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의 유령들
2023 할로윈 기념 연성 / 23.10.31 작성
-주의: 특정 빛전 묘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에스티니앙은 창문 너머로 어른거리는 흐릿한 형상을 발견했다. 어딘지 윤곽이 익숙했는데 시선을 집중하자 금방 흩어져 버렸다. 수호천절 기간에 발맞춰 성도에 몰아친 눈보라가 위협적인 바람 소리를 내며 창문을 두들겼다. 불쑥 다가온 아실이 뭘 보는 거냐고 물어서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싱겁기는. 애인은 피식 웃으며 커튼을 쳤다.
창문 너머의 형상은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에스티니앙은 그 정체 모를 덩어리가 어른 둘과 아이 하나로 이루어진 윤곽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바깥에 있는 것이 사령이라면 난리가 나도 진작 났을 테지. 에스티니앙은 일단 그것들을 유령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후로 그는 틈날 때마다 창밖을 내다봤다.
아실은 에스티니앙이 유령에 관심을 가지는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는 애인을 창에서 떼어놓으려 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옆을 지켰다. 가끔은 본인 역시 창유리 너머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아실에게는 유령이 누구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던 에스티니앙은 은근슬쩍 애인 곁에 서서 바깥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여전히 세 사람뿐이었지만.
유령 각자의 윤곽이 분명해질 즈음 에스티니앙은 내심 그들의 방문을 반기게 되었다. 복수와 용서가 모두 끝난 후에는 종종 찾아오던 악몽도 사라졌다. 잠자리가 편안해졌다는 사실이 홀가분하지만은 않았다. 살아가야 하는 나날이 덤처럼 주어졌으므로 그는 더 이상 추모에 삶을 내던질 수 없었다.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려면 일부러 기억을 헤집어야 했고, 잃은 것들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 했다. 산다는 것은 다소 불편했다.
그렇다고 해도, 슬픔과 미련만이 남은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에스티니앙은 볼을 새빨갛게 붉히며 울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며칠을 매달린 끝에 그는 결국 희미하게나마 기억의 윤곽을 복원할 수 있었다. 늘 일어나던 시각에 눈을 떠서 할 일을 되새기다가 문득 떠올렸다. 온 가족이 웃고 있었다. 동생만 빼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의아해하며 턱을 크게 문질렀다. 밤새 까슬까슬 자라난 수염이 손바닥을 긁었다. 그는 문득 장난기가 들어서 곤히 잠든 애인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보송보송한 뺨에 턱을 비비자, 아실은 잠결에도 눈을 찡그렸다. 아, 이래서였군. 애인 곁에 누워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을까 생각해 봤다. 공상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고 무척 즐거웠다.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모를 수가 없었다. 깊어 가는 수호천절 밤, 눈보라 속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저것들은 ‘진짜’가 아니다. 진짜 유령은 이 안에 있다. 추위를 타는 애인을 위해 늘 지펴 놓은 난롯불 곁에, 거실 소파를 덮은 근동풍의 자수 깔개 위에, 질 좋은 찻잎과 향신료가 칸마다 들어찬 부엌 찬장 아래에. 밝고 따뜻한 이 집안에. 창문 너머로 서성이는 그림자들은 해묵은 미련일 뿐이었다. 그 증거로, 보라. 유령의 얼굴은 무척이나 흐릿하지 않은가. 세월에 흐려진 기억과 꼭 같은 형태로.
에스티니앙은 커튼으로 손을 뻗는 애인을 말렸다. 괜찮다. 아실은 별다른 대꾸 없이 에스티니앙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이니까 염려 말라고. 난 오히려 네가 걱정인데. 그에 아실은 코웃음을 쳤다. 볼 것도 없는 정원을 틈만 나면 내다보던 게 누구였냐면서. 그래, 뭐…. 저런 건 들어와도 쫓아내면 그만이니까. 아실은 호전적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기댔다. 한 팔에 쏙 들어오는 체온에서 에스티니앙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각자의 유령들을 바라보며 둘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붕이 무너지기 전에 눈을 치워야 한다고, 장작을 너무 때는 바람에 창고가 벌써 비었다고, 요즘 아침마다 목이 칼칼하니 생강차라도 끓여 마셔야겠다고. 시시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유령의 형상은 차츰 눈보라에 흩어져 끝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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