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초침을 세는 대신에
최후의 저주 上
-주의: 6.0 효월의 종언 및 용기사 50 잡퀘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 있음 / 용의 피 관련 설정 날조 있음
어느 날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눈가에 생긴 주름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인 줄 알았다. 그러나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게 없고, 피부를 문지름에 따라 사라졌다 나타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아실, 이 머리카락 좀 이상한데.”
정작 아실은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도 태연했다. 그는 자기도 보고 싶다며 거울이 있는 침실로 뛰어갔다. 진실을 깨닫고 어휘력이 반 토막 난 에스티니앙과는 대조적이었다. 급히 따라가 보니 애인은 거울 앞에서 눈가를 문질러보고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기겁하며 아실의 손을 잡아 내렸다.
“뭘 그렇게 놀라? 별일 없었으면 너도 지금쯤 이랬을 텐데.”
아실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다, 아주 폭삭 늙었겠지! 엘레젠은 그냥 수명만 조금 길 뿐이니까.’ 정작 그런 말을 들은 에스티니앙의 얼굴은 젊은이처럼 매끈했다. 일전에 여든여섯 생일을 맞은 알피노도 자글자글한 눈주름이 귀여운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그 애보다 16살이나 많은 남자의 육신은 여전히 서른둘의 청춘을 구가하고 있었다.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건 여러 가지였으나 정리하다 보면 늘 몸 안에 흐르는 용의 피로 귀결되었다.
에스티니앙은 늙지 않는 자신에게 적응한 지 오래였다. 동갑내기 친구인 아이메리크에 비해 자신이 지나치게 젊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알피노와 알리제가 16년이라는 세월을 따라잡아 끝내 그보다 나이 들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새벽의 혈맹에 빈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그런 순간마다 에스티니앙은 꽤 잘 버텼다. 지금까지 겪은 기상천외한 모험담에 대면 육신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건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실이 있었다. 그는 에스티니앙의 상태를 당사자보다도 빨리 알아차렸다. 아실은 연인이 혼자서만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심란해할 때마다 고민상담사를 자처했다. 그는 지난 세월 몸으로 부딪쳐가며 얻은 조언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언젠가 아꼈던 사람들과 모두 이별하고 홀로 남을 거라는 예감이 때때로 찾아올 때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들려주는 얘기에 기대어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부작용으로 가끔 애인의 인생을 스쳐간 지난 인연들을 질투하기도 했지만.
아이메리크는 에스티니앙이 나이 들지 않는단 것을 짐작한 시점에서 기존의 복지 제도를 정비했다. 덕분에 이슈가르드에는 용의 피를 마신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 상담 프로그램이 생겼다. 마침 이슈가르드에 살고 있었던지라 에스티니앙도 몇 번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사교적인 행사를 귀찮게 여기는 성격과 사그라지지 않는 유명세 탓에 지속적으로 참석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실에게 더 의지하게 된 걸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또 그의 언어로 말을 건넬 수 있다는 사실은 깊은 만족감을 주었다. 아실이 있는 한 에스티니앙은 혼자가 아니었다.
때문에 연인의 눈가에 진 주름을 보면서 에스티니앙은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식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작 아실은 얼굴을 문지르며 신기해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에스티니앙은 아주 오랜만에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 같은 고독감을 느꼈다. 그 후로 며칠 동안은 어디 정신을 빼둔 것처럼 종종 생각에 잠겼다. 아실은 제 몸에 일어난 노화를 관찰하느라 연인의 상태 이상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아실의 눈가에서 주름을 발견한 지 사흘째 되던 저녁, 에스티니앙은 이런 헛소리를 했다.
“아실, 내 피 마실래?”
