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8화
추락한 성녀 08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08
루블, 보쓰, 히즈
***
“어깨에 힘이 빠져있습니다.”
아. 아마데아는 땅만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 그레이스가 엄한 표정으로 굳건히 서 있었다.
티컵을 손에 쥔 채로 자세를 교정하다 그만 찻물이 약간 흐르고 말았다. 아마데아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분명 또 잔소리가 날아들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그레이스는 잠자코 말 없이 있다가 조심스러운 투로 물어올 뿐이었다.
“아까 헬레니온 님께서 무슨 말이라도 하셨습니까?”
“······아니.”
또 흘릴세라 조심스레 티컵을 내려놓고 책상에 한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그레이스의 자세 교정론에는 어긋났으나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니라고는 말했으나 아마데아는 누가 봐도 고민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민의 이유는 당연히 헬레니온일테고.
그렇지 않고서야 수업의 연장선임에도 밖으로 외출이 가능하다는 말에 기뻐했던 것 치고는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처음 야외 수업 얘기를 꺼냈던 어제 일을 떠올렸다.
「자세한 얘기는 헬레니온 님께 듣는 것으로 하고, 내일은 말씀드린 대로 야외 수업까지 하겠습니다.」
「야외 수업이라면 밖으로 외출인 것이냐? 나가도 되는 것이냐?」
기껏 해놓은 말투 교정이 무색하게 원래 말투가 튀어나와 버렸지만 눈에 띄게 기뻐하는 모습이라 그레이스는 관대하게 넘어갔었다. 그랬던 어제와 다르게 막상 정원에서 하는 야외 수업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정원이 너무 삭막한 탓일까. 그레이스는 상록수만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온통 초록색밖에 없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언제봐도 참 삭막하기 그지없다. 외곽에 위치한 비밀스러운 별장이라는 것은 알지만 약간의 꽃도 없는 곳을 정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레이스는 헬레니온의 무정한 성격을 떠올리며 씁쓸해했다. 마치 관리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관목만 심어둔 이 쓸쓸한 정원이 헬레니온과 같이 느껴졌다. 그레이스에게 거둬진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오직 앞만 보며 달려오신 분이다. 모두가 그런 그를 믿고 따르지만 그레이스에게만은 위태로워 보였다.
헬레니온은 이미 충분히 외로웠고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을 텐데. 아주 약간이라도 그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어도 좋지 않을까.
이전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원수의 가정교사를 자처한 것도 헬레니온에 대한 이런 걱정이 한몫했다. 헬레니온은 아마데아에게 약간은, 아니. 상당히 마음이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은 적 없으나 아우레티카에 살던 시절 둘이 만난 적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저 먼 발치에서 봐오던 소년의 일방적인 동경일 수도.
어느 쪽이든 그레이스는 헬레니온을 위한 선택지를 고른다. 눈앞의 이 성녀가 이곳에 적응하여 헬레니온의 휴식처가 되어주는 것. 그레이스가 바라는 건 그 정도였다. 둘이 어느 정도까지 갈지는 전적으로 헬레니온의 의지이다.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가지는 않았으면 한다만.’
그레이스가 바라는 최적의 ‘끝’은 헬레니온이 성녀에게 질려 버려버리거나 혹은 성녀가 헬레니온에게 푹 빠져 그의 장난감이 되는 것이었다.
그 끝을 위해서라면 아마데아를 소중히, 정성껏 닦아 윤을 내어놓는 것은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다. 끔찍한 성녀의 뒷바라지를 하며 그녀의 기분을 유심히 살피는 것쯤이야.
그레이스는 상념을 마무리 짓고 다시 아마데아에게 집중했다.
“헬레니온 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말하면. 뭐든 들어주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습니다. 월권이 되겠으나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아마데아는 그레이스 뒤편의 상록수만 유심히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그대가 충성을 바치고 있는 대상은 헬레니온이겠지. 맞나?”
