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편

5화 : 정신 차리자! 내게는 애인이 있어!

발을 다친 이테루스가 곤란에 처하자 이리는 그에게 제안한다.


이리 편 : 

진짜 놀고들 있네.


'아, 결국 둘이 되다니…!'

이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겨우 찾아낸 이 잘생긴 솔플러의 이름은 이테루스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다른 농노가 오고 말았다.

"뭘 하다 발등에 낫을 찍은 거야? 걸을 수는 있겠냐?"

"응."

"짜증 나니까 대충 말하지 마! 심각하다고!"

"…미안."

오렌지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붕대의 매듭을 콱 잡아당긴 후 일어섰다. 와, 이테루스도 장신이라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더 크네.

그의 이름은 쿠온. 쿠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감탄 중인 이리를 쳐다봤다.

"너 이름이 뭐라고?"

"아리에스…라고 적혀 있었어."

이테루스가 옆의 바위에 앉아 위조 신분증을 읽으며 대신 대답했다. 왜 제 친구와 달리 촉촉이 젖어있는 이상한 눈빛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마녀 아리에스를 모르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지.

"아직도 시간초밭에 마녀가 남아 있었구나."

"그러게. 그런데 말이 시간초지, 그거 솔직히…"

"이테루스,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마!"

쿠온이 눈썹을 세우며 소리치자 이테루스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시간초란 눈을 뜬 가옥 주변에 심어진 작물의 이름 같았다.

뭔가 숨기려 한 것 같지만 알게 뭐람? 죽은 감독관도 같은 말을 했었지. 적당히 맞춰주면 돼.

이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그곳의 마지막 생존자랍니다."

"그래. 우선 감독관에게 데려가야겠네."

"아니, 뭔 개소…!"

진정하자.

"왜… 그래야 하나요?"

"그야 네 직속 관리자잖아. 게다가 우리 상황이 안 좋거든. 그 인간한테 트집 잡힐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이리는 쿠온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하, 그래서 감독관이 거기 나타난 거였구나.

하지만 곤란했다. 그놈은 이미 늑대 밥이 되었단 말이야.

"어쩌면 좋을까요. 그분은 오늘 아침에 절 만나러 오셨다가 늑대에게 당하셨습니다."

"뭐라고?!"

"이것을…"

이리는 유감스러운 척,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며 쿠온에게 나무 막대를 내밀었다. 역시 챙겨두기를 잘했지.

그리고 막대를 든 쿠온과 시선 교환하는 이테루스를 보며 조용히 검 자루를 쥐었다.

자신을 의심하는 기색이 보이면 바로 찌를 생각이었다.

"확실해?!"

갑자기 이테루스가 벌떡 일어서서 물었다. 발등을 감은 붕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당신, 발…"

"진짜냐고!"

"?!…네…"

그가 주먹을 쥔 채 성큼 다가오자 이리는 순간 기세에 눌려 한 발짝 물러섰다.

뭐야. 친구한테는 꼼짝도 못 하더니. 더 추궁하면 정말 죽여버…

"세상에! 나 지금 우울증 완치된 거 같아!"

"앗!"

이테루스는 이리를 번쩍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반면, 쿠온은 입술을 비죽 내민 채 팔짱을 꼈지만.

"그렇게 좋냐?"

"당연하지! 내가 그 인간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저, 다른 확인은 안 하십니까? 어쩌다 당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몰라. 그런 건 마을에 가서 이야기 해~!"

"아… 네. 그건 그렇고 발은 괜찮으신지."

"응? 발…? 악!!"

"잠깐! 내려줘요!"

다행히 쿠온이 이테루스의 어깨를 붙들어준 덕분에 이리는 그와 함께 널브러지지 않았다.

쿠온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 위험한 곳을 자주 다니시더니 결국 이렇게 되셨군.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냥 시간초 재배를 때려치워야 해. 더 이상 무리야."

"이미 영주관에서 논의를 했다더라. 그런데 그만둘까?"

"중단 해야지! 관리까지 죽었잖아! 벌써 몇 명째냐고!"

"미안. 나한테 화내지마."

"그게 아니라…! 됐어. 이테루스. 마을에서는 아까처럼 기뻐하는 티를 내면 안돼! 알지?!"

"으응."

대화를 들으니 펜리스 늑대에 의한 사고는 흔한 일인 듯했고 이테루스는 감독관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두 남자는 그의 부고 소식을 비통해하기는커녕 이리에 대해 의심조차도 하지 않았다.

안심이야. 처음의 우려와 달리 상황은 좋게 흐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수확제까지 삼주 밖에 안 남았잖아."

"당분간 새 감독관 선출은 못할 거야. 아마 대리를 세우겠지."

수확제. 이리는 몸을 들썩거렸다. 오, 대박. 여기서 이런 정보까지 얻다니.

그런데 대귀족이 올 때까지 삼주나 남았다고?! 생각보다 남은 기간이 너무 길었다.

