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가장 낮은 이들의 구원자에게 보호를 청하는 방법-제물을 바치고,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향한다. 그다음에는 눈을 감고 북쪽으로 열두 걸음, 서쪽으로 다섯 걸음, 그리고 남쪽으로 둘, 동쪽으로 넷, 다시 북쪽으로 여섯.”


아무도 없는 야산, 탁한 금발의 소녀는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가 옆, 뒤,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를 반복한다. 


“마녀의 산이라고 한들 별다른 것은 없는 평범한 산이구나.”


소녀가 있는 곳은 소녀의 아버지가 다스리는 작은 영지-그 중 어느 마을의 뒷산. 이름 없는 산이지만 열두 해 전의 ‘그 일’ 이후로 영지 거주민들은 모두 그 산을 ‘마녀의 산’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 일’이라고 하면, 이 주변의 마을들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은 하얀 머리의 마녀가 언젠가 자신이 돌아와 마을을 불태워 버릴 것이라는 저주를 퍼부은 뒤 뒷산으로 달아난 것을 말한다. 올해 열일곱인 소녀는 그 일이 있었을 때 고작 다섯-무언가를 생생하게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었으며, 소녀가 영주의 사랑받는 고명딸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마녀의 저주가 마을에 울려 퍼질 때 당연히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아마도 마녀가 피눈물을 흘리며 너희 모두를 죽여버리겠다고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 소녀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부드러운 이불에 싸여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작고 소담한 성의 가장 안쪽 탑에서 인형 놀이 따위를 하고 있었으리라.

마녀가 도망친 산과 그 당사자인 하얀 머리의 마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열두 해 전의 그 일 이후로 마을에서 터부시되었다. 그렇기에 소녀는 다섯 살 이후로부터 마녀에 대해 알 길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가끔 보이던 하얀 머리 여자의 행방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 같은 아가씨가 알 만한 일은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다. 그렇기에 눈치가 빠른 소녀가 마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던 것이다.

소녀의 혈육인 영주의 아들들들은 하나같이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울 정도로 그 천성이 입이 가볍고 경박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혹은 경박한 그들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당연하게도 그들은 자신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늦둥이 막냇동생을 얕봤으므로 소녀가 가족 식사 중 오라비들을 살살 구슬려 마녀의 사정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몇 번 애교 비슷한 것을 부리자, 그들 중 둘째 오라비는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라고 운을 떼면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샅샅이 털어놓았다. 이름 없이 오직 그 아이라고만 불리던 하얀 머리의 소녀에 대해. 그가 자신을 유일하게 돌봐주던 하나뿐인 스승까지 화형대에 올리고 마치 능구렁이 같은 교묘한 화술로 그 자신은 화형에서 벗어나 산으로 도망쳤으며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 아무도 그를 본 적 없이 다만 가끔 산에서 조그마한 여자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는 소문만이 돈다고.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 멍청한 평민들이나 마녀의 전설을 믿는 법이야, 올피-라고 말하는 오라비의 말을 들으며 소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하얀 머리의 마녀가-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고.


어린 시절부터 누려온, 작은 영지에서의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안온하고 풍요로운 삶. 아마도 결혼 적령기가 된 소녀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곧 현숙한 귀부인이 되어 제가 다스리는 마을의 안살림을 담당하거나 수녀원에 보내져 느리고도 평화로운 일생을 보내겠지. 어느 쪽이든 소녀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지난 열일곱 해 동안 소녀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다-소녀가 그 삶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고, 다른 길이 없다고. 그리고 소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 인생은-이번 인생이라고? 소녀에게 다른 인생이 있었던가? 어쨌든-그런 평화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그가 한때는 간절히 바라왔던 평화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마녀를 만나야 한다. 그에 비하면 그 어떤 삶도 마녀를 만나는 것과 맞바꿀 수 없다. 소녀는 알았다. 두려움 혹은 흥밋거리 그것도 아니라면 소녀의 둘째 오라비 같은 이에게는 멸시의 대상으로, 오직 허상으로서 존재하는 마녀. 소녀는 그가 알고 싶었다. 그에게 이끌렸다. 점점 그가 좋아졌다. 그리고 어쩌면-아주 어쩌면-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어느 날 깨달은 바에는, 소녀는 그를 사랑했다. 이름조차 얼굴조차 모르는 마녀라지만 소녀는 알았다. 분명 그들은 완벽한 한 쌍이 될 것이라고-그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 그를 만나기만 한다면. 


어디에서 들었을까? 마녀가 뒷산으로 도망쳤지만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다. 하지만 인기척은 존재한다-적어도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소녀는 그가 살아 있다고 확신했다-분명히 그 의식을 치렀으리라. 이제는 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단은 살아 있기에-오래된 이교의 신에게 번제를 바쳐 얻는 도피처. 소녀는 어릴 적부터 기르던 카나리아의 목을 절개해 산에 피를 뿌리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의식의 뒷부분을 이행했다. 북, 서, 남, 동, 다시 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눈을 떠 주변을 바라보자 완전히 다른 풍경이 보였다. 아까까지 뉘엿뉘엿한 황혼빛이었던 하늘에 새까만 밤빛이 덮친다. 식물학에는 문외한인 소녀가 보기에도 확연히 생김새가 다른 식물들. 빛을 잃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파리한 나뭇잎. 생명력이 넘치던 영지의 산과는 정반대인.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자, 신전이 보인다. 색칠이 벗겨져 나간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고대 풍의 낡은 신전. 인기척을 알아챈 건지 한 손에는 촛불을, 한 손에는 단검을 들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한 키가 작은 백발의 여자가 걸어 나온다. 소녀는 여자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짓는다.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해왔어, 친애하는 마녀. 나의 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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