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독자층은 왜 로판을 외면하는가?

Q. 현재 로판 정형화의 원인 중에 2018하반기즈음부터 동인여성오타쿠집단 내에 판무 장르가 재유행하면서 "여주판, 여주중심/사건중심 성향의 로판 마이너 발굴단 독자층"이 판무로 이동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대한 유겸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무슨 헛소리임?이라는 반박까지 다 좋습니다ㅎㅎ (판무로 이동=거의 장르 이탈+판무와 병행하면서 예전만큼 로판을 읽지 않음을 합한 의미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질문이 들어와서, 답변 삼아 하는 건데... 본론부터 던지면 선후관계가 반대다. 로판이 정형화됐기 때문에 특정 독자층이 아예 빠졌다.

이번 글은 어쩔 수 없이 날카로운 내용이 될 테니 미리 양해를 구해둔다. 이거 내 얘긴가? 싶은 창작자가 있다면 음... 이미 저지른 건 어쩔 수 없다. 다음에 덜 저지르게 생각이나 한번 해보면 된다. 어차피 절대 단번에 나아질 수 없는 문제다. 시작해보자.

독자층 안에서 로맨스에 대한 선호도는 0-10으로 나뉜다. 10은 로맨스가 들어가야지만 읽는 독자층이고 0는 로맨스를 매우 적극적으로 피하는 독자층이다. 그리고 2019년을 돌아보면 로판은 대체로 10에 가까운 수의 독자들을 만족시키는데 주력해왔다.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육아물, 시한부물, 집착남, 자칭악녀, 그럴 생각 없었는데 모두가 내게 반해서 나만 좋아해 등등으로 가득했고 2018년까지 흥했던 작품들의 경향을 생각하면 변하겠거니 했다가 안 되겠다고 2019년 연말부터 비평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쉽게 착각할 수 있는데... 로맨스 서사 =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러브 스토리가 아니다. 로맨스 서사는 극도로 정형화된, '사랑과 관련된 극도로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이성애 코드'다. 헷갈려할 거 같으니 이하 로맨스 코드라 부르겠다.

예를 들자면 이런 얘기다. 영미권에서 이따금 동성애 커플의 연애 서사에다가 로맨스를 붙여서 게이 로맨스 / 레즈비언 로맨스라고 부르긴 하지만 이건 진짜로 최근의 일이다. 정확히 몇년도부터였지는 기억이 좀 흐릿한데... 미국에서도 '으! 동성애자들의 로맨스는 맨날 비극으로 써먹어서 동성애 하면 천벌 받는 양 다루는 거 지겹다! 우리도! 마냥 달달하고 마냥 행복해지는 로맨스를 누릴 거야!'라는 의미로 게이 로맨스, 레즈비언 로맨스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마 2015년인가 2018년 이후? 부터 그랬을 거다. 이렇듯 '로맨스 코드'에는 그 특유의 코드가 존재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로 평소 0인 독자층이라 해서 괜찮은 연애 서사를 안 먹는 건 절대 아니다. 단순히, 로맨스 코드를 싫어하는 거지. 로맨스 코드가 왜 싫냐고? 반대로 묻고 싶은데 이쯤 되면 기사도 문학에서 유래한 구원자적 남성상과 무력하지만 정서적 구원자로 종결되는 여성상이 질릴 만도 하잖은가? 까놓고 얘기해서... 여기서 온전히 벗어나는 로판 소설을 생각나는 대로 대보라고 했을 때 몇이나 나올 것 같은가. 아주 조금만 엄격하게 기준을 잡아서 주인공에게 분명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데도 결정적인 순간 무력해지는 점이나 동화적 구성 자체의 한계를 따지기만 해도 우수수 떨어져나간다.

