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9)

013. 난 너만 있으면 돼, 아가.

복도를 거닐며 이레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드는데...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프리실라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거였다. 마음 같아선 매혹의 힘으로 아는 걸 다 떠벌리게 하고 싶었지만...

순간 느려지던 발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고작 한 번의 정신 지배로도 인간의 정신력은 쉽게 무너질 정도로 약했다. 하여간 수는 징글징글하게 많으면서 개복치가 따로 없다니까.

"망할 놈의 플라티나."

뻔히 보이는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야 한다는 게 성가셨다. 사건과 무관한 인간을 건드릴 경우, 플라티나의 간부들이 '페널티'를 내릴게 분명했다. 행동 범위의 제약, 압류, 지하감옥 등. 앞의 세 가지 형벌을 골고루 당해본 이레시아로써는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현자의 돌에 대한 소문을 흘렸던 사제의 집에서도 딱히 건질만한 게 없었으니 남은 건... 아까 그 남자뿐인가? 결국 늑대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뒤를 밟기로 했으니 이왕이면 뭐든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조차 별 수확이 없다면 남은 수는 직접 광산 안을 휘젓고 다니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건 정말 피하고 싶은데 말이지. 침실 문을 열자 쥰이 이불 속에서 얼굴을 빼꼼 내미는 게 보였다.

"이레님!"

"식빵 굽고 있었네, 아가?"

이불로 몸을 감싸 또아리 트고 있는 게 귀여워 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니?"

"응!"

쥰이 헤실헤실 웃으며 달라붙었다.

"일찍 자야지 어서 크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참, 그리고 보니...

이레시아는 침대에 앉아 아공간을 열어 그중 가장 얇은 책을 꺼내 내밀었다. 생각난 김에 주는 것이 낫겠지.

"선물."

"응?"

평소처럼 커다란 글씨와 그림이 그려진 동화책 표지가 아니였다. 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아...!"

붉은 색부터 보라색까지, 온갖 보석이 사진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본 쥰이 두 눈을 반짝였다. 볼까지 발그레해진 것이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이레시아는 곧이어 소맷자락을 뒤져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루시안이 집어던졌던 봉투 안에는 마력으로 세공된 작은 은팔찌가 반짝거렸다.

"손."

이레시아가 내민 손바닥 위로 작은 쥰의 손이 고양이처럼 얹어졌다. 한 줌도 되지 않을 가느다란 손목에 은팔찌가 걸렸다. 조금 헐렁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많이 크진 않았다.

"네 거야, 아가."

얇은 팔찌에 세공된 마력어는 일종의 미아 방지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팔찌 중앙의 작은 홈은 보석 따위를 박아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진짜 선물은 그곳에 박힐 예정이었다. 미인과 보석이 넘쳐난다는 티파의 도시에서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건 아쉬운 일이지.

"원하는 걸 고르면 사줄 테니 천천히 골라보도록 해."

단, 늑대씨한테는 비밀이지만. 갖고 싶은 보석을 사주겠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듯 보석 책자까지 안겨주는 것이 영락없는 팔불출 같아 보였다. 쥰이 기쁜 나머지 꺄아 소리를 지르며 이레시아 품으로 쏟아지듯 안겨 왔다. 붉은 입술이 기분 좋게 올라갔다.

"귀여워라."

"응? 으약...!"

말캉거리는 볼을 아프지 않게 이레시아가 이빨로 깨물었다. 가끔 쥰이 귀여운 것을 참지 못하고 하는 행동이었다.

으악! 끼약! 소리를 내며 쥰이 바동거렸다. 그 행동이 또 귀여워서 이레시아는 쥰을 조금 더 괴롭혀줬다. 빨개진 볼을 문지르며 쥰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너무 귀여워서 먹어버릴 뻔했어 방금."

"안돼..."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이레시아에게 쥰이 고개를 저어댔다. 장난기 득실거리는 붉은 눈이 마치 키득거리며 웃는 것 같았다.

"왜?"

"... 안돼."

"왜 안돼?"

쥰이 조급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을 내뱉는 것에 시간이 걸리는 쥰의 말캉한 볼을 주욱주욱 잡아늘렸다.

"왜? 말 안 하면 잡아먹을 거야."

살벌한 농담에도 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가 온전한 인간이 아닌걸 알고 있음에도 별 위협을 느끼지 않는지 괜스레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서는 플뢰르 드 파츌리 향기가 은은하게 나고 있었다.

"말 안 할 거야 아가?"

"이레님. 쥰... 머거?"

"응. 잡아먹을 거야."

"안돼."

