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공작가의 혼혈 영애 (2)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세라엘, 어서 나오너라. 수녀님들께서 기다리신다.”
“...지금 나가요.”
세라엘은 제 방 침대 위에 놓인 낡은 가죽 가방을 꽁꽁 동여맸다. 다 챙겼지? 빠진 건... 없으려나. 어차피 자기 소유의 물건이라 할 것도 거의 없었다. 이 집에서 물질적인 것을 받은 기억은 전무하다고 봐도 되니까. 가진 것 중 그나마 번듯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헐렁한 가죽 가방을 달랑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지나 로비로 내려오자 신복 차림의 수녀 둘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안녕, 하세요.”
“성녀가 되실 분께서는 존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리로 오세요. 짐은 여기 소냐 수녀에게 맡기시고요.”
“아, 알겠어.”
어색하게 대답을 흘린 세라엘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다가와 수녀에게 가방을 넘겼다. 그리고 그 옆에 선 후작저의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묘한 감정이 솟아나는 걸 느낀 후작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세라엘 슈안 라헤니오는 세라엘 슈안 데 카에토 라헤니오라는 이름을 받아 로나르힘의 49번째 성녀로 가게 되었다. 모두 그동안 라헤니오 저택에 머물러 주신 것에 감사하며 마지막 인사를 올리거라.”
“...성녀님, 기요메트 페이 벤씨엘라입니다.”
먼저 후작 부인이 다가와 다리를 굽혀 허리를 살짝 숙여 보였다. 어정쩡하게 마주 인사하던 세라엘은 제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고개를 젓는 수녀의 태도에 어색하게 굳어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무례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아니야. 괜찮아.”
“...죄를 사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전까지 가시는 내내 모자람이 없도록 후작가 소속 호위병을 두 명 보냅니다. 이것으로 용서를 바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감히 성녀님의 안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으응.”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작 부인이 뒤로 물러나자 차례로 저택의 사람들이 나와 인사하기 시작했다. 세라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로니안 레일라 라헤니오. 그녀가 후작의 뒤에 숨어 눈치를 보다 세라엘의 시선이 제게 닿자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히 가세요, 성녀님.”
“응.”
그것이 끝이었다. 수녀가 이끄는 대로 저택 밖을 나가 마차에 오른 세라엘은 그동안 제집이 되어주었던 라헤니오 저택을 올려다봤다. 좋은 기억일랑 하나도 없건만, 그래도 그동안 생활해온 곳이라고 집에 정이라도 들었나보다. 후원의 라일락 나무가 그리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신전에 가면 저는 성녀로 떠받들어지며 새로운 삶을 살 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성녀는 그렇게 믿었다. 곧 마차에 올라탔고 출발의 호령 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며 차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앞에 앉은 수녀 한 명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소냐라는 어린 수녀였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 소냐는 세라엘을 잠깐 바라보다 곧 공손히 시선을 내렸다.
잠깐이지만 세라엘은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빛을 목격했다. 그건 동정의 빛이었다. 동정이라니. 세라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었다. 저는 동정받는 처지가 아니었다. 성녀란 동정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추앙받는 자리였다. 왜 다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지 모르겠다.
성녀로 신전에 가는 게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마흔아홉 번째로 성녀의 시신을 치워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가여워서? ─아니. 세라엘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남아 역사에 길이 남는 성녀가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우러름을 받는 자.
어린 소녀는 벌써부터 제가 얻게 될 사회적 지위에 가슴이 뛰었다. 존경받고 싶었다. 자신은 하찮은 사생아 따위가 아니었다. 로나르힘의, 라흐벤시아라는 나라의 하나뿐인 성녀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발밑에서 저를 떠받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저택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흔쾌히 신전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했다. 49번째 성녀이자 후에 추락한 성녀라는 별칭을 가지게 될 어린 소녀는 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성녀의 지위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나 세라엘을 기억할 것이다. 이번 대의 성녀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간절히 생각하며.
*
신전으로 가는 길은 순탄했다. 너무 평화로워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딱히 성녀가 수호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잘 돌아가지 않을까? 그러나 그 생각은 곧 구석 어딘가로 묻혔다. 세상에 성녀가 존재해야 비로소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성녀가 아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비천한 사생아에 불과했다.
세라엘은 제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성녀라는 지위가 가져다줄 물질적 풍요와 경외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성녀님,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내릴 채비를 하시지요.”
“으, 응.”
끼익, 마차 바퀴가 정차를 위해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앞쪽에서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긴장한 세라엘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가죽 가방을 챙겨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렸다.
