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공작가의 혼혈 영애 (3)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리엔시에. 조금 있으면 너도 이제 학교에 갈 나이가 되겠구나.”
“네, 아버지.”
“그래. 네가 원하던 학교는 익히 들어와 알고 있다. 발데마인에 가고 싶다고?”
유레이토 공작저의 집무실. 하나같이 값지지만 티가 나지 않는 단초로운 생김새의 장식품과 어두운색의 가구들이 가득한 공간.
리엔시에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문을 열고 집무실 내부로 들어왔다. 무거운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었지만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를 증명하듯 그녀의 날카로운 동공이 빛났고, 동시에 뾰족한 귀가 주변의 소리를 잡으려는 듯 쫑긋거렸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유레이토 공작은 이종족의 외모를 한 제 딸을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발데마인은 로나르힘과 교리로 맺어진 마법 학교다. 네가 신학에 눈을 떴을 리는 없고... 마법을 더 배워보고 싶으냐? 너는 마법에 재능이 있는 아이니까.”
“...교리 공부에 흥미가 생겼어요.”
“네가?”
공작이 흥미롭다는 태도로 눈앞에 다소곳이 선 소녀를 내려다봤다.
“요즘 자주 예배당을 드나든다더니 사실이었구나.”
“...레니발렌이 그러던가요?”
“흠. 네 동생에게도 조금만 더 관심을 주거라. 아직 어린 아이지 않느냐. 한창 가족의 사랑이 고플 나이지.”
“...”
리엔시에는 자신의 어린 남동생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이번 대의 성녀를 떠올려 봤다. ...당연하게도 이미지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야,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까. 이번 대의 성녀, 즉 마흔아홉 번째 성녀 세라엘에 대한 소문은 이상하게 들려오는 것이 전혀 없었다. 라헤니오 후작가의 사생아랬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
분명 신전에 갈 성녀로서 떠받들어지며 고귀하게 대접받으며 자라왔겠지. 고생이라고는 하나도 모른 채. 자신과는 다르게. ...공작가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이종족의 외모를 타고 나 힘들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나중에 얻어낸 후계자의 이름은 유별난 외모를 가려주는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지위로 환심을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이 이질적인 생김새를 하고 있는 한.
다행히 가족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어느 동방 엘프의 외모를 타고났든 아니든.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신경을 쓰다 못해 그녀를 외로움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괴물. 인간이 아닌 것. 고귀한 영애의 신분인 소녀가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얼마 전 처음으로 저택에 방문했던 황손들을 떠올렸다.
딱히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무난히 그날 하루를 지나 보냈던 것 같았지만, 고귀하신 분들은 제게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뿐이었다.
“...라서, 학교장에게 추천서를 보내볼까 한다. ...리엔시에?”
“아, 아. 네. 죄송해요.”
“요즘 멍해 보이는 때가 잦구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니요. 아무 일도 없답니다.”
아버지는 몰랐다. 어머니도 몰랐다. 동생은 너무 어렸다. 모두가 자기들처럼 더 먼 앞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야만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자신과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게 당연한 것이 인간의 본능이었다. 리엔시에는 그들에게 있어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취급에 익숙해진 자신이 무서웠다. 언젠가 자신마저 인간이 아님을 인정하고 있을까 봐. 리엔시에는 입학 추천서를 쓰느니 마느니 하는 공작의 이야기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대꾸해주고는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발데마인에 입학하고 싶다던 아이치고는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공작은 눈치채지 못했다.
무거운 문을 손쉽게 한 손으로 밀어 열고 나가 밖에서 다시 닫았다. 문을 닫고 뒤를 돌자 시야 아래에 조그만 인영이 보였다.
“...렌.”
“누나.”
리엔시에의 분홍빛 눈동자가 온통 검은 꼬마의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아이의 눈동자는 유레이토 공작가 특유의 짙고 붉은 와인 색이었다. 리엔시에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리엔시에는 동생을 지나쳐 빨리 걸음을 옮겼다. 마치 어딘가 급하게 가야 할 곳이라도 있는 것처럼. 리엔시에의 세 살 어린 남동생, 레니발렌은 그런 누나를 쫄쫄 따라갔다.
“리엔시에.”
“...”
“리엔시에.”
“그만 불러.”
“어디 가?”
“...예배당에.”
“나도 같이 가.”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누나의 무시가 익숙한 레니발렌은 전혀 상처받지 않은 태도로 후원의 예배당으로 향하는 리엔시에를 짧은 발놀림으로 열심히 따라갔다. 지금쯤 예배당에 있을 귀하신 분들을 맞이하러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의 방문 이후 두 번째로 이루어지는 만남이었다.
*
마음이 고장 난다는 것은 감정에 매몰된다는 것이다. 감정에 매몰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어떤 감정이 너무도 거대해서.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 그 자체에 잡아먹혀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에 ‘나’는 없다. 자아가 없기에 깊이 또한 알 수 없다. 저 아득히 멀어 땅끝까지 가 닿을 수도, 그저 발이 삐끗하는 정도에서 끝날 수도 있다.
리엔시에 솔린 유레이토가 성녀 세라엘을 사랑하는 것은 저명한 사실이다. 성녀 세라엘 또한 리엔시에를 사랑한다. 둘의 사랑이 비록 어딘가 고장난 구석이 있을지라도, 어쨌거나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하다.
이보다 더 특별한 사랑이 있을까? 현시대의 성녀와 최초의 성녀가 서로를 사랑한다. 같은 운명을 가진 소녀들이 서로의 영혼을 취하려 하니, 한 편의 희극이 따로 없다.
성녀란 이름은 곧 희생의 대명사다. 결국 둘 다 파멸할지언데. 아득한 사랑으로 인해 마음이 고장 나버린 소녀는 수많은 반복 속에서 무뎌졌다. 이제는 왜 자신이 성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괜찮았다. 세라엘을 사랑하는 건 이미 숨 쉬듯 자연스러운 하나의 현상이 되었고, 그녀가 삶을 이어가는 이유가 되어주었기에. 그녀는 세라엘에게 첫눈에 반했던 그 순간이 대체 언제였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한편 세라엘은 어느 순간 이후부터 반복되는 삶에 대해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반복은 세라엘의 영혼에 금을 새겼고, 수억의 삶을 반복한 끝에 낡고 비참해진 영혼은 기대어 쉴 곳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억겁의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리엔시에였다. 리엔시에는 모든 순간 속에서 세라엘을 사랑했다. 세라엘은 그런 리엔시에를 사랑해 버렸다. 고장 난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망가지지 않은 것은 분명 존재했다. 온전하게 나를 사랑하는 너 하나였다. 그래서였다. 너를 사랑하는 나를 내 손으로 세상에서 지우길 택했다. 네 비극을 목격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절망에 빠진 너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세라엘의 자살 직후 한 소녀가 고장 난 세계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린다. 새로운 세계선이 다시 펼쳐졌다. 세라엘이 로나르힘의 성녀로서 신전에 도착하고 리엔시에는 황손 남매와 만난다. 이미 수없이 반복되었던 역사가 재차 움직일 시간이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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