"일단 난 주어진 할당량을 채워놔야 해. 쿠온, 넌 아리에스랑 같이 마을에 가."

"헛소리! 이 넓은 구역을 그 발로 어떻게 할 건데?!"

"그치만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까 왜 얼간이같이 다친 거야!"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렇게 날 바보 취급 하면 후련해?"

이테루스가 고개를 돌려 버리자 쿠온은 그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이리는 순간 두 남자가 다투는 줄 알고 말려나 되나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쿠온은 그에게 키스하려 했고 이테루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쳐다봤다.

"잠깐… 미쳤어?! 지금 대낮이잖아!"

이테루스는 쿠온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 뺨과 목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반항하는 걸 보니까 주제 파악을 못한 것 같아서."

"싫어…! 앗!"

그러나 쿠온은 떨어질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몸을 밀착하더니 그의 다리 사이를 꽉 쥐었다.

아니, 님들… 지금 뭐 하세요? 이리는 눈꺼풀을 빠르게 껌뻑였다.

'…그렇구나. 이 남자들, 친구 사이가 아니었어.'

그제야 이해했다. 마리스테라는 이런 사람들이 많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빳빠라밤! 어서 오세요. 게이들이 득실거리는 이 세계에. 이리는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으로 남성애자 버스에서 불타는 두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질펀하게 갖고 놀다 갈까."

쿠온은 옷 앞섬 사이에 드러난 이테루스의 가슴골을 손가락 끝으로 그어 내리며 웃었다.

"… 읏… 너 때문에 일을 못하면 난 채찍형을 당할거야. 죽을 수도 있어. 그걸 원해?"

"그건 이미 예정된 거 아닌가? 어차피 그 발로 못할 거잖아. 도축되기 전에 밭 좀 갈겠다는데 뭐가 나빠."

"… …"

우와. 애인한테 저렇게 심한 말을. 이리가 이테루스에게 시선을 집중하자 그는 쿠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잔물결을 그리듯 흔들렸지만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또 그 따위로 눈 뜨지!"

"아앗…!"

쿠온이 그의 아랫도리를 쥔 손을 움직이자 이테루스는 신음을 냈다. 이상하게도, 그가 조금 달뜬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쿠온은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이테루스의 목에 입술을 댔다. 

'후우. 놀고들 있네. 그냥 대책 없어서 저러는 거구먼.'

개노답들. 이리는 표정을 구겼다. 하지만 상황을 잘 이용하면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리에 손을 얹고 기침을 하자 벌게진 두 남자가 이리를 바라보았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이테루스 편 :

정신 차리자! 

내게는 애인이 있어! 


'쓰레기 자식. 내가 가축이냐고.'

쿠온이 제 구역으로 돌아가자 이테루스는 툴툴거렸다. 예전부터 그가 타인 앞에서 이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저항해봤자 성만 낼 테니 별수 없었다.

'그래도 너무해. 이 여자는 초면인데 그 짓을…'

이테루스는 지시를 기다리는 아리에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갈색 눈동자에서 붉은 안광이 옅게 빛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책 속의 국왕이 튀어나온 것 같아 신기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는 쿠온에게 희롱당할 때 몸이 뜨거워졌었다. 분하고 수치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아리에스의 눈이 자신의 목을 거쳐 가슴을 타고 내려가 아랫도리에 멈춰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무슨 약이라도 빤 것처럼 흥분했었다. 눈물을 참아야 했을 만큼.

그리고 지금도… 으윽! 아니야! 왜 이러는 거야!

"얼굴이 빨간데 상처가 많이 아픕니까?"

"…됐으니까 이거부터 써."

이테루스는 모자를 건넸다. 눈이 가려져야 망상이 멈출 것 같았다.

진정한 이테루스는 수확 방법을 대략 설명했다. 시범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리에스가 일을 잘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할당량을 못 채우면 채찍을 맞을 텐데 뭐든 이용해야지.

아리에스는 묵직한 낫을 가볍게 들더니 보리 줄기 한 움큼을 종이 자르듯 썩뚝 끊어냈다.

그리고 베어낸 보리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후 줄로 감고 있었다.

"잠깐, 그렇게 많이 쌓으면 옮기기가…"

하지만 아리에스는 집채만 한 보릿단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저벅 걸어가 건조 자리에 쿵! 하고 내려 놓았다.

그는 뇌가 작동을 멈춘 것처럼 할 말을 잃고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아리에스는 엄청난 양을 혼자 빠르게 수확했고 얼마 안 있어 보리로 가득 차 있던 주변은 순식간에 공터가 되었다.

"다음은 어디로 가면 되나요?"

"… …"

 그리고 전혀 지치지 않은 듯한 기색으로 다음 일을 물었다.

부축을 받은 이테루스가 이동한 구역은 잡초 관리를 하지 않아 더 어려운 곳이었다.

