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과 여주판은 나뉘어져야 할까?

건강이 영 그래서 이번 달은 좀 쉬엄쉬엄 하려고 했는데 좋은 질문이 들어와서 여기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들어온 질문은 아래와 같다.

Q. 장기적으로 로판 카테고리가 모든 종류의 여주판을 포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어떤 여주판들이 지금의 판타지/현판/무협 카테고리로 떠나서 자기 지분을 확보하는 게 낫다고 여기시나요

좋은 질문인데...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이 말인 즉, 답변이 매우 길 수밖에 없단 뜻이다. 그럼 천천히 얘기해보자.

로판과 여주판 분류에 대한 변화를 얘기를 하기 전에, 모두가 합의해야 하는 전제가 몇 가지 있다.

1.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정의가 무엇인지 다수의 합의 아래 어느 정도는 정해둬야 한다.

2. 비록 로판의 정의에 다수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실질적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3. 다수가 동의한 정의를 거부하는 개인이 나타나더라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 전제를 되새기면서 얘기를 시작해보자. 그간 장르잡설 안의 글들을 꾸준히 읽어왔다면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로맨스판타지는 최종적으로는 사라져야할 장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페미니즘은 최종적으로 자기소멸을 원하는 철학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다. 그리고 이제 알만치 알겠지만 그게 절대... 어느날 갑자기 쉽게 될 일이 아니다. 쉽게 되면 오히려 그 자체가 폭력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정치에 관심 있다면 잘 알고 있을 거고, 그동안 페미니즘의 역사를 가볍게 알려주었으니 이해했겠지만 무언가 없던 걸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번 만들고 나면 없애기는 더 어렵다. 너무 당연한 얘긴데, 정말 그렇다. 

지금 당장 로판의 정의가 여주판이 되어서 기존 로판 장르 안에서 로맨스 서사가 강한 분들이 싹 다 로맨스로 장르 분류가 새로 되었다고 쳐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거고 작가들은 더 난리날 거다. 뭐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판 독자들이 로판 = 여주판이라는 상황에 만족한다고 쳐도 골수 로맨스 독자들이 갑자기 넘어온 로판에 적대적일 수도 있다. 적대적이지 않더라도 그렇게 장르에서 밀려난 작가의 정산이 기존의 수익률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반대로 여주판이 다른 장르에서 연재하는 지금 상황도 썩 그렇게 좋기만 한 것도 아닌 게, 지금 플랫폼의 구조상 독자와 작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만약 어디서 작당질하기로 하고 모여서 특정 작가의 특정 작품에 모여서 예전과 비슷하게 여성주인공이 무슨 로맨스 없는 장르냐, 여성향 장르로 꺼지라고 괴롭혀대면 작품의 수익률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플랫폼은 작가를 적극적으로 보호해줄까? 독자들이야 예전과 달리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이 업계의 절대갑은 플랫폼이다. 그리고 플랫폼은 웹소설 업계의 사정에 정말 귀 닫고 살고 있다. 작가 보호는 지들 알 바 아니고 어떻게든 작가와 출판사와 소속 직원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수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데 어느 작품에서 소요가 발생했을 때 그 소요가 무엇에서 기인했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 게 장기적인 이득이 될지 계산한 후에 대처하지도 않는다. 요즘 들어 리디가 보인 행태를 보면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웹소설은 아직도 확장성이 있는 시장이다. <상수리나무 아래>가 아마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걸로 보아, 작품 픽만 잘 한다면 해외에서도 먹힌다고 그동안 해왔던 주장에 신빙성이 더해졌는데... 문제는 여전히 장르 분류다. 

영미권 소설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2000년대 그랬던 것처럼 여성주인공이 판타지 배경으로 모험도 하고 성장도 하고 연애도 하는 시놉시스의 소설들이 당연히 판타지로 분류되는데 해외시장을 개척할 때 로맨스판타지를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한국에서도 으레 그러하듯 주 소비자의 성별로 분리된 세계관으로 따질 것인가? 독자의 연령대는 고려대상이 되어야하지 않나? 영미권에서는 판타지가 영 어덜트 픽션(어른들도 읽는 청소년 장르문학...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에 포함되어 있는데 지금의 로판 안에 녹아있는 감성이 영미권의 독자에게 매력적이 될 수 있는가? 한국의 로맨스판타지가 자의든 타의든 대표되고 있는 감성은 퇴행적인 구석이 있고 지나치게 이성애중심주의인데 차별주의자들이나 좋아하는 장르로 딱지 받을 수도 있다. 다양성을 고려해서 작품을 골라도 해외의 입장에선 장르의 정의를 알기 힘드니 어느 정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은 로판의 정의를 어느 정도로는 필요로 한단 소리다. 로판이 왜 생긴 장르인지 알고 나서 이러저러한 맥락 때문에 생겼지만 성별 분리가 되어있는 현황이 소비자의 입장에서 편하기 때문에 존속하고 있다고 한다면야, 해외 시장쪽에서도 어떻게 하는 게 더 팔릴지 따져보고 로맨스판타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든 아니면 영 어덜트 픽션으로 포함시켜서 받아들이든 할 테지만 그런 내력을 잘 설명할 거란 기대가 들진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든 현행이 유지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하라고 조언하고 있는 게다.

