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밤

[BL/낮밤] 3화

비밀 얘기 하기 좋은 데죠?

INTERLUDE by 렌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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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이 있군 그래. 1학년 강의를 또 듣고 있나? 내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던가?”

출석을 다 부른 뒤 교수가 나름대로 농담을 했다. 강의실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강은재는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유 실장’은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이 강의실에 ‘화석’이 몇이나 있는지는 몰라도 유 실장이 화석인 건 확실했다.

그의 이름은 ‘유이경’이었다. 알고 싶지는 않았으나 출석을 부를 때 강제로 알게 됐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느 사채업자가 있다. 그 사채업자를 일하는 가게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런데 그 사채업자가 같은 과 선배다….

“저 사람 누구야? 장난 아니다.”

“선배인가?”

“나 갑자기 월요일이 좋아져.”

소곤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유이경은 다른 고학번 선배들과는 달랐다. 다른 선배들은 그래도 ‘학생’ 같아 보였다.

그러나 유이경은 회사가 아니라 강의실로 잘못 출근한 회사원처럼, 학생 자리에 앉은 강사처럼 튀었다.

슬랙스에 차이나카라 셔츠, 얇은 코트는 멋부리는 대학생이 입을 법한 차림새였지만, 문제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봐도 그는 ‘사회인’ 같았다.

물론 고학번 자체는 특이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유이경은 외모가 워낙 눈에 띄는 탓에 금세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심지어 가방조차 들고 오지 않아서 더 튀었다.

가방이 없으니 당연히 필기도 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에 두 팔을 짚고 무슨 드라마를 보듯 수업을 들었다.

다행히 유 실장은 강은재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아까 중앙 통로로 올라올 때 분명 눈이 마주쳤지만, 별 반응 없이 뒷자리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강은재는 밤에 하는 일에 별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한다고 학교에 알려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자신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아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건 꽤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어제 서로 눈을 마주친 건 정말 찰나였다. 강은재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강은재가 심란해 하는 사이에 쉬는 시간이 되었다. 교수가 잠시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과에서 붙임성이 좋은 무리가 유이경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거기에는 오티 때부터 퀸카로 명성이 자자한 학생도 있었다.

강은재는 잠시 눈을 붙이려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쪽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들렸다.

“선배님, 오티 때 안 오셨죠?”

“이따 저희랑 학식 드실래요?”

“선배님, 저 번호 가르쳐주세요.”

그런데 수선스러운 분위기 사이에서 웃음기 섞인 유이경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 핸드폰이 없어서.”

강은재는 흠칫 놀랐다. 요즘 세상에 핸드폰이 없다고 하면… 통하나? 게다가 유이경은 어제 룸에 들어올 때 마담과 통화를 하면서 들어왔었다. 핸드폰이 있다!

말투는 다정했지만 어떻게 들어도 벽을 치는 멘트였다. 학생들이 벙쪄 있는 사이 교수가 돌아왔고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강은재는 잊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개강총회 참석 여부를 묻느라 며칠 전 출석부에 있는 번호로 연락을 돌렸던 것이다. 그때 유이경의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수업이 끝날 무렵, 강은재에게 이 얘기를 들은 김혜지가 비장하게 말했다.

“저 선배 번호 따자.”

최동우가 되물었다.

“어느 선배?”

“저 선배!”

혜지는 막 강의실 문을 나서는 유이경을 가리켰다. 최동우가 김혜지에게 대꾸했다.

“핸드폰 없다잖아.”

하지만 김혜지는 굴하지 않았다.

“진짜 없겠냐? 친구가 과대인 거 지금 안 써먹으면 어따 써먹어?! 가라 강은재!”

강은재는 결국 김혜지에게 등을 떠밀려 어정쩡하게 걸었다. 그는 상경대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유이경의 등 뒤까지 떠밀렸다. 상경대 건물의 로비 입구는 통유리창이 2층 높이까지 이어져 있었다. 한낮에 가까워진 햇빛이 로비에 가득 들이쳤다.

“선배님!”

김혜지가 유이경을 불러세웠다. 밝은 곳에서 보니 유이경은 이목구비가 더욱 또렷했다. 반쯤 넘긴 머리카락은 밝은 곳에서 봐도 짙은 까만색이었다.

강은재는 저도 모르게 그를 뜯어보다가, 그의 목 오른편에서 손가락 하나 길이의 흉터를 발견했다. 흉터는 셔츠 카라가 끝나는 라인에 걸쳐 있었다. 밝은 빛이 흉터의 그림자를 짙게 만든 덕분에 눈에 띈 것이다.

강은재는 말수는 적어도 할 말을 못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른 말을 너무 따박따박 잘 해서 탈이었다. 그러나 유이경은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강은재는 그 흉터를 보고는 멈칫했다.