“그렇습니다.”
“월권이라는 단어는 반란과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엄연히 두 단어는 다른 뜻입니다. 어느 정도의 월권은 봐주는 일도 있습니다.”
“그대의 주인은 퍽 상냥한가 보군.”
부드러운 말투를 연습하던 것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고압적인 말투로 물어오는 아마데아에게선 그만큼 고압적인 분위기가 났다. 어느새 아마데아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아왔다. 그레이스는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헬레니온이 연합장에 오르며 제게서 존대를 거두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애송이로 여겼거늘. 이런 위압감도 낼 줄 알았나.’
뒷목에 소름이 돋는 이 느낌은 아주 오래간만이다. 그레이스에게서 이런 반응을 이끌어낸 대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흡족한 인재상이다.
‘다만 내 계획엔 거슬린다.’
그레이스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은은한 미소로 대답했다.
“헬레니온 님이 상냥하기만 하신 분이셨다면 지금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셨겠지요.”
아마데아는 습관적으로 신성력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신성력은 전혀 반응해주지 않았다. 전부 없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발밑 바닥이 꺼지며 아찔한 구멍을 추락하는 듯한 아득함이 들었다.
그레이스의 예상대로 아마데아는 헬레니온이 전해준 아우레티카의 소식을 곱씹고 있었다.
「현재 아우레티카는 빠르게 혼란에서 회복했습니다. 새로운 성자가 아주 깔끔하게 신전을 장악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백성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수가 새 성자를 받아들이고, 귀족 전원도 빠르게 새 권력자를 그들의 수장으로 인정했습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른 속도입니다.」
「말도 안 돼······. 신전파 귀족은? 리가스 재상은? 안드레아스 후작은? 모든 이들이 가짜 놈을 옹호했을 리 없다. 그 꽉 막힌 귀족회가 미치지 않고서야······.」
「귀족 전원입니다. 만장일치로 통과했다고 하더군요.」
간악한 가짜 놈의 행태에 이가 갈렸다. 제깟 것이 무슨 재주로 신전파 귀족들을 회유했단 말인가. 아마데아가 입수한 에메로스는 그저 아우레티카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초라한 평민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평민이 하루아침에 모든 귀족을 제 편으로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신원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신전파가 모색하여 준비한 허수아비이거나.’
후자라면 빛의 세례를 통과해 성자로 인정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아마데아는 차라리 후자이기를 바랐다. 빛의 세례에 모종의 속임수가 있어 성자의 이름 자체가 거짓이기를.
하지만 헬레니온이 알려준 추가 정보가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뜨렸다.
「평민들의 지지율이 이상할 정도로 높다 했더니 빛의 세례를 관전할 수 있게끔 했다고 합니다. 만백성의 앞에서 진정한 성자로 인정받았다고 하더군요.」
「빛의 세례는······ 극소수의 사제들과 성녀만이 입관하여 치르는 의식이다. 공개된 상태로 의식을 치렀음에도 이상함을 느낀 자가 없단 말이냐?」
「아마 그동안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으니 아무도 몰랐을지 모릅니다. 꽤나 영악한 수로군요.」
댓글 0
추천 포스트
02. 황실 마법사
“ 레이안님, 황제폐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 황실 근위병들이 눈앞의 젊은 인형사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는 것을 본 중년의 남자는 놀라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레이안이라고 불린 남자와 근위병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이안은 방금까지 저를 모욕하던 중년의 인형사를 흘깃 곁눈질로 차갑게 바라보면서 근위병들에게 대답했다. “ 한낱, 어린아이들의 요깃거리 정도의
#레이안 #창작세계관로판입니다 #로판 #서양로판 #미인남주 #당돌여주 #구원서사 #트라우마 #마법사 #인형사 #성녀 #금지된관계 #맴찢 #심장에박힌열쇠 #저주에_빠진_츤데레_마법사님의_구원서사 #레이안_에밀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