불러줄 텐가?”

“이 틈을 노려 허튼소리 하지 마십시오.”

“잉, 너무하는군.”

“‘잉’은 또 뭡니까?”

지성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체하며 손을 뒤로 감췄다. 류가 그것을 가만히 보아줄 리 없었다.

“자네 자꾸 손 뒤로 감추기 있나?”

“제 손인데 어떻습니까?”

“아, 좀 한 번만 보자니까!”

“안 됩니다. 싫습니다. 별것 아니라니까요!”

“그럼 내 손에 묻은 건 뭔가? 엉?”

한창 실랑이하고 있는 두 사람은 화방 안에 이미 사람이 들어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객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둘이 뭐하냐?”

“어어어!”

지성이 객을 알아보고 반가운 듯 손가락질했다. 무례한 행동임이 틀림없으나 아무튼 지성은 정말로 반가운 상태였다. 조금 전, 숲에서 저를 구해준 그 사납게 생긴 사내였기 때문이다. 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러나 당장 화방에 들어온 객보다는 붙잡기 좋게 뻗은 지성의 왼팔이었다. 그는 지성의 검지를 덥석 붙잡고는 말했다.

“잡았다!”

“선배……, 어, 어?”

갑작스레 제 손가락을 붙든 류의 손에 지성은 당황하여 팔을 허우적대다 몸이 기울어졌다. 류와 지성은 그대로 의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류의 커다란 손이 지성의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주기는 했으나 아픈 것은 아픈 것인지라 지성은 으으 하는 소리를 냈다.

“류 네 놈 취향은 내 알 바 아니지만……, 일단 사람이 왔으면 아는 척이라도 해주는 것이 어때?”

사내의 말에 류는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벌겋다.

“무, 무슨 취향?”

“아무나 덥석덥석 안고 보는 그 버릇, 좀 고치지?”

“그게 무슨!”

“아, 아까는!”

두 사람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든 지성에 류와 객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사정이 급해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누구기에 아는 척이냐?”

지성은 머리가 띵해졌다. 처음에 만난 것은 그렇다 치고 조금 전 그 일이 그렇게 쉽게 잊힐 만한 일인가?

“조금 전 숲에서 절 구해주셨잖습니까!”

“아. 그놈이군.”

그놈? 아무리 그래도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그놈이라니 말이 심한 것 아닌가? 지성은 입술을 샐쭉거렸다.

“도령 자네, 려운이 저놈을 아는가?”

“안다기보다는 몇 번 마주쳤지요.”

그의 말에도 려운이라 불린 사내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지성을 바라보았다. 지성은 그 매서운 눈빛에 몸을 움찔 떨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류는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두 사람이 이리 인연이 깊으니 길게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 이쪽은 오늘부터 화방에서 생활하게 될 나의 절친한 벗 려운일세. 이쪽은 아우 같은 화방 지기인 윤 도령. 둘이 사이좋게 지내게나!”

벗은 무슨. 류의 말에 려운은 불퉁한 말을 내뱉었으나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지성은 조금 표정이 굳더니 류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분이 우리 화방에서 지내신다고요?”

“응.”

“왜요?”

“왜냐니? 화방에 있는 이유가 글과 그림 외에 따로 있나?”

“저분이 붓을 드신다고요?”

“응.”

“칼이 아니라요?”

“굳이 따지자면, 둘 다 들지.”

“정말, 이 화방에서요?”

“왜?”

왜냐니, 저분은 도적이 두 명이나 따라붙고 그들에게 볼일이 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찔러 죽이는 험상궂고 괴팍한 사람이라고요! 한데 우리 화방에 들인다니요! 지성은 ―자신이 눈이 돌아 도적들의 힘줄을 끊어 놓고 험한 말을 하던 것은 다 잊어버리고, 또 죽일 생각까진 아니긴 했으므로― 이 공간이 울리도록 외치고 싶었으나 절친한 사이라는데 혹 이것이 중대한 비밀이거나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도령. 려운이 저놈이 무섭나?”

“누, 누, 누, 누가요! 전혀요!”

지성의 말에도 류는 빙글빙글 웃었다. 정작 려운은 그런 지성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려운은 지금, 지성의 검술을 생각하고 있었다. 잘 단련된 자세와 가벼운 몸짓이 예사 솜씨는 아님은 분명하나 실전은 처음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단검이었으니 제대로 된 검을 썼더라면 위험에 처하지도 않았겠지. 그보다도…….

“네놈의 검술 어디서 본 듯했는데.”

“검술이라니? 도령이 검을 든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류의 말에 지성은 잠시 눈을 깜박거리며 어물어물하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제가 검술이라뇨? 저는 어렸을 적부터 병치레가 잦고 몸이 허약해서 검술 익힐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호신술이죠, 호신술. 아하하!”

류에게 옮은 것인지 그와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지성을 보며 려운은 ‘류 저 놈이 사람 하나 버려놓았군.’했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바 아니고 두 사람이 벌써 친한 사이가 된 것 같은 느낌에 류는 마치 장원급제한 아들을 둔 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고는 허허 웃었다. 그러다 문득, 류는 지성의 손목을 보고는 기겁하여 말했다.

“자네 때문에 잊어버렸잖은가! 도령, 손목!”