유이경은 시선을 느꼈는지 흉터가 있는 부분을 손으로 쓸고는 강은재 무리를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린 채였다. 결국 강은재 대신 김혜지가 나섰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김혜지고요. 얘는 1학년 과대인데요. 강은재라고 합니다. 얘한테 번호 주실 수 있을까요? 강의 공지도 받으셔야 되니까요.”

“아. 과대라고.”

유이경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과대’라는 말을 반복했다. 강은재는 의심스러워졌다. 나를 기억하나? 과대인 게 놀랍나?

“그래요. 핸드폰 줘 봐요.”

김혜지는 눈이 동그래졌다. 최동우도 덩달아 눈이 동그래졌다. 경영학과에서 제일 예쁜 학우가 못 해낸 일을 강은재가 해냈다. 과대는 역시 최고다!

강은재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잠금을 풀고 핸드폰을 건넸다. 유이경은 자신의 번호를 찍고 전화까지 한번 건 다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유이경의 코트 주머니 쪽에서 확실하게 진동이 울렸다.

“그럼, 다음에 봐요.”

“네,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

김혜지와 최동우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유이경을 보낸 후, 이 둘은 저 선배의 시간표도 따겠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사실 유이경에게 누구보다 할 말이 있는 건 강은재 쪽이었다.

유이경은 학교 애들과 딱히 친하게 지낼 마음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럼 강은재가 어디서 일하는지 따위의 사소한 일은 퍼뜨릴 기회도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어제 자신을 본 건 비밀로 해 달라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란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강은재는 잠시 볼 일이 있다며 두 친구를 버리고 상경대 건물을 나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이경은 키가 큰 편이어서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도서관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다. 강은재는 얼른 그 뒷모습을 쫓았다.

왠지 뒤를 밟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강은재는 거리를 두고 유이경을 따라갔다. 이 오르막은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유이경은 한눈도 안 팔고 성큼성큼 오르막길을 올랐다.

도서관은 캠퍼스 내에서도 다소 외진 곳에 있었다. 점점 주위에 나무가 늘어났다. 정말 도서관에 가려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유이경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이제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디까지 쫓아오려고요?”

강은재는 퍼뜩 놀랐다. 어느새 유이경이 그 자리에 멈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등줄기에 땀이 솟는 듯했다. 강은재가 민망함을 누르고 겨우 입을 떼어 뱉은 소리는 이딴 소리였다.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화장실이라고 하면 화장실까지 따라오시려고요? 번호 가르쳐 줬잖아요.”

할 말이 없었다. 맞다. 핸드폰으로 연락해도 된다. 바보인가? 여기까지 왜 쫓아왔을까? ‘핸드폰으로 연락한다’는 방법을 정말로 못 떠올렸던 강은재는 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이경은 그런 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따라온 김에 더 따라와 봐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강은재는 뛰어가듯 그의 뒤를 따랐다.

유이경이 강은재를 끌고 온 곳은 도서관 뒷편의 등나무 벤치였다. 흡연 구역을 겸하는 모양인지 철제 재떨이도 있었다. 하지만 캠퍼스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 그런지 여기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다.

유이경은 벤치 하나에 털썩 앉더니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언뜻 보니 편의점에서 파는 일반 라이터를 쓰고 있었다. 그는 담뱃갑을 톡 쳐서 담배 한 개비를 튀어나오게 한 뒤 강은재에게 내밀었다.

“담배 안 피웁니다.”

강은재가 다소 딱딱하게 말하자 유이경은 그래요, 하고 대답하곤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강은재는 코를 실룩였다. 담배 연기의 냄새가 나는데도 몇 시간 전에 맡았던 청량한 향 또한 그대로였다. 유이경은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비밀 얘기 하기 좋은 데죠?”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유이경은 이미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는 것 같았다.

“후배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피차 비슷하지. 밤에 있었던 일은 학교에서 말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는 오늘 처음 본 걸로.”

역시나 그는 선수를 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말을 이었다.

“내 얘기는… 박 실장님한테 들었겠죠. 학교에 소문 퍼지면 내 손해가 더 클 걸.”

그러니까, 잘 부탁해요. 유이경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강은재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밖에서 보면 웬 선배가 후배 군기를 잡는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이경이 학교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방향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강은재는 유이경의 바로 옆에 앉든가 뒷쪽의 벤치에 앉아서 등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든 좀 이상했다. 그래서 강은재는 어색하게 선 채로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담배가 좀 남았네. 수다나 떨까. 학생이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해요?”

무슨 삼촌뻘 되는 사람이 할 법한 질문이었다…. 자기도 일단은 학생이면서…. 하지만 거의 초면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할머니가 오래 편찮으셨다. 할아버지가 생활고에 못 이겨 사채를 썼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채업자들이 들볶아 댄다. 연로하신 두 분 대신 어떻게든 자신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학교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같은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그런데 강은재가 머뭇거리는 사이 유이경이 또 입을 떼었다.

