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낮밤] 4화
학교 생활 나쁘지 않네.
등나무 벤치에서의 대화 이후로, 강은재는 유이경이 입고 다니는 코트와 비슷한 옷자락만 봐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을 떠벌리고 다닐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기에게 빚을 졌다는 말도 반쯤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가 ‘뭘로 받을지 생각해 보겠다’로 끝나버린 탓에, 유이경을 보기만 하면 그가 대체 뭘 달라고 할지가 신경쓰였다.
그리고 이 기묘한 부담감은 자신과 할아버지, 할머니를 들들 볶아 어떻게든 돈을 가져가고야 마는 사채업자들을 떠오르게 했다. 그들은 이자 입금이 하루라도 늦어지면 전화를 미친 듯이 걸어댔다. 맞춤법도 안 맞는 협박 문자를 보내는 건 예삿일이었고, 이제는 집에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할아버지가 경비로 일하는 아파트에까지 들이닥쳤다.
하지만 강은재가 얼마나 불편해 하든 유이경의 출몰을 막을 길은 없었다.
유이경은 보통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들어와서 아무데나 앉아 있다가 강의가 끝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강은재와는 전공필수 두 과목이 겹쳤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유이경은 2학년인 것 같았다. 그런데 1학년 전필을 듣는다는 건… 재수강이라는 뜻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교수의 말을 놓치고 이것의 의미에 대해 곱씹던 강은재는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뱉었다. 옆에 앉아 있던 김혜지가 속닥거렸다.
“왜 그래? 교수님 말씀 들으니까 깨달음이 막 오냐?”
최동우가 맥 없이 거들었다.
“나는 잠이 와.”
강은재는 별 거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각이 하나 맞춰졌을 뿐이다. 마담은 유이경이 스무살 때 선수 생활을 했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그도 지금의 자신처럼 학교를 다니며 밤에 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게 사람들 말처럼 돈을 그렇게 잘 번다면… 굳이 학교에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고 보면 유이경이 몇 살인지도 모른다. 얼굴만 보면 자신과 별로 차이가 안 나는 것 같았지만 분위기가 워낙 이질적이었다. 겪은 게 달라서 그런 분위기가 날까. 결국 강은재는 유이경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강의 내용 대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유이경은 밤에도 출몰했다. 다만 가게에 출몰했다고 해서 딱히 강은재를 찾아 인사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멀리서 마담과 대화하는 걸 듣게 되거나, 어딘가로 걸어가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유 실장, 요즘은 왜 직접 수금을 나와? 아래 애들 시키지 않구.”
“사람이 모자라서요. 제 얼굴 자주 보니까 좋지 않으세요? 박 실장님도 가끔 눈호강 하셔야죠.”
“사무실 단번에 박차고 나가서 그 눈호강 끝내버린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멘트를 쳐? 그리고 채권자 만나는 게 뭐가 좋다고.”
강은재는 룸 하나를 정리하고 나오다가, 복도에서 이런 대화를 하며 걸어가는 유이경과 마담을 만났다. 마담에게는 인사를 해야 하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담은 같이 인사를 해주었지만 유이경은 잠깐 눈을 마주쳤을 뿐 딱히 알은체는 하지 않았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잠이 모자라고 몸이 피곤한 것 외에는 나름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흘렀다. 유이경과 자신 사이의 ‘빚’도 희미해지는 듯했다.
오늘도 강은재는 강의실 문을 열어두기 위해 강의 시간보다 30분 일찍 상경대 건물에 도착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 트렌치코트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1주일 동안 하도 봤더니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이경이었다.
“안녕하세요, 후배님.”
이른 아침이라 건물 로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이경은 그래서 인사를 건넨 듯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강은재는 똑같은 인사를 돌려주었다. 곧 패널의 숫자가 1로 바뀌며 띵 소리가 났고, 둘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강의실은 11층에 있었다. 다만 상경대 엘리베이터는 크기가 작아서 늘 만원이었고, 속도도 상당히 느렸다. 그래서 수업에 지각할 위기인 학생들은 젊은이의 체력에 힘입어 계단으로 가곤 했는데, 오늘은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엘리베이터에 둘 뿐이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3층에 다다랐을 때 유이경이 한숨 같은 심호흡을 했다.