바위에 앉은 이테루스는 이번에도 말로만 설명했다.

아리에스의 손에 들린 목초용 대형 낫은 매우 길기 때문에 이번에는 저 여자가 고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에스는 미끄러지듯 반원을 그리며 가볍게 낫을 휘둘렀다.

억센 잡초와 보리 줄기는 촥 하는 소리와 함께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하아. 미쳤어. 농사까지 천재라니 멋있잖아.'

이테루스는 악덕 관리가 죽었다는 희소식을 들고 나타난 구원자를 바라보며 쿵쾅거리는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푸른 하늘과 금빛 보리밭이 만들어낸 풍경 속에 서 있는 아리에스는 너무나...

"이테루스!"

"어? 응? 뭐?"

갑자기 아리에스가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는 속내를 들킨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

"날이 잘 안 드는데요?"

"… …"

이테루스는 붕대를 감은 발을 땅에 콱 발길질 했다. 저릿하고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 차리자! 내게는 애인이 있어! 그는 지금 이 발을 치료해 주고 간 쿠온을 필사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왜 그러죠?"

"날이 마모된 거니까 이쪽으로 와봐."

이테루스가 내민 숫돌을 받은 아리에스는 날을 갈며 이쪽을 힐끔 곁눈질 하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아리에스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랬지? 가능한 대답은 모두 할게."

"제가 마을에 삼주 정도 머무르는 게 가능할까요?"

"… …"

하지만 이테루스는 질문을 듣자 아연해졌다. 이 마녀가 지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지?

"무슨 소리야. 넌 어디에도 못 가."

"네?"

"넌 아마 인구조사에 누락된 마녀일 거야. 감독관이 무슨 생각으로 네 존재를 숨겼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온 이상 무조건 영주께 알려야 해."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수도로 전갈을 보내겠지. 그때까지 넌 마을에서 나갈 수 없을 거야."

"아니…얼마나요?!"

"모르지. 여기서 육지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리니까."

"제가 원치 않아도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녀한테 그런 게 어딨어!"

답답해진 이테루스가 언성을 높이자 아리에스의 입은 떡 벌어져 있었다.

"저기… 마녀라는 게 도대체 뭐죠?"

"진심이야? 자기 신분을 모르는 것은 심하지 않아?"

"하하. 제가 시간초 밭에서 세간을 모르고 컸다 보니."

이테루스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빤히 보자 아리에스는 입꼬리를 어설프게 올렸다.

'아니지. 정말 혼자 거기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바로 생각을 바꿨다. 인정하자. 방금 만난 사이지만 이 여자는 자신의 취향이었다.

최애캐랑 너무 닮았고 지금 도움까지 받는 상황 아닌가. 그냥 좋게 넘어가고 싶었다.

"마녀는 여성 마리스, 마리스테라의 국적을 가진 여성 노예야."

"아으… 하필 노예라니… 그래서 주인이라 부르라 했던 거였구나…"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째서 그런 여성들이 있는 건가요?"

"그냥 오래전부터 있었던 소수민족이야. 에스페미아에도 비슷한 남자들이 있어. 그쪽과 달리 이쪽은 100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100명…"

"그래서 귀족들이 수집품 모으듯 너희들을 찾는 거지. 내 생각에 아마 넌 여기 머물다가 수도로 갈 가능성이 높아."

"이런!"

아리에스의 탄식에 이테루스는 한쪽 눈을 꿈틀거렸다.

'노예 입장에서는 그렇게 라도 이 섬을 나가면 좋은 거 아닌가? 왜 그리 싫은 티를 내는 거야. 배가 불렀어.'

조금 배알이 뒤틀려 엷은 조소가 새어 나왔다. 호감인 것과 별개로 이 마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튼, 네 상황을 이해했길 바라."

아리에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깨닫고 수긍하는 것일까?

"그럼 전 마을에 머무르다 육지로 끌려갈 낌새가 보이면 바로 나가야 겠군요."

이런! 여전히 엉뚱한 소리를 했다.

"뭘 들은 거야?! 그러니까 넌…!"

"네. 노예잖아요. 당신, 많이 곤란해 하는 것 같던데 혹시 더 필요한 일은 없나요?"

"무슨…"

"실은 제가 사정이 있어 이곳에 삼주만 머물러야 합니다. 반드시."

"… …"

이테루스는 그제야 아리에스의 의도를 납득했다.

이 마녀는 마을에 있다가 적당한 때에 도주할 테니 자신에게 협력해달라 말하고 있었다.

"가능할 거라 생각해? 잡히면 나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내가 왜 고작 일손을 도움받는 거로 목숨을 걸어야 하지?"

"위험부담에 관한 대가는 지불할게요."

아리에스는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보였고 이테루스는 목구멍 안쪽으로 침을 삼켰다.

"우선 선금으로 절반."

"… …"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테루스와 쿠온이 몇 년을 일해도 절대 모을 수 없는 액수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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