물론 퇴행적인 감성 자체가 해외라고 안 먹히지는 않을 거다... 트와일라잇도 오지게 퇴행적인데 귀여니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러했듯 잘 팔렸잖은가. 영미권에서도 그 이후로는 좀 시큰둥해졌지만 그래도 내재되어있는 길티 플래져 수요가 쏠릴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장르가 뭐 어떻고 하는 원론적인, 장기적 시장 구축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최종적 선택은 작가의 몫이다. 선택에 따라붙는 비판도 마찬가지니 어느 정도 생각은 해보는 게 좋다.

또한 로판의 정의가 좀 더 명확해진다 하더라도 실질적 변화는 늘, 느리다. 웹소설 업계가 굉장히 변화가 빠른 축이긴 하지만 구조적인 변화가 아니라 유행작의 변화가 빠른 것에 불과하다. 고로 실질적인 변화가 오기 위해서는 작가와 독자 뿐만이 아니라 플랫폼 또한 움직여야 한다.

이 부분이 요즘 아주 조금씩 바뀌고 있어서 주의깊게 살피고 있는데, 리디가 개편하면서 로판을 따로 뺐다. 이걸 싫어하는 분들도 있긴 있는데, 로판을 정의 내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긴 했다. 로맨스와 로맨스판타지를 관통하는 정서가 다른 면이 있다.

더 흥미로운 건 주로 OTT사업에서 특정 장르의 소설을 활발하게 노렸다 보니 오히려 로맨스 장르가 어마어마하게 보수적인 장르임에도 로판만큼, 어쩌면 로판보다 더 빠른 변화가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로맨스 안에 모험물의 서사적 특징이 포함됐지만 성적이 좋은 소설이 부쩍 늘었다. 이 부분은 옛날 같았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이게 하도 로맨스와 로판을 섞어놓다보니 장르간의 상호작용이 가속화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제는 이런 새로운 코드가 먹히는 시대라는 뜻이다.

반면 로판은 어떤가? 로판이 OTT사업의 입장에서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포인트가 무엇인가? 판타지와 로판의 배경으로 사용되는 그 뭔지 애매하지만 대충 서양풍인 배경을 만드는 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든다. 배경을 각오하고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엔 배우들 개런티는 그렇다 쳐도 배우들에게 입힐 의상비도 끔찍하게 든다. 그런데 다른 장르와 달리 간접광고할 건덕지도 없다. 그러니 어지간히 원작이 히트치지 않는 이상 거액의 투자를 받기 요원하다. 고로 싫든 좋든 현대배경이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있어야 로판 또한 투자를 받기 쉽다. 판타지에는 이미 헌터물이라는 분류로 현대배경과 고전배경이 섞여있어 현행의 로판과는 얘기가 다르다. 

그래서 그렇게 헌터물을 좀... 잘 짜보길 기대했는데 대체로 실망스러웠다. 헌터물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대 사회의 일면을 극도로 과장시켜서 만들어낸 배경인데, 그런 배경에서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여성들이라면 국적에 상관 없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공감과 대리만족을 끌어낼 시놉시스가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과감해지질 못하니 발상의 신선함이 떨어지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나 신자유주의에 쩌들었으면서도 사이버펑크한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 그런 특징을 못 살리고 있는 건 진짜 아까운 일이다.

OTT사업이나 해외진출까지는 모르겠고 나는 국내에서 내 밥그릇 챙기기도 바쁘다! 내지는 나는 기존의 로판 코드가 좋다! 고 기존의 장르 이미지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을 거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도 된다고 본다. 당사자의 생계 유지가 먼저인 부분은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이 모든 변화는 기왕이면 점진적인 게 좋다. 새로운 무언가에 작가가 시도할 준비를 할 시간도 필요하고 새로운 무언가에 독자가 노출될 시간도 필요하다. 웹소설로 포맷이 전환되면서 로맨스와 로판이 한 섹션 안에 너무 오래 있었다 보니 로판의 이미지가 변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 아닌가. 데이터를 봐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이미 여성독자들은 반 정도는 질려있다고 짐작하고 있긴 한데, 어쨌든 변화에 익숙해질 시간은 필요하다. 

원론적인 얘기로 돌아와서... 로판이 없어져야할 장르긴 하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되어도 50년 정도에 걸쳐서 없어지는 게 좋다. 사람 누구나 편한 걸 좋아하니 로판이 사라지는 걸 거부감을 가지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켜서 대단히 다른 무언가를 좋아하는 별개의 종인양 다루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고질적인 성차별적 발상에 얼마나 쩌들어있는지 장르를 잘 따져보면 별 설득력도 없는데 여성들을 대상으로 가해지던 분류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로판이 탄생하는 모습을 봐온 입장에서는 플랫폼이 내키면 언제든 로판이 없어질 수 있는 지금의 현실 또한 우려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여성)가족부가 폐지되는 거대한 백래시의 시대에 내던져졌고 한 번 있었던 사건이 또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생계가 걸려있는 만큼 모두가 당장 바꿔야 한다거나 이래야만 하고 저래야만 한다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고픈 마음도 없다. 그저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당장은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게 더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짚어주는 것에 불과하다. 듣고 말고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느리더라도 변화는 반드시 오기 마련이고 싫든 좋든 우리는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변화의 주도권을 누가 쥐냐는 또 다른 문제니 말이다.

