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1화
추락한 성녀 01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 입니다. 무단 도용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01
루블, 보쓰, 히즈
허공을 가로지르는 화살 소리, 다급히 뛰느라 밟히며 부서지는 나뭇가지, 헉헉 숨을 고르는 소리.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삶과는 먼 것이었다.
'이럴 수는······ 내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역대 가장 아름답고 강한 빛의 대리인, 여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자.
모두가 그녀를 수식하는 말이었다.
쐐액!
신성력을 머금어 강화된 화살은 손쉽게 나무 속을 파고들었다. 아마데아의 얼굴 바로 옆이었다. 소름이 등을 타고 쭉 올라왔다.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야. 미친 놈들 같으니! 내가 성녀라고! 너희들이 어제까지 떠받들던 성녀!'
"감히··· 감히···!"
가쁘게 몰아쉬는 숨 사이로 증오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감히 저것들이 나를 이따위로 대해서는 안된다. 여태껏 여신의 이름하에 디모네를 숙청해왔던 나다. 나는 이딴 사냥당하는 짐승 같은 대우가 아닌 저것들이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란 말이다!!
"에메로스······ 그 자식이···!"
아드득 이가 갈린다. 잠시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전 추종자들의 포위망이 좁혀져 온다. 더는 쉬고 있을 수 없다.
참을 수도 없이 새어 나오는 허덕임에 고통스러워하며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바위 밑엔 연못이 있지만 연못과 바위 사이에 작은 틈이 있던 것이다. 귀한 성법의가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으나 일단 숨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전에는 이런 숲 따윈 통째로 날려버리거나 날아다니는 것도 가능했지만. 아마데아는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었다.
항상 신성력으로 강화된 신체였기에 지친다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성녀로 발탁되기 전인 아주 어린 시절에나 겪어본 것. 그녀가 일반적인 것들과 다를 바 없던 시절에만 있던 일.
아마데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신성력만 돌아온다면 저딴 것들 따위 한 손가락으로도 충분할 텐데.
아득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이 일의 원흉을 떠올렸다. 모든 일은 가짜 성자, 에메로스의 등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난 에메로스는 정체를 의심받을 만도 하건만 너무나도 쉽게 성자로서 인정받았다.
그 이유는 진짜 성녀 아마데아의 신성력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듦과 동시에 갑작스레 엄청난 신성력을 지닌 에메로스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가 이 꼴이다. 진짜인 자신은 가짜 성녀라며 선동당해 추적당하고 있다.
멀어지던 의식은 그 쓰레기 같은 가짜를 향한 분노로 선명해졌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여기다! 여기 가짜 성녀의 발자국이다!"
숨 고를 틈조차 안 주는군.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켰다. 여기에 더 머무를 순 없다.
하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명확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무작정 추격대를 피해 국경지대인 숲으로 달렸다. 이제 와서 계획 따위 있을 리가.
분노도 잠시, 이대로 끝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신성력이 전과 비교하면 한 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마데아는 저들의 신성력이 가까워졌음이 느껴졌다. 그녀가 추격대의 위치를 안다면, 그 반대는?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가능성을 증명하듯 사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가까스로 도망쳐봤자 신성력이 존재하는 한 벗어날 수는 없다. 어차피 저들은 사방에 깔렸고, 왕국 어디를 가든 신성력 없는 이는 없다. 아주 티끌만 한 신성력이라도 그녀를 감지할 수 있으니 나라 안에 숨는 것도 불가능하다.
숨이 턱턱 막혀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늪에 가라앉는 듯한 참담함이 밀려온다.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어가야 하는 건가.
“아니!”
절대. 누구 좋으라고 순순히 죽어주겠는가.
아마데아는 남은 신성력을 짜내 크게 도약했다. 뛰어오른 그 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추격대는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발견했음을 알려댔다.
나무 위로 착지한 아마데아는 국경 방향을 대충 가늠했다.