소위 말하는 '동인여성오타쿠집단'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작품들이 판타지에서 쏟아져나온 건 사실이다. 이 부분을 간과하는 것 같은데... '동인여성오타쿠집단'은 옛날부터 그 누구보다도 로맨스 코드를 제멋대로 비틀어가며 가지고 노는 집단이다. 로맨스 코드를 누구보다도 애증하기 때문에 그 과도한 이성애중심주의를 BL로 비틀어가며 먹는 거고 그렇게 비틀어가면서 먹을 정도로 캐릭터들이 만드는 관계성 자체는 좋아한다. 뭐 여기도 깊게 들어가면 그 안에서 이성애를 더 선호하는 부류도 있고 아예 연애적 감성을 싫어해 원작에서의 관계성만 미는 부류도 있긴 한데, 뭐 어쨌든 그렇다.

개중에서도 동인에서 거하게 먹힌 게 전독시, 내스급, 데못죽인데... 데못죽은 2021년 작이니 일단 제외하고 내스급과 전독시 위주로 얘기해보자. 이 두 작의 가장 큰 특징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이 두 작의 주제는 사랑이다. 전독시는 김독자가 사랑한 가상의 세계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고 내스급은 좀 기독교적 메타포가 강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인간으로 태어나 사는 이상 맺게 되는 관계성에 대한 주제의식이 선명한 작품들이었고, 이 작품들의 주제의식이 로맨스 코드에서 벗어나있으니 노골적인 로맨스 코드에 질려있는 특정 독자층에게 먹히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2018년 이후의 로판에서 유행한 메인 스트림을 분석해보면 실질적으로 로맨스의 하위 장르처럼 기능했는데 굳이... 특정 독자층이 멀쩡히 물 잘 나오는 근처 우물 놔두고 집 앞의 마른 강바닥을 긁어야할 이유가 단 하나라도 있는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육아물이 흥하기 시작한 초반까지는 그래도 특정 독자층이 참아줬다. 시작부터 로맨스 코드가 아니니까 참아준 거였지만 새로운 종류의 육아물이 가질 수도 있던 가능성을 망가트린 건 이를 한껏 열화시킨 로판의 작가들이다. 

이성애적 사랑말고 다른 종류의 사랑을 다룰 거라면 하다못해 주제의식이라도 선명해야 했다. 육아물 뒤에 숨어있는 '아낌 없이 사랑 받는 여자아이'에 대한 욕망 자체는 뭐 그래,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욕망에 충실할 거라면 그렇게 주인공을 '사랑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여자아이'로 만들면 안 됐다. 특히나 주인공이 회귀해 다시 아이가 된 거라면 더 냉정하게 그런 퇴행적 감성이 생긴 이유를 바라봐야 했다. 대충 귀엽고 예쁘게 생겼고 착하게 행동한다고 사랑 받는다고 해서는 안 됐다.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받게 되는 주인공이 말하는 메시지가 '사랑 받기 위해서 여자아이는 반드시 외모를 가꿔야 하고 보호자에게 굴종해야 한다.'가 되기 때문이다. 대중이라고 이런 메시지를 못 느낄 것 같은가?

시한부물도 마찬가지다. 이미 2018년에는 페미니즘 기조가 로판에 들어와 있었다. 기존의 여성상에 대한 회의감이 독자층 안에서 피어나고 있는데 여전히 주인공은 여자란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개인적 구원이 약속 되어있다. 이 전형적인 집 안의 천사는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타인의 영혼을 구원해줄 순수이자 보통은 결혼을 탈출구 삼긴 한데, 동시에 결혼이기 때문에 가족가치로의 회귀로 끝난다. 모든 구성이 로맨스 코드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집착남도 엄연한 한계가 있다. 폭력적인 남성성이 집착이라는 말 뒤로 한껏 미화되어있는 상태로 권력을 쥔 남성과 저항할 능력이 없는 여성간의 관계가 성립된다. 사랑이란 명목으로 관계의 주도권을 남성이 여성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하사'의 형태를 취하는 권력은 주는 이의 기분에 따라 도로 가져갈 수 있어 썩 매력적이기 힘든데다가 대개는 이를 권력인 척 여성을 통제하는 형태로 전개가 진행되기 때문에 더 한계가 선명하다. 여성 주인공에게 관계의 주도권이라는 권력이 정녕 있었다면 남성 주인공이 감히 험악한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내며 이런 행동은 하지 말고 저런 행동은 해달라는 투정을 부릴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건 압박이잖은가. 내 뜻대로 해주지 않으면 상황과 관계가 어그러질 거라는 협박이다. 사랑이라 부를 수 있나, 이걸? 이 관계를 로맨스라고 부르는데에는 모두가 동의할 텐데 말이다.