더 솔직히 말해서, 한 장르 안에 남성과 여성이 있다고 해서 그 둘은 결코 상호작용을 하고 있지 않다. 장르소설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그냥 작가가 제공하고 있는 소설을 보기 위한 사이버 공간 안에 같이 있을 뿐이지 독자간의 이렇다 할 교류 자체는 없다.

장르소설 안에 남녀가 한 장르 아래 같이 있다고 했을 때 가장 근접한 예시는 영화관에 있는 대중의 모습과 비슷하다. 영화를 보는 도중이나 보고 나서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대뜸 말을 걸던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보통은 잘 안 하잖는가. 장르소설 독자들도 대충 비슷하다. 독자들이 남기는 댓글은 따지면 영화 너무 좋았다고 시사회에서 감독에게 표현하거나 좋았던 대사나 장면을 따라하는 거랑 비슷하다. 영화를 보는데 방해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도 비슷하고 블록버스터가 재밌지만 블록버스터만 있는 것도 지루하기 때문에 다양한 필름이 지속적으로 제공되길 원하는 것도 비슷하며 구체적으로 글러먹은 영화가 나오면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아무리 마케팅을 해도 성적이 망해버리는 것도 비슷하다. 영화관은 그래도 실재하는 공간이기라도 하지 장르소설은 성별이 크게 의미도 없는 인터넷상의 공간이다. 영화에서라면 배급사의 독점 문제가 웹소설에서는 플랫폼의 독점 문제와 비슷한 것도 괜히 그러겠는가. 

자, 현행을 감안해 여성주인공의 지분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두 가지 다 지속하는 거다. 로판의 바운더리를 넓힐 수 있는데까지 넓혀 안전지대를 구축해가면서 다른 장르에 특정 장르가 금녀구역이 아니라는 흔적을 남기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작품이 가진 장르 정체성은 결국 작가에게서 나온다. 작가의 안에 장르가 어떤 식으로 정의되어있는지에 따라 정해지지 않던가? 그래, 이렇게 다시 근본적인 얘기로 돌아오게 된단 소리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변화는 느리게 올 수밖에 없다. 장르의 정의에 대해 다수의 동의를 얻는 과정은 결국 어떤 작품들이 주류 흐름을 점령하는지에 따라 어느 정도 좌우될 거다. 그리고 이 주류 흐름이 어느 정도 플랫폼에게 좌우되는 경향도 분명히 있긴 하겠지만... 좋은 것에 돈 쓰고 싫은 것에 돈 안 쓰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아니던가. 결국 다수의 독자들이 어떤 로판을 추구하는지, 어떤 작가가 끝내주는 작품을 쓰는데 성공하는지에 따라서 좌우될 변화가 언제고 오긴 할 거다. 그러니 원하는 바를 명확히 말하고 좋아하는 것에만 돈을 쓰자.

사족 1. 이건 진심을 다한 조언인데... 해외진출까지 염두에 두겠다면 아무리 나이를 낮게 잡아도 10대 주인공이어야 한다. 해리 포터가 왜 1권에서 나이가 11살이겠는가. 그게 걔네들의 한계선이다. 그 이하로 내려가면 크리피하다고 본다. 그나마 해리가 11살이어도 괜찮았던 건 남자애여서 그런 것도 있기 때문에 11살 여자애가 주인공인 소설이 연인 관계를 잘못 다뤘다간 페도파일 소리 듣기 딱 좋다. 현재의 로판에서 먹히는 것보다 나이 설정을 위로 올려야 하는 건 필수고, 트와일라잇에서 서브남주의 상대로 주인공 커플의 아이가 운명의 짝이라는 설정이 나오자 영미권 대중은 토하기 바빴다. 암만 운명의 짝이래도 애기한테 사랑을 느낀다니 페도파일이냐 우웩! 같은 반응이 나오니까 커플간의 나이차와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도 적당히 선을 잡아두는 게 좋다. 그리고 해리 포터 같은 저연령 주인공은 영 어덜트보단 틴으로 구분된다. 대충 알아는 두자.

사족 2. 절대 다시 투표하자. 지방선거는 여론조사가 부정확하기로 악명 높다. 참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6월 1일 꼭 투표하자.

사족 3. 익명함에 작가나 독자로서 받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해도 좋다. 

사족 4. 팬데믹 시대 이후로 미국 사회의 인식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K-뭐시기 열풍이 빠르게 사그라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 10년쯤 후에는 다시 역시 콘텐츠는 미국이지~ 소리가 나오는 때가 올 수 있으니 긴장하는 게 좋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