"왜?"

"이레님... 좋아. 쥰이 아, 안돼. 아야, 해..."

풉.

할 수 있는 짧은 단어를 필사적으로 나열하는 것에 이레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심장이 간질간질한 것이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가. 다른 사람한테 안 갈 거지? 저번처럼 손 콱 깨물고 나한테 간다고 울 거지?"

"웅!"

그래. 너는 그렇게만 하면 되. 내 옆에만 있으면 돼. 내가 지켜줄 테니까.

"난 너만 있으면 되, 아가."

이레시아가 쥰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 너만..."

애정 어린 눈빛이 점차 침잠했다. 그래, 이 지옥 속에서도 너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커튼에 걸린 장식이 창문 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 록산나."

내 이름을 줄게, 아가.

이레시아가 놀란 눈으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높디높은 곳에 놓인 왕좌에 앉은 거만한 인영의 얼굴에는 한껏 그늘이 져 있었다. 그럼에도 붉은 눈은 섬뜩하리만큼 빛나고 있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칼을 가진, 고귀한 괴이들의 왕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를 몇번이고 죽인 신이 그 곳에 있었다.

"네 이름, 이레시아 디벨론... 록산나 라고."

왜 당신이...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낯으로 눈앞의 왕을 올려다봤다.

"... 마음에 안 드나?"

그녀의 왕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레시아가 이상하다는 말투였다.

"다른 이름을 지어줄까?"

그녀의 왕이 제 옆에 목석처럼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의 남자는 말 없이 이레시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약간 어이없다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같았다.

로엔.

로엔 하르데카인 피에타.

오버(Over)의 영지, 피에타의 백작. 이레시아의... 남편이었던 남자.

남자를 알아본 이레시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상하네..."

그녀의 왕이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늘이 진하게 진 왕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어디 아프니, 아가?"

"... !!"

이레시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붉은 두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이 보였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짧은 단발, 앳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처음 그들의 손에 주워졌을 때의 나약하고 어린 자신이 보였다.

'말도 안 돼...'

찰싹!

이레시아는 기겁하며 그 손을 쳐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새에 로엔의 검이 이레시아의 목을 겨누었다. 피할 새도 없이 스친 검 날에 피가 흘렀다. 온몸이 달달 떨며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왕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봤다.

"방금..."

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찌검을 당한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곧이어 배를 잡으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으로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소리였다.

"검을 치워, 로엔."

한참을 웃어대던 왕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왕의 명령에도 로엔은 이레시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살벌한 눈빛에 온몸이 갈가리 찢어발겨질 것만 같았다.

"로엔."

왕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자, 그제서야 로엔은 불쾌하다는 눈으로 마지못해 검을 치웠다. 그녀의 왕은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를 모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 어딜 보는 걸까?]

"윽...?"

보이지 않는 악력이 이레시아의 고개를 강제로 다시 돌려놓았다.

언령.

괴이의 왕이 가진 언령의 힘이었다. 괴이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상, 누구도 왕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강제로 마주치게 된 붉은 눈이 흥미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 안에 비춰지는 어린 자신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이 겁에 질려있었다.

"귀엽네. 사납고..."

"어딜 봐서 귀엽습니까?"

로엔이 약간 날 선 어조로 물었다. 왕은 다시 그녀에게 손을 뻗어 목덜미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 주었다.

순식간에 피가 멎었다.

"귀엽잖아. 아기 고양이 같아서."

"내다 버리십시오."

로엔이 표정을 찌푸리며 이레시아를 어루는 왕의 손을 떼어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로엔은 손수건까지 꺼내 들었다.

"... 동물을 사랑해야지, 로엔."

"당신 몸을 더 귀히 여기십시오."

로엔은 고개를 숙여 붉어진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왕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게 뭐야... 이게 도대체...

이레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어둠에 집어 먹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복도에서 작은 심장이 헐떡거렸다. 도망치려 몸부림치는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복도가 별안간 훅 하고 바닥이 꺼져 들었다.

"앗!!"

이레시아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처박혔다.

"윽!"

그러나 떨어진 곳은 딱딱한 바닥이 아닌 침대 위였다. 놀라 고개를 쳐들던 이레시아는 또다시 숨을 집어삼켰다. 눈앞에는 금빛 머리카락을 흐트러 트린채 곤히 잠든 왕의 얼굴이 보였다. 이레시아는 황급히 제 손을 내려다봤다. 아까 전보다 조금 자란 모습이었다.

...그럼 이건 꿈인가?

"으음."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깨어난 건지 왕이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눈을 떴다. 이레시아는 정신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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