둘 다 인사 말고는 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강은재는 눈만 굴려서 유이경을 힐끔 보았다. 그는 답답한 듯 셔츠 목 부분에 손가락을 걸어 당기고 있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했을 때 문이 열리고 사람 몇 명이 탔다. 그때였다. 유이경이 갑자기 내렸다.
‘어…?’
강은재는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치고 유이경을 따라 내렸다. 8층에서 내리면 소파가 놓인 로비 비슷한 공간이 나왔는데, 유이경은 조금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니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품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다가가서 보니 약통이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말을 걸자 유이경은 강은재를 올려다보았다. 강은재가 보기에 유이경은 조금 놀란 것 같았는데, 이 반응에는 강은재도 놀랐다. 바로 뒤따라 내렸으니까 자신이 따라왔다는 걸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다시 보니 유이경은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입술에도 핏기가 옅어져 있었다. 유이경은 강은재를 보다가 자기가 꺼낸 약통을 보고는, 약통을 도로 품 속으로 돌려놓았다. 강은재는 자신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약을 먹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방해를 한 기분이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
강은재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자 유이경은 웃었다. 그는 지쳐 보이는 모습인데도 이렇게 웃자 금세 화사해졌다. 유이경은 속눈썹이 길고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웃으면 눈의 선이 섬세하게 가늘어졌다.
“괜찮아요. 잘생겼지만 무뚝뚝한 후배한테 걱정도 받아 보고, 학교 생활 나쁘지 않네.”
“…….”
일전에 등나무 벤치에서 얘기했을 때도 느꼈지만 이 사람은 모든 말을 얄미운 농담처럼 하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유이경에게 무뚝뚝하게 대했던가? 무뚝뚝하게 대할 기회도 없지 않았나?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뭘 내가 차갑게 대했다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강의실 문 열려고 일찍 나온 거 아니에요? 가 봐요.”
금세 10분이 지났다. 어딘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사람을 두고 가기는 내키지 않았지만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8층에서 11층까지는 3층밖에 안 되니 계단으로 가기로 했다. 계단 문을 열기 전 뒤돌아보니, 유이경은 그제야 약통에서 약을 꺼내 먹고 있었다. 그걸 보니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약을 물도 없이 먹지? 목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다 문득 저번에 대기실에서 마담과 선수들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유이경이 ‘어디서 구했는지 약을 했다’던. 어쩌면, 혹시 어쩌면 이런 모습 때문에 난 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자신이 유이경을 걱정해서 뭐 할 것인가. 강은재는 머리를 도리질치며 방금 본 장면들을 떨쳤다.
유이경은 강의 시작 직전에 다시 여유를 되찾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개강한 지 1주일이 훌쩍 지난 지금도 어디에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이경 선배는 오늘도 개멋지다.”
김혜지는 입으로 소리를 내며 일기를 쓰는 초등학생처럼 한 글자씩 힘주어 말하더니 노트에 뭔가를 끄적였다. 옆에서 보니 오늘 날짜 아래로 ‘반깐 머리, 연회색 셔츠, 발목이 보이는 검정 슬랙스’ 등 유이경이 뭘 입고 뭘 신었는지를 상세히 적고 있었다. 최동우가 기함하며 물었다.
“야, 너 뭐하냐…?”
“기록. 솔직히 볼 때마다 사진 찍고 싶어. 그치만 양심이 살아 있는 관계로 그냥 적기만 하는 거야. 나 그림도 못 그리니까.”
“존나 스토커 같아… 차라리 사진을 찍어라.”