왕국 어디를 가든 신성력이 없는 이는 없겠지. 하지만 디모네들의 나라라면? 이제껏 이단들의 땅 안쪽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어차피 지금의 상황도 최악인데 이보다 나빠질 수는 없겠지.
‘아녹스라면. 빛의 눈이 닿지 않는 그곳이라면 벗어날 수 있어···!’
아마데아의 눈에 희망이 차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악!!”
더러워진 성법의가 이젠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마데아의 눈에서 희망 또한 꺼져갔다.
‘이대로······. 이대로 끝이라고···?’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몸은 더 움직일 수 없었다. 화살이 스쳐 지나간 허벅지와 발목 부위에서 피와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이 생생하다. 나무 위에서 떨어진 반동인지 눈앞도 가물가물했다.
필사적인 움직임은 그저 꿈틀거리는 정도로 그쳤다. 그나마 남아있던 희망마저 꺼져가던 그 순간이었다.
“빛의 개들께서 웬일로 여기까지 행차신가?”
빈정거리는 말 뒤로 몇 명의 발소리가 더 들려왔다. 눈앞이 캄캄하여 분간은 할 수 없었지만 분명 추격대에게 호의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추격대가 술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디모네! 오늘은 너희에게 볼일은 없다! 지금은 이 이단자만 처리하고 순순히 물러날 테니ー
“예로케리들은 멍청한 건지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구분을 못하겠네. 늬들 방식대로 다시 말해줘?”
말을 하던 남자는 성질이 꽤 급한 모양 인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꺼림칙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끄아악!”
“아악! 도망쳐!”
수백번도 넘게 느껴본 기운. 빛과 강하게 반발하는 이 느낌은 분명 어둠의 힘이었다.
“‘이단자 놈들은 볼 것도 없이 즉결 처형이다.’였던가?”
“아트레우스. 말해준다더니 행동이 먼저였다.”
“알 게 뭐야. 그것까지 포함해서 저것들 방식이라고.”
아트레우스라고 불린 남자는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건 어쩔 셈이야, 보스?”
이제야 가물거리던 시야가 돌아온 아마데아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눈앞에는 디모네의 이단자 세 명이 자신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껏 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데려간다. 일단 지혈해.”
“보스, 내가 웬만해서는 말 안 하겠는데 이건 그거잖아. 진심이야?”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굳이 살릴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아마 추격대에게 협박했을 아트레우스라는 남자는 옆의 디모네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크고 척 보기에도 우락부락한 몸의 사내였다. 그 옆에서 그녀의 죽음을 종용한 사내는 그와 대비되는 빼빼 마른 몸매에 볼이 움푹 들어가 강퍅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살리라고 지시한 쪽은 디모네들의 수장인 듯했다. 눈은 길게 내려온 앞머리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옆의 디모네들과 마찬가지로 온기 한 조각 없는 눈일 터였다.
“명령이다.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예이예이~ 분부대로 합죠.”
“내 손으로 디모네의 원수를 살리게 되다니. 아녹시아시여,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두 남자는 궁시렁거리며 아마데아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허벅지께의 상처를 보더니 그 마른 남자가 혀를 한번 차고는 말을 이었다.
“독입니다. 그것도 상당한 극독이요. 정말 죽일 생각이었나 봅니다.”
“······비켜봐.”
아마데아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남자의 말대로 화살이 스쳐 간 허벅지살 부근이 꺼멓게 변해가고 있었다.
역시나 이런 수작 쯤은 신성력만 멀쩡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마데아는 계속해서 실감하게 되는 자신의 처지에 저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눈 앞으로 다가와 선 남자는 그녀의 표정을 고통에 의한 일그러짐으로 이해한 것인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괜찮을 겁니다. 독은 제 전문이거든요.”
그녀는 그제야 남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앞머리 틈새로 금색의 눈동자 또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데아를 붙들고 있는 그의 부하들과 달리, 그의 눈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도 온기를 띄고 있었다.