“아...”
만 이틀 만에 도착한 곳은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곳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찬란한 빛의 풍경이었다. 세라엘은 눈부심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왼팔을 들어 성스러운 빛이 제게 닿는 것을 막았다.
절벽 위, 라흐벤시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신전은 휘황찬란한 흰색과 귀한 연보라색으로 제 몸을 치장한 거대 건축물이었다. 그 압도적인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긴 세라엘은 멍하니 신전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는 부분. 나라의 제일 높은 건물에서도 가장 위에 위치한 신전 꼭대기에 는 황금 헤일로를 두르고 보라색 보석을 세공해 만든 거대한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성녀님, 이쪽으로.”
“아, 네. 아니, 응.”
소냐라는 수녀는 어디로 가고 그녀와 같이 후작저에 찾아왔던 수녀가 세라엘을 안내했다. 분명, 소냐 수녀가 말하길 이름이 힐렌다라고 했던가. 힐렌다 수녀가 이끄는 대로 세라엘은 열심히 작은 발을 놀려 쫑쫑거리며 걸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수록 따라붙는 시선이 늘었다.
처음에는 한 무리의 수녀들이었는데 이제는 신관들까지 저를 수군대며 쳐다본다. 처음에는 그것이 경탄의 수다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눈빛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세라엘을 존경하는 성녀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애잔한 눈빛을 보냈다. 또 어떤 이는 경계의 눈빛을 보냈고, 다른 이의 눈빛은 성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생아 소녀를 바라보는 이들의 그것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성녀로 신전에 가게 되면 제가 얻게 될 존경과 선망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게 다 뭐지?
“...윽.”
“성녀님. 도착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두리번거리다 앞서가던 힐렌다 수녀와 부딪혔다. 그녀가 갑작스레 멈춰선 탓이었다. 빨개진 코를 누르고는 세라엘이 고개를 부르르 털어냈다. 도착한 곳은 성녀가 지내기엔 너무나 허름해 보이는 침실이었다.
세라엘은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침실 내부를 구경했다. 그러곤 고개를 휙 돌려 힐렌다 수녀를 쳐다본다.
“여기가... 내 방이야?”
“네. 앞으로 성녀께서는 여기서 지내시게 될 겁니다.”
“말도 안 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어내 버렸다. 성녀는 존경받는 로나르힘의 유일한 성직자다. 라흐벤시아의 하나밖에 없는 고위 성직자. 교황의 아래에 있는 왕과는 달리 교황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며 존경을 받는 존재. 지금 교황의 자리는 공석이니 성녀인 자신이 이곳의 최고 권력자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이런 볼품 없는 방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물론 저택에서 지내던 방에 비해서 꽤 넓고 깨끗했다. 지내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제가 기대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힐렌다.”
“네.”
“나는 성녀가 맞지?”
“네, 맞습니다.”
“이런 곳에서... 나보고 자라고?”
“성녀란 가장 높은 곳에 기거하며 가장 낮은 자들을 돌보는 존 재입니다. 조금의 사치도 있을 수 없는 법이지요.”
“...”
그렇게 말하는 힐렌다의 눈빛은 저를 힐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한 것을 바라다니, 역시 천한 피는 못 속인다고…그렇게 힐렌다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정오에 다시 찾아 오겠다고 말하며 휙 나가버렸다.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세라엘의 손에서 가죽 가방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터덜터덜 커다란 침대로 다가가 그 위로 기어 올라갔다. 침상은 깨끗했고 햇살의 냄새가 배어 나왔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 오면서 봤던 눈빛과 수군거리는 말씨들을 보아선 제가 그리 환영받는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공석이었던 성녀의 자리를 채워줄, 죽기 위해 제 발로 찾아온 아이니 감사하고 안쓰러워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취급이라니. 세라엘은 이런 대우를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신전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심호흡했다. 좀 더 지내보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섣부르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눈으로 본 것만으로 판단하지는 않기로 했다.
세라엘은 침대 위에 대자로 폭 엎어졌다. 푹신푹신한 침대가 기분이 좋기는 했다. 앞으로 여기서 저 시선을 감내하며 성녀로서 살아가야 한단 말이지.
그래, 아직은 괜찮다. 신전 안에서는 천대받아도 밖에서는 사람들에게 찬양받고 또 추앙받을 테니까. 그걸로 됐다. 제 비참한 모습을 신전 밖 사람들한테까지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이런 취급은 익숙하니까 여기서만 버티면 돼. 어린 소녀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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