“하긴, 사연 없는 선수 어디 있나.”

“…저 선수 아니에요.”

“좀 있으면 하게 생겼던걸.”

강은재는 기분이 나빠졌다. 할 말은 하고 사는 성깔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선배님은 이미 직업도 있으신 것 같은데 왜 학교에 나오세요?”

강은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비아냥을 담았다. 그런데 유이경은 하하 웃더니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후배님도 살아 봐요. 왜 이 나이에 꾸역꾸역 학교 다니는지 이해할걸요.”

강은재는 말문이 막혔다. 그때 유이경이 담배를 철제 재떨이에 눌러 껐다.

“그러고 보니 후배님도 나한테 빚이 있네?”

“네?”

“어제. 잔에 베인 건 못 막아줬지만, 술병에 베일 뻔한 건 막아줬잖아요.”

강은재의 오른쪽 눈 아래에는 작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유이경은 자기 얼굴의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강은재는 그 웃음이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갚아야지?’

그는 이런 식으로 삥을 엄청나게 뜯어본 사람처럼 제 가격표를 읊기 시작했다.

“선수들 그렇게 커버쳐주면 그날 티씨는 내가 받아요. 얼굴이 재산인데, 내가 재산을 지켜준 거잖아? 음… 말하자면 난 자동차 보험 같은 거예요. 사고나면 삐용삐용 달려오는.”

‘출동’을 표현하려는 모양인지, 유이경의 손이 물결 시늉을 내며 허공을 달렸다. 강은재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죄송하지만 드릴 돈이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이 차갑게 나갔다. 그래, 다른 소문은 모르겠지만 ‘돈에 미친 새끼’라던 마담의 말만큼은 진실인 듯싶었다. 굳이 그 돈을 뜯어가고 싶나? 하지만 유이경은 이쯤이야 자주 접하는 반항이라는 듯 뻔뻔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래요? 그러면 돈 없을 때 낼 만한 건 하나밖에 없죠?”

유이경은 이렇게 말하고는 강은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강은재는 내심 빌었다. 제발 이 뒤에 이어질 말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말만은 아니길.

“몸으로 갚아요.”

어제 마담뿐만 아니라 가게 사람들이 한 마디씩 전해준 이 인간의 평판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특히 마담은 말할 기회만 찾고 있었다는 듯 신나게 뒷담을 깠다.

‘유 실장이 누구 묻었다는 얘기가 하루 걸러 하루씩 들린다니까. 이전에는 성질이 드러운 거였는데 지금은 그냥 미친 놈이야. 어느 쪽이 나은 건지 모르겠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선수가 거들었다.

‘저 아는 형한테 들은 거 있는데요. 선수 할 때는 2차를 하도 나가서 걸레로 유명했다면서요. 남자들 오는 사무실에서도 일했었잖아. 앞도 뒤도 완전 대걸레. 그땐 한국에 약도 별로 없을 땐데 어디서 구했는지 약도 존나 하고.’

‘하긴, 이 일 해서 걔만큼 많이 벌었다는 사람 없지 않아?’

‘다른 선수 손님 뺏어서 공사 치니까 많이 벌지. 걔한테 뒤통수 맞은 애들 줄 세우면 지구 한바퀴 돌걸.’

‘하, 나랑 걔랑 안 세월도 거의 10년인데, 이자도 안 깎아주고 수금일은 따박따박 챙겨. 나중에 수틀리면 지 밑에 어깨들 불러다가 내 손가락도 자르는 거 아닌가 몰라.’

사람들이 말하는 유이경은 어쩐지 실존 인물 같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전설처럼 전해지는 쓰레기가 있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여기서는 유이경이 그 역할을 담당하는 듯했다.

강은재는 몸이 굳었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람과 얘기하고 있는 걸까. 조금 잘생겼다고, 어제 도와줬다고, 강의실이라는 평범한 공간에서 봤다고 몇 시간만에 잊어버렸나. 이 사람이 어떤 세계에 속한 사람인지를.

이런 생각이 얼굴에도 드러난 모양이다. 굳어버린 강은재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던 유이경은 이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강은재는 그 웃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웃는 걸 보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하지만 유이경은 강은재의 반응은 아랑곳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선수도 아니라니까 몸이랑 돈 말고 다른 걸로 받아야겠네. 뭘로 받을지 생각 좀 해 볼게요.”

유이경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걸 보니 새삼 키가 컸다. 하지만 껍데기가 아무리 멋져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사채꾼은 사채꾼이었다.

강은재는 밤의 고된 현실과 학교 생활이라는 두 세계를 분리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강은재가 애써 그은 선을 휘저어버렸다. 유이경은, 어린아이가 제 주위의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린 원을 구둣발로 문대서 간단히 망쳐버리는 어른 같았다.

늦은 아침 캠퍼스의 찬 공기와 역한 알코올 냄새가 뒤섞이는 듯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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