마른 남자가 그녀의 상처 부위의 옷을 손으로 가볍게 찢으며 상처가 잘 보이도록 했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다가온 금빛 눈의 남자의 손이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은 점점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이내 팔을 넘어 어깨까지 점령해가던 그때.
“되도록이면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많이 흉하니까요.”
아마데아는 그 말을 무시한 채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는 아직 검게 변하지 않은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손수 감겨주었다.
“잠깐 자고 일어나십시오.”
놀랍게도 많이 지친 것인지 눈을 감은 것만으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마데아는 자기를 가볍게 들어 올린 남자가 잠깐이 아니라 평생 자버렸으면 좋겠다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시작은 작은 소문이었다. 궂은일을 하는 아랫것들이 저들끼리 떠들어대곤 하는 그런 하찮은 소문.
「들었어? 국경지대 인근 마을에서······.」
「말조심해. 그런 건 당연히 헛소리고······.」
시작은 미약하고 작은 것에 불과했으나.
「소문이 사실일까? 저번에 돌던 그거 있잖아. 성녀가 실은······.」
「그게 사실이라면 여신께선·········.」
이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아니, 고작 무시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아마데아의 숨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깨달은 순간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그녀를 보는 아랫것들의 시선에 의혹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 의혹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져나가 이내 귀족들에게까지 퍼졌다. 전에는 그녀에게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던 귀족들이 뻣뻣이 고개를 들고 대거리하는 일이 늘었다.
예전같으면 그 건방진 귀족을 밟아주는 것으로 끝났을 일이었다. 그녀는 실력행사를 하고, 다른 이들은 모른 척 한다. 여태까진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여신의 이름으로 성녀를 모욕한 자를 치죄하려던 그 순간.
역겨운 가짜 성자가 등장했다. 뒤에는 성난 군중을 등에 업은 채였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그렇다 쳐도 그동안 확실하게 서열을 잡아놨다고 생각한 귀족들마저 합세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마른 들판에 단번에 피어오른 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했다. 시작된 이상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불길이었다. 그 불길이 산처럼 커져 아마데아를 단숨에 덮쳤다.
“허억······!”
아마데아는 숨을 몰아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밭은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이마를 짚었다. 이마는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이 불쾌했다. 갑작스레 드는 오한에 양 어깨를 두 손으로 감쌌다.
불쾌감. 그래, 불쾌감이다. 그녀는 가짜에게 느끼는 두려움을 불쾌감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그딴 가짜에 두려움을 느낄 리가 없다. 오직 분노와 불쾌감만이 있을 뿐.
그러나 애써 쥔 주먹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부정하려 해봐도 너무나 명백하다. 결국 두려움은 손 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에메로스······. 그 녀석이 아니야. 내가 진짜라고······.”
결국 처음으로 쫓겨날 때부터 하던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자신의 무력함이 한심하고 절망스럽다. 더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듯한 절망과 불안이 그녀를 조금씩 잠식해갔다.
“깨어나셨습니까.”
아마데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침대 곁에 앉아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때 부하들의 반대에도 자신을 살리기로 했던 그들의 수장이었다.
그는 물 한 잔을 그녀의 손에 들려주며 덧붙이듯 말했다.
“헬레니온입니다. 말씀은 편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고, 고맙구나······.”
남자, 아니 헬레니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마데아의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애초에 존댓말을 쓸 생각이 없던 것을 뒤늦게 알아챈 헬레니온은 헛기침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묻고 싶은 것이 많으시겠으나 우선 옷부터 갈아입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분 옷이 있습니다.”
“······.”
아마데아는 그제야 제 옷이 갈아입혀진 것을 알아챘다. 더러워진 옷을 벗겨내고 상처를 붕대로 감싸지는 감각조차 느끼지 못하고 기절한 모양이었다.
“옷시중은 그대가 하는가?”