입을 맞추다 여느 때처럼 분위기를 타기 시작했던 차였다. 아실이 목을 물어댄 탓에 그런 거라 가볍게 넘기기에는 말투가 너무 진지했다. 의도를 추궁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내 피의 절반이 용의 피인데 그걸 마시면 너도 좀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실은 고작 주름 하나 가지고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며 어이없어했다. 등짝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은 덤이었다. ‘안 돼?’라고 묻는 에스티니앙을 안아주다가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리 귀여운 연하라지만 어리광을 너무 받아줬나,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우리 얘기 좀 해.”
아실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손길을 애써 쳐냈다. 아예 품에서 빠져나간 뒤에야 에스티니앙은 들러붙으려던 시도를 포기했다. ‘이런 걸로 시간 낭비하기 싫은데….’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 제법 영악했다. 몇 십 년 전에는 자기 입으로 꺼낸 투박한 사랑 고백만으로도 목부터 귀까지 시뻘게지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좀 웃겼다. 시간을 아까워하는 말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실의 입버릇이었다. 에스티니앙이 용의 피 덕분에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제가 남들처럼 나이들 줄로만 알았던 에스티니앙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흐르는 시간 앞에 초조해하는 연인에게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진정하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건 에스티니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간이 아깝다고 말하곤 했던 연인이 지금의 자신과 같은 감정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둘은 결국 다른 사람이었다. 아실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네 피 같은 건 안 먹어.”
나중에라도 번복할 일은 없을 거라고 딱 잘랐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에스티니앙에게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말을 이었다. 오늘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고 내일 당장 머리가 세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풀죽을 필요 없다고. 나는 몸이 늙기 시작해도 순순히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달랬다. 몸에 좋다는 건 다 챙겨먹으면서 앞으로 50년은 악착같이 살 거라고 했다.
“그럼 너만 손해거든?”
반세기가 얼마나 긴지 알잖아. 그만큼 널 붙잡고 있겠다는 거야. 뒤치다꺼리도 다 네 몫이 될 거고, 나는 노망이 와서 오락가락하느라 널 기억 못 할 수도 있을 거고….
아실은 차분한 어조로 자기가 오래 살수록 에스티니앙에게는 얼마나 손해가 클지 읊어주었다. 그는 단호하게 굴겠다는 다짐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에스티니앙의 낯이 슬픔으로 처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에스티니앙.’ 손을 뻗어 눈가를 훔쳤더니 뺨이 눈물로 한층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아실의 두 손이 연인의 얼굴을 감쌌다. 에스티니앙은 그의 팔목을 꽉 잡았다. 젖은 속눈썹이 아실의 손바닥을 콕콕 찔렀다.
에스티니앙은 눈물을 그친 뒤에도 손을 놔주질 않았다. 지난 이틀 간 퀭하게 뜬 눈 밑이 우느라 붉어진 것이 이 와중에도 무척 유혹적이었다. 두 손을 구속당했어도 움직임에 큰 제약은 없었다. 아실은 연인을 자빠트리는 대신 온 얼굴에 가벼운 키스의 비를 내리는 것으로 욕망을 해소했다.
다행히 연인은 오래 상심하지 않았다. 울고, 한숨 쉬고, 애착 인형 노릇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부질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마음이 진정되었다는 것과 준비되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아실은 에스티니앙의 상태를 봐 가며 자신의 노화와 죽음에 대해 조금씩 언급했다. 이를테면 이런 얘기들을.
“사실 난 운이 좋은 경우인 거 알지?”
에스티니앙은 세상 불행을 다 짊어진 듯한 눈으로 아실을 쳐다보았다. 아실은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듯이 연인을 껴안고 설명을 이어갔다.
“남성 비에라가 숲에서 한 사람 몫을 할 때까지 몇이나 살아남는지 알아? 그 중에서도 자연적으로 노화가 시작될 때까지 생존하는 건 또 몇 명이나 될까? 내가 본 노인들은 모두 할머니였어.”
