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는 무거운 공기속에 끝났다. 분명 어딘가 톱니바퀴가 어긋난 부분이 있음을 확신했다. 진짜 범인을 알 수 있는 부분이. 그러나 식사를 끝날 때까지 위화감의 정체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광대왕의 지독한 향수 냄새 때문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뜨거운 쥐가 난 듯한 기분이 머리통을 감쌌다. 천둥왕이 나서서 어색하게 화제를 돌려보려고 애썼지만 별 말솜씨 없는
"어디 갔지?" "왜그래? "시계끈이 없어요." "너 시계 안 차고 있던데." "가방에 달아서 허리에 묶어뒀던 거에요... 주머니... 이 주머니에 달려있던 거." 나는 허리를 더듬거리며 말했다. 문장을 내뱉기 전까지는 내가 울먹거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큰아저씨가 준건데, 방금 받은 건데..." 그렇게 마음에 드는 끈은 아니었다. 그러나
Q. 현재 로판 정형화의 원인 중에 2018하반기즈음부터 동인여성오타쿠집단 내에 판무 장르가 재유행하면서 "여주판, 여주중심/사건중심 성향의 로판 마이너 발굴단 독자층"이 판무로 이동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대한 유겸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무슨 헛소리임?이라는 반박까지 다 좋습니다ㅎㅎ (판무로 이동=거의 장르 이탈+판무와 병행하면서 예전만큼 로판
드디어 본론인 로맨스판타지 속 여성의 이미지와 로맨스 서사의 특징을 분석해보자. 4~6편을 통해 대중문화 속에서 굳어져있는 여성 이미지에 대해 다뤘으니 어쩔 수 없이 미소지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점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이번 시리즈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덜 미소지니한 여성 이미지와 로맨스 서사를 제시할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거지 '미소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할까 고민해봤는데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해볼까 한다. 성인이 된지 얼마 안 됐을 때 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즈음에도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굳혔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내킬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또 연인 간의 사랑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아무하고나 마구 시도하기는 또 귀찮았
핀업 걸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보자. 핀업 걸은 현실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사진이 누구나 찍을 수 있는 물건이지만 옛날엔 그렇지 않은 물건이다 보니 핀업 걸은 두 분야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던 셈이다. 예를 들자면 마릴린 먼로 또한 핀업 모델로 먼저 유명세를 탔는데 핀업 모델을 그대로 찍어서 사진을 인쇄해 사용하는 게 아니
로맨스를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보면 이 질문으로 시작하는 게 합당하다. 여성은 남성을 기본적으로 사랑하는가? 오늘날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갈릴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긍정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는 그 과거에서부터 존재한 맥락상 이 질문을 전적으로 긍정한다. 2, 3편을 통해 소설에서 여성 작가가 나타난 배경과 대중문화가 구
"그... 싸우면 무서워요. 큰 아저씨, 저 이제 나갈 참이었어요. 이만 갈게요. 광대 아저씨도 같이 가요." "그래, 애 앞에서 그러는 거 아니지, 훌라그." 광대왕은 이겼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큰왕의 안색은 대비되듯이 더더욱 붉으락푸르락했다. "잠깐."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자리를 서둘러 뜨려는 광대왕을 막아 세웠다. "어디를 가는데" "어..." "내
"이건 정말 마법시계인가요?" "방금 저것도 마법시계라니까." "그래요, 이건 무슨 마법이 있는데요?" 아이를 바보 취급하는 어른들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선물이란 즐거운 법이었다. 물론 나는 자그마치 열 두살, 마법을 믿을 나이는 아니다. 그래도 조금 쯤은 가슴이 두근거려도 괜찮지 않을까. 최근 며칠은 상상도 못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손목
설명하다 피곤해져서 은근슬쩍 넘어가게 된 1950년대 문화 파트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정말 대충 사는 사람이구나 싶은가? 정답이다. 체력이 안 되면 사람이 이렇게 글러먹어진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체력이 안 좋아지면 집필 중 집중력 유지가 힘드니까 코어근육을 만들어 둬라. 뇌근육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색하고 말하면 뇌란 장기의 효율은 극악을 달린다
이 얘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로맨스 = 여성용이라고 취급받는 현실에 대해 먼저 다뤄야한다. 그리고 이게 생각보다 되게... 맥락이 깊어서... 역사 얘길 해야하니 분량을 각오하길 부탁한다. 그리고 본론부터 내던지며 시작하자면 로맨스는 그 탄생도 존재도 온전히 여성을 위하지 않는다. 영미권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그 동네는 기사도 문학의 영향이 강해서
많이들 알법한 얘기를 구태여 하려니 이대로도 괜찮은지 모르겠는데... 뭐 어쩌겠는가. 창작은 원래 비대한 자아가 없으면 못하는데. 앞으로 더 뻔뻔해지도록 힘내보겠다. 페미니즘과 사이가 안 좋은 게 있다는 거야 이젠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과 로맨스의 사이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이가 안 좋음'을 그러니까 공격해
"앗." "다시!" 간신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면 가슴을 밀려서 다시 넘어진다. 다시, 하는 외침을 듣고 일어나면 이번에는 어깨를 밀려서 넘어진다. "다시!" 다행히 발 밑에 겹겹이 깔린 푹신푹신한 융단 덕분에 아무리 넘어져도 엉덩이가 아프지는 않았다. "다시!"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물어보자마자 천둥왕은 나를 궁둥이 성의 안뜰로 데려왔다. '그럼 당장 시
로판의 계보에선 영향력이 적은 게임 판타지에 대해 한번 얘기해보자. 왜 별로 로판에선 영향력도 없는데 얘기하나 싶은 사람도 있을 텐데 싫든 좋든 장르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남성향 여성향으로 나누는 게 별로 바람직한 현실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자든 여자든 어쨌든 똑같은 사람인데 성별에 따라 가지고 있는 욕망이 몹시 다른 것
광대왕의 어깨에 매달린 채로 달린지 육 분 정도 되었다. 더 이상 천둥왕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리였다. "아아, 재밌었다. 그치?" "응..." "그럼 내 딸 할래?" "아뇨..." 남자는 조금 과장되게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까 왜 뛰기 시작했더라. 뭔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만 중간부터 '천둥궁'은 '궁둥이'랑 발음이 비슷하네, 하는 생각을
어제는 분위기가 무서워서 자는 척을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주 푹 잠들어버렸던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나자 마주한 것은 바닥부터 벽까지 폭신폭신한 넓은 방. 쌓기놀이 장난감과 나무 목마부터 그림책과 필기도구까지, 방은 제 주인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키메라처럼 통일성 없는 아동 용품들로 가득했다. "열 살이라니. 내가 키가 작긴 하지만." 어제 들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