순진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그녀의 대답에 헬레니온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고국에서 쫓겨나 그동안 적으로 여겨왔던 자들에 의해 구해졌으니 적어도 경계심을 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그녀를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잠시 그녀의 태도를 대범함이라고 해야 할지, 아님 상황 파악 능력이 떨어지는 것인지를 고민하던 그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종을 들어 흔들었다.
“부르셨습니까. 헬레니온님.”
아마데아는 아마도 들어온 인물을 몸종 정도의 위치로 지레짐작하고는 자연스레 관심을 끊었다.
“여기 이 분의 옷을 갈아입혀 드리게. 끝나면 난 문 앞에 있을 테니 부르도록.”
헬레니온의 부름을 받고 온 여자는 아마데아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분주히 세숫물을 대령했다.
아마데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단자들이어도 그 정도 기술력은 있는 건가 생각하며 손을 적셨다. 적당한 미온의 물이었다.
내심 아마데아는 놀라워하며 옷시중을 받았다. 찝찝하게 달라붙던 옷을 갈아입고 나니 문 앞에서 기다린다던 헬레니온이 어느샌가 들어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손에 못 보던 종이를 하나 들고 있었다.
“예로케리 측에서 전국에 뿌린 전단입니다. 온통 당신 얘기 뿐이군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이단자들이 지어낸 빛의 멸칭을 듣고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그에게 따져 물으려던 순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성자 ‘에메로스 아우레티아’의 즉위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백성부터 귀족까지 모두가 인정한 진정한 성자라고 하는군요.”
“······!”
아마데아는 그의 손에서 전단을 낚아채듯 빼앗아 갔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되뇌며 본 전단의 내용은 짧지만 강렬했다.
그동안 가짜의 농단으로 유폐되어있던 진짜 성자 ‘에메로스’가 정식으로 세례를 받아 ‘에메로스 아우레티아’가 되었으며, 가짜 성녀이던 아마데아를 보는 즉시 즉결 처형을 촉구하는 글귀였다. 전단을 든 아마데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에메로스······ 아우레티아······?”
말도 안되는 일이다. 여신님은 나 아마데아를 사랑한다. 짜증 나는 가짜가 벌레처럼 눈앞에서 설치더라도 진짜는 나이니까.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또한 여신의 사랑을 받고 여태껏 디모네들을 처단한 공적도 있으니 아무리 아랫것들이 설치더라도 소용없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그 가짜의 성이 여신의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세례를 통해 여신의 힘을 증명해내면 성자 혹은 성녀로서 인정받고 여신의 존함을 성으로 쓰게 된다. 즉, 가짜의 이름에 여신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건 가짜가 세례 또한 통과했다는 것이 된다.
‘말도 안 돼. 나를 가짜로 선동한 것부터 세례를 통과한 것까지 전부 말이 안 돼. 무슨 수를 쓴 거지? 나에겐 무슨 수작을 부려서 내 신성력을 없애버린 거고, 빛의 세례는 어떻게 통과한 거지? 빛의 세례는 단순히 신성력으로만 되는 게 아냐. 여신의 허락이 필요한 의식을 무슨 수로······.’
헬레니온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세계가 부서지길 기다렸다. 그가 적당히 파고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틈이면 된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더는 막을 수 없는 상처로 만드는 건 그에겐 쉬운 일이니까.
“이제 당신은 공식적으로 성녀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아마데아.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나는······. 아니야, 나는 아마데아 아우레티아. 내가, 내가 여신의 이름을······!”
하지만 정작 그가 원하던 틈새가 드러났을 때에야 그는 스스로 마음을 깨달았다. 더는 눈앞의 사람이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여태껏 다른 예로케리들을 대해왔던 식으로 상처입히는 방식을 쓸 수 없다.
“아마데아. 미안합니다.”
헬레니온은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전과 같이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팔을 타고 오르는 그 모습에 아마데아는 울음도 멈추고 그에게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이 나를 구해주었듯이, 이번엔 제가 당신을 지킬 겁니다.”
어느새 멈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는 슬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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