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0)

014. 너는 정말 그 여자가 아닌가?

어째서 이런 꿈을...

왕은 이레시아를 끌어당겨 이마 위에 짧게 키스를 떨어트리며 토닥거렸다.

"왜 벌써 깼어, 아가."

더 자자.

왕은 잠긴 목소리로 이레시아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이 낮게, 저 아래로 침몰했다.

제발 그만...

"... 꿈이라면...... 제발, 그만해..."

달달 떨리는 입술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너무 상냥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심장이 불에 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난 너만 있으면 돼, 아가."

왕이 이레시아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너만 있으면 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쥰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아니, 똑같이 말한 건 나인가? 뺨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렀다.

"... 그만해."

이레시아가 떨리는 손으로 왕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제와서 이런 꿈은...

"... 제발, 그만..."

모조리 망가져 버렸는데...

이레시아가 그녀의 품에서 결국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따뜻하다 못해 가슴이 시큰거렸다.

이게 꿈이라면.

"... 깨고 싶지 않아."

그러자 갑자기 숨통이 턱하고 막혀왔다. 어느새 성인이 된 이레시아 위에 올라탄 왕이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날 사랑하잖아. 그런데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커헉...!!"

이레시아가 눈물을 흘리며 목을 움켜쥔 손을 떼어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네가 내 '바램'을 이루어줄 때까지."

난 멈출 생각이 없어.

왕은 아름답게 웃으며 검은 단도를 치켜들었다.

"허억...!!"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이레시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낯 익은 낡은 여관의 천장이 보였다. 다시 지독한 현실로 돌아온 것을 깨닫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우욱...?!"

이레시아는 입을 틀어막고 일어나 욕실로 뛰어갔다.

"욱...! 웁!"

저녁 식사가 그대로 토해져 나왔다. 내장이 헤집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나머지 음식들도 모조리 토해냈다.

"헉, 허억..."

끝끝내 쥐어짜내 듯 위액까지 토해낸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은 온통 눈물과 타액으로 엉망이었다. 숨을 고르며 제 얼굴을 보던 이레시아의 입에서 허망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

멍청하긴. 멍청한 이레시아.

이레시아의 눈에 자기혐오가 그득 차올랐다. 떨리는 손이 복부를 움켜쥐었다. 그 언젠가 찔렸던 복부가 욱신거렸다. 눈물이 자꾸만 얼굴을 타고 흘렀다.

까드득. 이가 절로 갈렸다. 상처가 아픈 만큼 지독한 꿈이었다.

+++++

"... 이게 무슨 상황이지?"

늑대는 반쯤 엉망이 돼버린 방안을 보며 물었다. 방안의 커튼이란 커튼은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탁자와 의자가 박살 난 채 아무렇게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난리 통에서 침대 한켠에는 쥰이 책을 펄쳐놓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레시아는 샤워 가운을 걸친 채 태연한 얼굴로 창가에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방금 씻고 나온 것인지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늦었네."

"방이 왜 이 꼴이야?"

이레시아가 파이프 담배를 들이마셨다. 눈가가 거뭇한 것이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별거 아니야. 깜빡하고 치우지 않은 장난감이 있어서."

"장난감?"

"이 방에도 커튼 장식에 장난질이 되어 있다는 걸 깜빡했어."

그녀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원하는 이가 꿈에 나오는 아주 끔찍한 장난감이었다. 이왕 떼어낼 거면 이 방의 아티펙트도 부탁할 것을...

프리실라에게 제 방 커튼에 달린 아티펙트를 떼어 달라고 해놓고는, 왜 여기서 잠이 들어 버린 걸까? 아이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품에 안고 있다가 잠들어 버린 스스로를 탓했다.

누굴 탓하겠는가. 멍청한 자신을 탓해야지.

"카일이라는 남자에게서 뭐 좀 알아냈어?"

"... 별거 없어. 그 후로 술을 마시러 가더니, 사창가를 기웃거리기만 할 뿐이더군."

"저런..."

괜시리 못 볼 꼴만 보고 왔네? 이레시아가 작게 실소를 했다.

"이제 어쩔 거지?"

"글쎄... 이제 어쩐다..."

그 남자에게도 별 다른 수확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역시 프리실라, 그 여자를 구슬려 봐야 하나? 아님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카일의 뒤를 캐보는 것도 좋겠지.

"일단 씻어. 아가는 저쪽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재우고."

이렇게 엉망이 돼버린 방에서 깨어나게 할 수는 없잖아? 이레시아가 비어 버린 와인잔을 다시 가득 따랐다.

"이레시아."

늑대가 창가로 다가왔다. 어딘가 초연해 보이면서도 피곤한 모습은 늘상 보던 것인데, 어딘가 달랐다. 늑대는 찬찬히 그녀를 뜯어보다가 손을 들어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만졌다.

"덜 말랐군. 괴이는 감기도 안 걸리나 보지?"

늑대는 자신이 잔소리와 걱정, 그 중간 언저리에서 묻는 걸 알고는 있을까?