자칭악녀? 주인공에게 있어, 주인공이 속하게 된 사회에 있어 선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왜 과거의 주인공이 악이라 불렸는가? 악이라 구분지은 사회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주인공이 그냥 일반적으로 잘못한 것인가? 과거와 주인공이 다른 행보를 보인다고 모두가 돌아볼 정도의 무언가를 정녕하고 있는가? 사업적 성공이 주인공의 명성을 드높이는 건 현실에서도 통용되는 사실이라지만 능력주의 사회는 정녕 선인가? 마이클 샌델이 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같은 책을 냈던가? 주인공이 사회적 기대를 배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악으로 분류 되었다면 주인공은 사회적 기대가 애초에 잘못되었다 부정하고 사회가 변하도록 설쳐야하지 않는가? 이 과정에서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조금만 NGO 단체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조사해본다면 얼마든지 대입시키거나 변형시킬 수 있는 사례들이 쏟아져나오는데 주인공이 능력주의의 휘장을 두르는 것만으로 모든 사회적 불합리가 정리되는 것도 몇 번이고 반복되면 지겨울 수밖에 없잖은가? 그렇게 능력주의의 휘장을 두른대도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얘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더.

엑스트라지만 좀 변했다고 모두가 사랑한다? 난 너랑 연애할 맘 없는데 왜 반했다고 난리냐는 하이틴 로맨스 감성은 뭐 그렇다고 칠 수 있다. 그게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하이틴 로맨스적 기대에 충실하기 위해서 좀 더 현대에 가까운 로맨스 코드에서 자유롭지는 않고, 어쨌든 로맨스 코드에는 취향을 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행위에 동의를 사전에 구하지 않는 남성성과 분명 싫었는데 남자 주인공에게 키스를 당하고 난 뒤에 결론적으로 사랑에 빠져버리는 수동적 여성성이라는 젠더 규범 자체가 지긋지긋하게 낡지 않았는가. 내 경우 이걸 마냥 나쁘게 보는 건 아니다. 한 눈에 반해서 끙끙대는 여성 주인공보다는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름 자율성과 결단력, 용기, 정서적 통제 능력을 보이는 여성 주인공이라면야 얼마든지 있어 나쁠 것 없다. 기왕이면 남성 주인공 멱살 잡고 키스 박는 정도로 주도적이고 자신의 감정과 대면할 줄 알고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격성을 보이는 여성 주인공이라면 더 환호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래서 이러한 코드의 주인공들은 얼마나 주도적이던가. 어느 정도로 주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뭐 이런 얘기다. 로맨스 판타지는 그 탄생이 백래시에서 기인했던 만큼 어쩔 수 없이 미소지니가 그득한 면모가 있고, 그 미소지니는 대체로 로맨스 코드에서 기인했으나 관성적으로 재사용되어왔으며 이 때문에 로판이라는 장르 자체가 예상하는 독자층은 더 젠더화되어있고 극단적으로 좁다.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다는 고정관념이 로판을 탄생시켰고 로판에 모순을 불러오고 있다. 여자는 무조건 로맨스 좋아한다, 남자는 역시 액션이지! 같은 쌉소리가 아직도 먹히는 세상이고 그래서 로판이 탄생했잖은가? 처음 로판으로 분리하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던 이유도 그렇다. 앨리슨 플러드(Alison Flood)가 가디언(The Guardian)에서 10대 여성들은 남자 주인공에게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데 10대 남성들은 이걸 못 한다는 피곤하고 진부한 주장은 할리우드가 여성 캐릭터를 체계적으로 배제해온 것에 대한 변명으로 쓰이는 논리적 근거임을 지적한 적 있는데 소설이라고 대체 뭐가 다른가?

