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23)
027. 너를 멈추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구나.
생각 이상으로 잘 짜인 판국에 너무나도 잘 놀아났다.
우연으로 시작된 골목길에서부터, 의도된 길로 안내하던 그 모든 이야기까지.
하지만.
"미안하지만 여기서 그만둬야겠어, 프리실라."
"... 싫다고 하면 어쩌시겠어요?"
"우리는 아직 그자가 필요해. 그 남자가 가짜 현자의 돌의 위치를 알고 있어. 이 모든 일을 끝내려면 여기서 죽게 할 수는 없어."
프리실라의 입에서 한숨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제가 아닌, 이 남자를 살리기 위해서 오신 모양이신가요."
쉬이익.
프리실라의 등 뒤에서 다시금 독사가 땅에 몸을 끌고 기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메두사의 발소리도.
그 소리를 알아챈 이레시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돌아가세요. 마님께는 이미 너무 많은 빚을 졌어요. 이 이상 마님과 동료분들께 해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프리실라. 저들을 돌려보네.."
"협박을 도리어 제게 하시나요?"
프리실라가 어이없다는 조소를 흘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레시아의 얼굴에도 차가운 웃음이 비췄다.
"맞아."
그 비웃음이 가소롭다는 듯이 붉은 눈이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마치 저보다 더욱 거대한 포식자를 앞에 둔 것 같은 기분에 프리실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무리 마님이어도 저는 봐 드릴 생각이 없어요!"
프리실라가 두 손을 휘둘렀다. 공기가 칼날이 되어 그녀에게 날아갔다. 이레시아가 재빨리 몸을 틀었다. 단단한 바위가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났다.
프리실라는 봐줄 생각 따위 없다는 듯 공격을 퍼부었다. 광산 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레시아는 그런 그녀의 발악이 우습다는 듯 그녀의 앞으로 도약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프리실라가 흠칫 놀라 뒤로 몸을 뺐다. 그녀의 귓가에 야트막한 숨결처럼 속삭이는 음성이 흘러들었다.
"아니, 협박은 내가 하고 있는 거야."
"... ?!"
이레시아의 뒤에서 작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춤 정도 밖에 오지 않는 아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무표정한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프리실라 언니."
"아이린...?!"
절망과 함께 프리실라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순간 독사가 움직이는 소리와 발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이레시아는 어둠 속을 주시하며 아이린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메두사와 독사를 저 안쪽으로 물려. 프리실라."
하나뿐인 네 동생이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걸 보고 싶지 않다면.
프리실라가 당혹감에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네게는 미안하다 생각해.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고, 방법은 이것뿐이었어."
"...... 가장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신 게 아니라요?"
프리실라의 입이 삐뚤게 웃었다. 작은 바늘 따위가 그녀의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우리를 속인 건 너였어."
"먼저 배신 당한 건 저였어요!!"
프리실라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마님을 믿었어요! 적어도 제 동생을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으실 분이라고!"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허공으로 나부끼며 뱀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이레시아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이린의 눈을 가린 손에 힘을 주었다.
"미안하지만 카일을 이리로 보내."
"보내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신들에게 살해당하나요?"
중성적인 목소리가 탁하게 울렸다.
"프리실라."
"제가 뭘 잘못했어요?"
죽기 직전까지 물었던 질문의 화살이 이번엔 이레시아에게 날아들었다. 줄줄이 흐르던 눈물은 또 다시 피눈물로 바뀌어 있었다.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럼 당신은 카일은 구해주면서 왜 나는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거죠?!"
프리실라의 질문이 이레시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건 아마도 그 질문이 그녀를 상처 입혀서였다기 보다는 절규와도 같은 단말마 같이 느껴져서 였을것이다.
"카일은 인간이고 나는 괴물이어서 인가요?"
아니였다. 그런 것으로 치자면 그녀 역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원래라면 죽었어야 했을 내가 살아서인가요?"
그것 역시 아니였다.
자신 역시 죽음에서 발버둥 치다가 도망친 것이었으니, 그녀에게 도리어 동질감까지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니면, 원래 나는 죽었어야만 마땅했던 존재여서 그런가요?"
아니였다. 모든 건.
"... 네가 너무 멀리 가버렸기 때문이야."
이제는 너를 도와줄 방법도, 구원해줄 방법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고.
그러니 이제는 이런 식으로라도...
"너를 멈추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구나."
형언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프리실라를 보던 이레시아가 아이린의 눈을 가리던 손을 떼어냈다. 프리실라가 당황하여 황급히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이레시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치 무심하게 짐짝을 던지듯이 아이린의 등을 떠 밀었다. 어린 아이의 인영이 휘청거리며 떠밀어지자 프리실라는 희게 질린 안색으로 소리쳤다.
"아이린!!"
반사적으로 프리실라가 아이린의 눈을 가리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때 뒤에서 줄곧 숨을 죽이고 있던 늑대를 향해 이레시아가 소리쳤다.
"늑대씨!"
오싹한 한기가 프리실라의 등줄기를 스쳤다. 푸른 빛을 띄는 수십 개의 수식이 늑대의 뒤에서 번쩍였다.
[5급 상위 주문 - 포효하는 짐승 (Roaring Beast)
강화 수식 : 확인]
"열반(涅槃)하라. 내 소강(小康)은 사나운 안식(安息)이니."
사자의 머리 형상을 한 사나운 마력이 달려들었다. 프리실라가 당황한 눈으로 그것을 쫓았지만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콰과과광!!!!!
