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9화
추락한 성녀 09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09
루블, 보쓰, 히즈
***
빛의 세례는 여신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이다. 여태까지의 성녀(혹은 성자)가 기록을 남기진 않았으나 아마 모두 아마데아와 같은 체험을 했을 것이다.
아마데아는 아직도 성녀로 인정받던 날, 빛의 세례를 받던 날을 꿈에서 본다.
나라의 모든 사제가 모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규모였다. 커다란 신전의 내부를 꽉 채운 인파가 아무런 소음도 없이 늘어서 있는 광경은 기이한 경이로움을 주었다. 아직 어렸던 아마데아는 교황의 손을 잡고 사제들 사이의 길을 나아갔다.
중간중간 얼굴을 익힌 사제가 보여 아는 척을 하고 싶었으나 사제들은 굽힌 고개를 절대 들어 올리지 않았고, 어린 손을 움켜 쥔 교황은 단호했다. 어렸던 아마데아는 약간은 시무룩해졌으나 이내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곳부터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반강제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교황의 손이 떼어졌다. 신전의 가장 꼭대기 층으로 가는 계단 앞이었다.
아마데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제들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고 교황은 웃는 낯이었으나 눈은 아마데아가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 맹목적이었다.
어린 아마데아는 괜히 돌아봤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혼자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끝에 있던 것은······.
“앗!”
갑작스러운 돌풍에 머리에 대충 얹어두었던 모자가 날아갔다. 동시에 아마데아가 하던 회상도 날아가 버렸다.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이 가져올 테니 일어날 필요 없다고 이르며 모자를 찾아 상록수 사이로 사라졌다.
느닷없는 돌풍에 날아간 모자를 잡으려 황급히 일어섰던 아마데아는 혼자 남아 잠시 멍청히 서 있다가 다시 스르르 앉았다. 생각할 일이 많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레이스의 말이 옳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헬레니온이 마치 원래부터 앉아있던 것처럼 자연스레 아마데아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아있었다.
“제가 마냥 착한 상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레이스 정도의 인물이 하는 돌발행동은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지요.”
제대로 된 속내를 알 수 없는 놈.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아닌 건지조차 확실치 않은 놈. 아마데아는 노여움을 담아 그를 최대한 노려보았다. 얄밉게도 헬레니온은 약간의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말을 이어갔다.
“돌발행동이라는 것은 합의되지 않은, 그러니까 제가 명령하지 않은 일을 일컫겠지만 그레이스라면 제 뜻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경우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그레이스에 한해서는 돌발행동이 아닌 명령을 완수하는 다른 길을 찾은 거라고나 할까요.”
또 그 여자 이야기인가. 가뜩이나 심란해서 죽겠는데 누굴 약 올리는 건가. 아마데아는 약간 언성을 높이며 따지듯 물었다.
“그렇다면 그레이스가 너와 다른 뜻을 품는다면? 배신이라도 한다면 어떡할 거지?”
“그때는······.”
헬레니온은 말을 하다 말고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편하게 턱을 괴었다. 거울에 비친 듯 그녀와 같은 자세였다.
“지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그 느긋하면서 여유로운 질문에 그만 아마데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얼핏 걱정처럼 들리는 질문이었을 수도 있다.
“헬레니온 님. 돌아가신 줄로 알았더니.”
“이제 갈 겁니다. 아마데아 님, 그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번엔 근시일 내에 오겠습니다.”
그레이스가 눈치채기 전에 헬레니온은 정중하게 선수를 쳤다. 먼저 인사를 마친 그는 천천히 상록수 사이에 난 어둑한 길로 사라졌다. 아마데아와 그레이스, 두 사람은 말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자가 마치 도망치듯 날아가더니 나뭇가지에 걸렸지.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설마 헬레니온 님이?’
‘전보다 날 편하게 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목적을 알 수 없는 자야. 대체 날 어쩔 셈이냐고.’
같은 곳을 보고 있고 심지어 같은 인물에 대한 생각들이었으나 결코 같지는 않았다. 다시 마주 보게 된 그레이스와 아마데아는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그······, 헬레니온은, 그러니까······.”
어색함에 못 이겨 아무 말이나 꺼낸 아마데아는 곧장 후회했다. 하필 주제가 헬레니온인가. 그러나 후회한들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그레이스가 공손한 자세로 질문하는 바람에 말을 돌리려는 시도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아마데아는 잠시 눈을 굴려 그럴듯한 질문을 만들어냈다.
“헬레니온은 왜 자네에게 존댓말을 쓰지? 자네 말로는 그가 자네의 상급자라고 했을 터인데.”
“제게 존대를 하시는 것은 순전히 헬레니온 님의 자유입니다. 결코 제가 명령이나 부탁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마데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을 멈췄다. 성녀로 살던 시절엔 상대방에게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말을 고른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은 일절 해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자신에게 절절매는데 남의 심기를 헤아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아마데아는 그레이스에게 배운 대로, 상대방을 고려하며 최대한 우회하는 말을 고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더 이상 그런 변화에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친 김에 아마데아는 자신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보기로 했다.
“그레이스. 솔직히 말해주겠어? 헬레니온에 관한 것은 말하기 곤란하다면 지금은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너와 헬레니온은 단순한 상급자와 부하 관계로 보이지 않아. 둘의 관계 정도라면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레이스는 약간 눈썹만 치켜올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데아는 통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나 아마데아가 알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그레이스가 아주 약간이라도 반응이 있었다는 건 상당히 놀랐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레이스는 가르친 말투의 적절한 활용(아직 화술은 더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과 상대를 생각한 굽히는 자세에 감탄했다.
원래는 절대 말할 생각이 없던 내용도 말해줄까 고민할 만큼은 감탄스러웠다.
“헬레니온 님은 아우레티카 출신이십니다.”
실망하던 아마데아는 그레이스가 입을 열자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던 그레이스는 경각심을 가져야겠다며 내면을 차분히 가라앉히고는 말을 이었다.
“아마 이름이 아우레티카식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헬레니온 님처럼 아우레티카 출신이지만 빛의 신자들에게 불신자로 낙인찍혀 아녹스로 넘어온 자들이 꽤 있습니다.”
여태껏 수업을 받는 동안 듣기 싫다고 온몸으로 티를 낼 때는 언제고, 바짝 집중하는 아마데아의 모습에 결국 그레이스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개인적인 호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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