사실 강의실의 몇몇은 몰래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지만 강은재는 김혜지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찍어도 괜찮다‘는 싸인을 주는 순간 김혜지가 무서운 방향으로 폭주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문자가 왔다. 화면을 언뜻 보니 유이경이 보낸 거였다. 강은재는 김혜지에게 핸드폰 액정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문자를 확인했다.
[나한테 진 빚, 뭘로 받을지 정했어요.]
[강의 끝나고 거기서 봐요.]
빚…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정말로 갚아야 할 빚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람이 이 따위로 말을 꺼냈으니,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추심하듯 말할 수 없게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아까 조금 비틀거린 걸 보고 마음이 약해졌던 게 우스웠다. 강은재는 핸드폰 액정을 퍽퍽 눌러 답장을 썼다.
[네. 이따 봬요.]
역시나 유이경은 학교에서 제일 높은 곳, 그래서 시야가 가장 탁 트인 장소인 등나무 벤치에 있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불이 붙은 담배를 들고 캠퍼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담배를 피우는 걸 보면 학교 구경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또 어째서 굳이 여기까지 오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 벤치는 낮은 관목과 벚나무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꽤 운치가 있었다. 게다가 도서관 근처에는 이미 가까운 흡연구역이 있어서, 5분이나 더 올라와야 하는 이 벤치로는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았다. 신입생인 강은재로서는 유이경이 이런 곳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선배는 선배구나.
“후우….”
강은재는 경사진 길을 오느라 살짝 흐트러진 숨을 고르고는, 유이경을 부르기 전에 야구점퍼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얼마 전 룸에서 소동이 있었을 때 주운 지포 라이터였다.
유이경의 것인지 확신은 없었다. 라이터 뒤에는 이니셜 세 글자와 날짜 각인이 되어 있었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무리 봐도 유이경의 이니셜은 아니었다. 그래도 유이경에게 물어본다는 걸 그간 바빠서 잊고 있었다.
“왔네요.”
“네.”
유이경이 철제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며 인사를 했다. 강은재는 또 잊어버리기 전에 라이터부터 처리하기로 마음 먹고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응?”
“이 라이터 선배님 거 맞나요.”
지포 라이터를 내밀자 유이경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놀란 것 같기도, 의아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혹시나 훔쳤다고 생각할까봐 강은재가 얼른 덧붙였다.
“그… 저번에 룸 소파에 떨어진 걸 주웠어요.”
“아아. 그랬구나. 아예 잃어버린 줄 알았어요. 착한 후배님이 주워서 다행이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몇 시간만에 ‘무뚝뚝한 후배’에서 ‘착한 후배’가 됐다. 게임에서 퀘스트를 완료했더니 칭호 보상을 준 느낌이었다.
유이경은 라이터를 받아들어 앞뒤로 돌려보았다. 아마도 각인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걸로 빚은 갚은 셈 칠까.”
이렇게 간단하게 갚아지는 빚이었다고? 그럴 거면 왜 지구 끝까지 따라와서 받아낼 것처럼 굴었던 거지? 강은재는 사채업자의 농담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 여기까지 부른 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곤란한, 그리고 꽤 시간이 드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강은재의 예상대로 유이경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얘기는 그냥 제안으로 들어 줘요.”
원래는 ‘빚을 갚아라’라는 명목으로 뭔가를 요구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강은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도 자기 옆에 앉지 않고 꼿꼿하게 선 채로 긴장한 강은재의 모습을 보자 유이경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돋았다.
“혹시 지금 일 말고 다른 일 해볼 생각 없어요? 수입 짭짤할걸. 학업이랑 충분히 병행 가능하고요. 은재 씨 사이즈면 어렵지 않게 할 것 같은데.”
강은재는 빨개지던 얼굴이 도로 새하얘졌다. 무슨 일인지 아직 자세히 듣지는 않았지만, 이 멘트만큼은 마담이 매일 늘어놓는 선수 권유 멘트랑 똑같았다…. 유이경은 색이 확확 바뀌는 강은재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유이경은… 강은재의 눈에는 무슨 영혼의 거래라도 하러 온 사탄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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