이레시아는 제 머리칼을 만지작 거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피곤해. 그만 가서 자."

가라 앉은 눈으로 이레시아는 늑대의 손을 밀어냈다. 왠지 오늘은 더 이상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정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서인지, 이 이상 외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그녀 역시 알 수 없었다. 늑대의 눈매가 좁혀졌다. 그녀의 말에도 늑대는 목석같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내 말 못 들었어?"

이번에는 목소리에 조금 짜증이 섞였다. 그러자 별안간 그녀의 머리 위로 수건이 얹어졌다. 뭐야? 움찔 몸을 떨던 이레시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이게 무슨 짓...?"

"가만히 있어."

이레시아가 미쳐 날 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늑대는 젖은 머리칼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는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그를 더는 밀어내지 않았다.

삐죽 삐죽 올라오던 감정들이 물기를 흡수하는 수건에 함께 털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어쩐지 줄곧 날을 세우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한참을 말 없이 부드러운 수건의 촉감을 느끼며 이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뭐야... 왜 갑자기 친절해?"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누구나 친절해."

그리고 난 늘 친절하고.

이레시아가 픽 하고 맥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말이나 못 하면.

"내 얼굴이 어떤데?"

허공에서 부딪힌 시선에서 들리지 않는 말들이 오갔다.

"말해봐. 내 얼굴이 어떤데?"

입가에 짓는 미소가 어딘가 안쓰러워 보여 늑대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얼굴이면 차라리 웃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웃고 있는 얼굴 뒤로 우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당신 취향을 물어본 게 아니야."

어이 없다는 듯 웃음 짓는 말에 늑대는 어딘가 뱃속이 베베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기억도 못하던 날들처럼 울어버렸으면.

순간적으로 내뱉어질 뻔한 뒷말을 가만히 목뒤로 곱씹으며 늑대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되지도 않는 얼굴로 웃는 낯짝도 더 이상 보기 싫어 입을 열었다.

"... 버림 받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

이레시아의 어깨가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다른 때라면 눈치채지 못할 움직임이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녀를 계속 보고 있던 그의 눈에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늑대는 비틀리던 속이 조금은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늘상 주워 쓰던 가면이 조금 흘러내려 그 안에 감춰진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 그게 뭐야."

이레시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애도 아니고."

그런 말 할 바에는 차라리 안아주던가.

안아줘. 쓰다듬어줘. 어리광 부려도 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줘. 응? 여기 있어도 된다고 말해줘.

오버(Over)에서 늘 입에 달고 다니던 투정 어린 말들이 목 근처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단전 밑으로 추락했다.

'... 당신은 나를......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랑하긴 했을까...?'

툭.

그녀가 힘없이 그의 허리춤에 머리를 기댔다. 오버(Over)에서 떨어지기 직전,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다시 억지로 집어삼켰다.

"...... 졸려."

와인을 마셔서인가? 어쩐지 잠이 쏟아졌다. 늘상 그녀를 밀어내기 바쁘던 그가 먼저 다가왔다. 그래서 어쩐지, 아주 조금 어리광을 부려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워줘, 늑대씨."

이레시아는 이윽고 늑대가 안아 드는 걸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조금 젖어있었다.

+++++

이른 새벽의 소리가 창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어두운 청색 빛이 창틀을 넘어 침대맡까지 기어들어 왔다. 늑대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새벽 늦도록 책을 읽다가 문뜩 옆자리를 내려다봤다. 죽은 것 마냥 미동도 없이 잠든 여자가 보였다.

구명줄처럼 손안에서 구겨진 옷자락은 여전히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여 가만히 숨을 죽였다. 생각할수록 알기 어려운 여자였다.

티끌 하나 없는 소녀 같기도 하다가, 세상 둘도 없는 요부 같이 굴다가, 버려진 아이 같이 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셋이 전부 이 여자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겠지.

늑대는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진 그녀의 머리칼을 들어 올렸다. 코 끝에는 이레시아가 즐겨 쓰는 향료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숨겨진 단내도. 향료에서 나는 게 아닌 그녀의 체취에서 나는 익숙한 단내가 가끔씩 제 머리를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희미하게 남은 단내는 죽을 때까지 늑대가 잊을 수 없는 원수의 냄새였다.

그런데도 가끔씩 스스로도 이해 못할 정도로 이 여자에게 물렁하게 굴게 되는 건 왜일까? 지금도 옷자락을 잡은 손 따위 뿌리치고 편히 누워 쉴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건 왜일까?

"너는... 정말 그 여자가 아닌가?"

10년 전, 그날 '선녀샘'으로 내려와 일족을 멸망시킨 괴물은 정말 네가 아닌 걸까? 그렇다면 왜 너는 그 여자와 같은 냄새를 갖고, 왜 하필 '선녀샘'으로 떨어진 거지?

네가 그 여자가 아니라면 난 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풀어줄까, 아니면 영원히 족쇄로 묶어둘까?

들리지도 않을 질문을 던지던 중, 똑똑 문밖에서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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