사랑과 로맨스는 제법 다르다. 이걸 구분하지 않고 대충 뭉뚱그려서 이 시장에서 로맨스가 잘 먹혔어요! 라고 쉽게 말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1. 역사적으로 청소년들이 읽는 문학에서 건전한 성적 관계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데 2. 앤 엘리자베스 영거 박사(Ann Elizabeth Younger, PhD)가 쓴 논문 소녀를 만드는 방법 : 청소년 문학에서의 여성의 섹슈얼리티(How to make a girl: female sexuality in young adult literature)에서 지적했듯 10대들은 대중적인 미디어와 소설로부터 대부분의 성적 지식을 얻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 섹슈얼리티 형성에 영향을 받고 있고 3. 이렇듯 미디어와 콘텐츠, 광고를 통해 성적이중잣대와 젠더 규범이 강화되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장르의 정의를 자꾸 묻는 질문을 하곤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그래서 로판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여성 주인공인가, 위로 받을 수 있도록 변형한 로맨스 코드인가? 주요 정체성이 여성 주인공인데 로맨스 코드도 포함되는 게 뭐가 문제겠는가. 어차피 완벽한 장르란 건 존재할 수 없는데. 어떤 사람들이 로맨스 코드로 위로 받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는데... 정말로 로맨스 코드 안에 내재된 문제에 둔감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수잔 더글라스의 책, '배드 걸 굿 걸 - 성차별주의의 진화 :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술(Enlightened Sexism)'에서 문장을 빌려오면 이렇다. "대중매체가 강력하고 이질적인 이미지와 메시지를 강제로 주입하여 우리가 수동적이고 의심 없는 태도로 그에 수긍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정체성, 꿈, 희망, 포부, 공포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의 로판은 얼마나 우리의 꿈과 야망, 그리고 누리고 싶은 사랑을 반영하고 있는가?

사족 1. 물론 독자들이 여성 주인공에게 더 까다롭게 구는 측면은 있다. 완벽하지 못한 여성 주인공을 싫어하는 티를 내며 단죄를 하는 기분을 내는 경향은 분명히 있지만 욕하면서도 몇 화는 좀 더 보니까 좀 시원하게 내질러도 된다. 약간 주인공이 상황에 따라 나쁜 짓도 해도 된다. 어떻게 합리화하느냐의 문제고 어떻게 연출하느냐의 문제기도 해서 어려운 건 알겠는데 독자들이 다는 코멘트가 까칠해지는 티 나자마자 서둘러서 독자들을 달래려고 하는 건 오히려 완성도를 떨어트리니까 이럴 때는 좀 비대한 자아를 휘둘러야 한다. 예술하려면 필요한 덕목이다, 비대한 자아.

사족 2. 대중문화 페미니즘 비평이 궁금하다면 당연히 수잔 더글라스의 '배드 걸 굿 걸 - 성차별주의의 진화 :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술'은 한번쯤은 꼭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좀 어렵게 느껴진다면 멀리사 에임스와 사라 버콘이 공저한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성을 만들어내는가(How Pop Culture Shapes the Stages of a Woman's Life)'를 읽어주면 좋다. 좀 더 가벼운 논조로 다뤄서 후루룩 읽기 좋은데다가 2장에서는 2000년대 미국에서 세계로 퍼져나갔던(한국은 이때 자국내 붐 덕에 제법 빗겨갔다) 영 어덜트 픽션 붐을 이끈 트와일라잇, 헝거 게임, 가십 걸, 다이버전트처럼 유명작에 붙는 비평들을 일부 소개하고 장르소설에서 여성 주인공이 히트치면 남성위주를 기본으로 상정하다못해 뇌가 녹아서 나오는 쉰소리가 미국에서도 나왔는지 약간은 언급되어있다. 또 얼마나 문화적으로 유사한지도 관전 포인트가 된다.

사족 3. 백래시를 기준으로 세대를 나눈다면 2019년이나 2020년이 더 적합하겠다고 최근 생각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썼다. 

댓글 2


  • 진지한 바다표범

    근데 뭐 여자들만 로맨스 좋아하는게 아니고 남자들은 판타지, 하렘물 태그를 이렇게 따로 두는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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