지성은 그제야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머리와 옷에서부터 뚝뚝 떨어지는 빗물이 상처에 닿아 핏물이 되어 바닥을 살벌하게 적시고 있었다. 젖어버린 종이와 화방 새 식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잊고 있던 고통이 그제야 조금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지성에게는 그것보다는 핏물이 들어가는 옷이 더 걱정이었다. 옷소매를 들춰보던 지성은 조금 안심한 듯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그래도 검은 옷이라 다행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평소처럼 흰 소매였으면 핏물이 들어 티가 많이 났을 텐데 검은 옷이라 티가 덜 납니다. 보십시오. 선배님도 혈흔을 보기 전까지 모르셨잖습니까. 이게 빗물이랑 섞여 그렇지 실제 다친 것은 얼마 안 됩니다.”

대충 넘기려는 듯 웃어버리는 지성에게 류가 말했다.

“그럼 옷이라도 갈아입게. 보는 내가 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좀 있으면 마르지 않을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와! 그래야 다친 곳도 치료를 할 것 아닌가. 려운 자네도 얼른……, 잉? 이 녀석은 그새 어디로 사라졌담?”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류의 방에서 려운이 나왔다. 류의 옷을 입은 그는 지성을 향해 마른 옷가지와 약초 꾸러미를 휙 던졌다. 지성은 그것들을 받아 마른 바닥에 내려놓곤,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려운을 황망히 바라보았으나 류는 딱히 개의치 않는 듯했다. 친구라 해도 류 선배는 괜찮은 건가?

“궁상떨지 말고 갈아입지?”

“아니, 언제부터 거기가 려운 선배님 방이 됐습니까?”

“내가 왜 네놈 선배냐?”

“그럼 어찌합니까? 물론 화방에 들어온 순서로 따지자면 제가 선배가 되는 것이 옳겠지만, 특별히 제가 양보해 드리는 겁니다. 류 선배님과 벗이시고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싫으시면 쌍방으로 말 놓으시든지요.”

풉! 어쩐지 날카로운 지성의 어투에 류가 그의 불만을 알아채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도령. 나는 괜찮으이.”

“선배님은 사람이 물러서 탈입니다. 싫으면 싫다고 거절하실 줄도 아셔야죠!”

“그게 아니네. 우리 화방에 자네 방하고 내가 쓰는 방 말고 남은 방을 창고처럼 쓰고 있어서 일단 려운이 저 녀석 짐을 내 방에 맡겨둔 걸세.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게.”

“제, 제가 화를 내긴요! 전, 그저……. 죄송합니다. 오해했습니다.”

그의 빠른 사과에 류가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약초는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한데 이 옷은 려운 님 옷 아닙니까? 제겐 많이 클 것 같은데요.”

“네놈은 류 저놈보다도 잔말이 많구나. 그건 내 옷이 아니라 류의 옷이다. 네가 쥐방울만 하기는 하나 류 녀석 옷이라면 그리 크지는 않겠지.”

“려운!”

“려운 님!”

두 사람이 빽 소리치자, 려운은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우산을 챙겨 화방을 나서며 말했다

“그리고 너. 이상한 호칭 붙이지 말고 그냥 려운이라고만 불러라. 그게 낫겠다.”

휭하니 가버리는 려운의 발걸음은 어쩐지 가벼워 보였다. 그가 나가고 덩그러니 남겨진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지성의 재채기 소리였다.

“안 되겠네. 예서 잠시만 기다리게.”

류마저 자리를 비우고 지성은 제 몸이 조금 으슬으슬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추위에 약한 체질을 얻은 것은 그날 이후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화마의 작은 입김에도 스러져가던 사람들…….

“도령?”

“예?”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가?”

류의 말에 지성은 별것 아니란 의미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류는 잠시 그런 지성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가? 내가 목욕하려고 물을 받아 놓았는데 도령한테 훨씬 필요한 듯하니 얼른 가서 몸 좀 녹이게.”

“저는…….”

“괜찮다는 소리는 하지 말게! 지금 도령 얼굴을 보면 저승사자가 형님이라 부르게 생겼으니.”

류가 자신을 일으켜 세워 등을 떠밀자 그는 마지못해 욕탕을 향해갔다.

본 화방 옆에 있는 작은 화방을 고쳐 만든 욕탕은 꽤나 쓸만했다. 부엌과는 별도의 아궁이를 마련해 두어 따뜻한 물을 받아쓰기에 좋았다. 욕탕에는 겉옷을 걸쳐 놓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가림막 역할을 하는 판을 세워놓았고, 큼직한 나무 욕조가 있었다.

옷을 놓는 바구니에는 려운이 건넨 옷가지와 약초, 상처를 감을 붕대가 넉넉히 들어있었고, 욕탕 안에는 수증기가 가득하여 바깥처럼 춥지 않았다. 욕조 안의 물마저 약초 물이었다.

“선배님도 참.”

류가 이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였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하긴, 류는 부잣집에서 자랐음에도 할 줄 아는 것이 꽤 많았지. 지성은 겉옷을 벗어 가림막 위에 걸쳐 두고 상투를 틀었던 머리를 풀었다. 저고리를 벗은 동그란 어깨 위로 비에 젖은 머리칼이 내렸다. 가슴 위로 단단히 묶은 매듭 천까지 모두 풀어버리고 몸 위에 걸친 것이 하나 없는 그는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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