광산의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광산의 한쪽 벽이 천장과 무너져내렸다.
끼에에에엑!!
그리고 프리실라를 협박하여 의도한 대로, 그 아래에 있는 메두사들이 무너지는 돌덩이에 깔려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위험을 감수하고 터트린 공격에 지반이 흔들리며 이리저리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지독한 난장판 속에서 프리실라는 온몸으로 아이린을 끌고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일말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프리실라는 고개를 들었다. 주변은 이미 엉망이 되어 메두사와 독사의 사체들이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품 안의 동생을 내려다봤다. 기절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아이린의 얼굴 위로 프리실라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무너지는 천장에 머리라도 깨진 모양이었다.
"... 아이린..."
상처 투성이 손이 천천히 아이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다행이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쩌적!
그 순간 아이린의 얼굴에 금이 갔다.
"... ?!"
프리실라가 놀라 단말마를 지르기도 전에 얼굴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목을 타고 내려가 온몸을 뒤덮었다. 생기 넘치던 피부가 흙빛으로 변하고, 입고 있던 옷가지까지 색이 바랬다.
이윽코 팔 한쪽이 떨어지더니 온몸이 마치 흙처럼 무너져 모래처럼 흩어졌다.
프리실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기분으로 제 품 안에 남아있는 모래를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봤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든 건 목 언저리에 날카로운 날붙이가 맞닿은 후 였다.
이레시아 역시 떨어지는 돌을 온전히 피하지는 못한 모양인지 이마에서 피가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 그 뒤로 늑대가 피떡이 된 카일을 집어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프리실라의 고개가 마침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듯 바닥으로 꺾였다.
"미안. 놀랬니?"
"... 이게 도대체... 다 뭐죠?"
"흙으로 빗은 인형에 작은 통신 아티펙트를 넣어 만들었어. 인형은 말을 하지 못하니까."
"그럼... 진짜 아이린은..."
"히아센과 함께 안전한 곳에."
하하.
결국 프리실라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종하던 메두사들은 모두 죽고, 카일도 빼앗겼다. 남은 것은 망가진 몸뚱이뿐이었다.
허망한 웃음소리가 잠시 광산 안을 메웠다. 이레시아는 인내심 있게 그 웃음의 끝을 기다려 주었다. 한때는 한없이 가여워 마음이 조금 쓰이기까지 했던 여자였는데, 이제는 세상의 모든 불행과 절망을 뒤집어쓴 괴물이 되어 있었다.
"...... 제가, 졌어요. 마님."
마치 고해 성사와 같은 말에 이레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푹 숙여진 고개가 마치 교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목을 쳐야 하는 일은 그녀의 일이었다.
나도 언젠가, 도망치고 있는 죽음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됐을 때 이 여자 같을까.
여자의 모습이 금발의 왕의 앞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있는 제 모습과 겹쳐 보였다.
프리실라가 있을 지옥이 앞으로 제가 걷게 될 길과 같은 선상 같이 느껴졌다. 목을 겨누던 날붙이가 결국 바닥으로 늘어졌다.
"이레시아."
검을 치워버린 이레시아를 보고 늑대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프리실라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더 이상 저항을 의지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 웃긴 일이지."
낮게 가라앉아 지친 목소리로 이레시아가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너를 몰아넣었으면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으니 말이야."
프리실라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녀린 인간의 얼굴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아니, 누가 너를 심판할 자격이 있을까. 너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설령 신이 온다 해도 그녀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신이 너를 벌하러 한다면 내가 그 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야."
"마님..."
"근본적인 일의 해결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네 말대로 나는 지금 네 손에서 원수를 빼앗았고, 너를 막아서고 있는 거야."
그러니 프리실라.
"너를 구할 힘이 없는 나를 원망해. 너의 마지막 복수를 가로채 간 나를 원망해."
속 시꺼먼 원망들은 모두 나에게 던져버리고, 이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살도록 해.
바닥을 짚고 있던 프리실라의 손이 바르르 떨리며 주먹이 쥐어졌다.
"하지만 마님, 저는... 저 남자가 너무 증오스러워서 멈출 수가 없어요. 저 남자의 친구도, 가족도 모조리... 저와 같은 지옥 속에 살게 하고 싶어요...!"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원한이 차고 넘치면 결국 네 가족까지 상처 입힌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네가 조부를 메두사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처럼.
흠칫 놀란 프리실라의 어깨가 단단히 굳었다. 이레시아는 꺼질 듯 약한 힘을 이끌고 가까워지는 어둠을 응시했다. 무너진 저 광산 끝에서 마지막 남은 메두사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잔뜩 주름진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메두사는 비틀거리며 다가와 이레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
프리실라의 두 눈이 흔들렸다.
"네가 프리실라와 아이린의 조부인가?"
"예. 부디..."
꺼져가는 목소리로 메두사는 그녀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제 손녀는 죄가 없습니다. 가엾은 아이입니다. 이 모든 일의 죗값은 제가 받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제 목을 받아 가셔도 좋으니 제발..."
제 손녀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프리실라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조부를 바라봤다.
"이 늙은이가... 지켜주지 못해서... 우리 손녀가 아프지 않게 잘 지켜봤어야 했는데... 모두 제 잘못입니다."
마지막 메두사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프리실라의 눈에서 멈췄던 피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이레시아는 이제 더는 해줄 위로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대신 충고를 던져주었다.
"여기서 멈춰."
진심을 담은 충고였다.
"............."
"더 깊은 광산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프리실라."
집행관으로써 목을 자르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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