비에라는 인생의 어느 시기까지 불로를 유지할 뿐, 불사하는 종족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실은 빛의 전사였다. 영웅이라고 불리기까지 그가 넘어온 죽음의 고비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모험가로서 맞닥뜨린 위험천만한 경험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네가 그 앞에서 일일이 슬퍼하진 않았잖아. 내가 나이 드는 것도 그런 일로 취급해주면 안 돼?”
약간은 비겁한 말이었다. 에스티니앙이 태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역시도 모험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아실이 나이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에스티니앙은 철저한 외부인이었다. 보통의 연인이었더라면 서로의 얼굴에 파이는 시간의 흔적이라도 세어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실이 살아있는 동안 세월의 손길이 에스티니앙을 스쳐갈 날은 요원했다.
어쨌거나 아실의 노력은 빛을 봤다. 에스티니앙은 그런 대화를 나눈 뒤 평소 모습을 조금이나마 회복했다. 아실이 자신의 노화와 수명을 소재로 던지는 농담에 비로소 질색하는 티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전에는 반박조차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다였다. 이러나저러나 아실은 슬픔에 파묻혀 과묵해진 애인보다, 말본새 나빠도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은 툭툭 던지는 애인이 더 좋았다.
그 해에는 오랜만에 에스티니앙의 생일을 기념했다. 아실은 자신이 태어난 계절만 알았고 에스티니앙은 원래 생일을 챙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알피노와 친분을 나눈 뒤부터는 그 애가 살뜰하게 선물을 보내주었다. 에스티니앙이 나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알피노는 한층 정성을 기울였다. 대충 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렸지만 알리제의 쌍둥이답게 완강했다. 에스티니앙의 생일을 축하해줄 수 있는 날이 그러지 못할 날보다 짧을 텐데 그럴 순 없다고. 하지만 알피노도 최근 몇 년 동안은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짧은 축하 카드를 보내는 게 다였다. 올해도 비슷하겠거니 싶었던 에스티니앙은 아침 식탁에 올라온 상자를 보고 의아해했다.
상자 뚜껑에는 보석을 쥐고 마주보는 그리핀 두 마리로 이루어진 문장이 음각되어 있었다. 알라미고에서 가장 오래된 보석공예 공방에서 주문한 거라고 했다. 시계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건 울다하인데 굳이 거길 고른 이유가 있나 물었더니….
“고장 나면 거기서밖에 못 고치거든.”
나 없어도 여행 좀 다니면서 살라는 뜻이라고, 아실은 말했다. 에스티니앙은 투덜거리지도 못하고 시계를 손목에 찼다. 선물의 의도가 야속한 것과는 별개로 시계는 에스티니앙의 취향이었다. 꾸밈이 거추장스럽지 않고 내구도가 좋았다. 시곗줄도 손목에 잘 맞아서 맵시가 살았다. 아실은 진작 사줄 걸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시계를 보는 폼이 섹시하다나, 뭐라나…. 별 걸 다 좋아한다 싶었지만, 에스티니앙 역시 안경을 쓴 아실을 본 뒤로는 패션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과거를 약간 후회했다.
에스티니앙은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다시 참석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도움이 되는 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다른 참여자들과의 워크숍 정도였다. 용이 인간과 어울려 살기 시작한 성도에서도 그가 안은 고민은 보기 드문 종류였다. 이런 문제를 상담하려면 오래 산 용이라도 데려와야 했다. 아무래도 브리트라 쪽이 더 낫지 않을까? 흐레스벨그에게 수명 차이가 나는 애인 얘기를 했다간 둘 다 죽상을 한 채 자리가 파할 것 같았다.
아실의 노화는 휴런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겉보기로 중년 즈음에 접어들자 신체 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 그는 가까운 곳을 보기 위해 안경을 써야 하는 현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불합리의 연속이야!’ 아마도 그 즈음이 아실에게는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노화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은 다들 세상을 떠났으니까. 옆에 남은 건 살 날이 한참인 애인뿐이었고.
어느 날 아실은 오후 내내 커르다스 서부고지에서 활을 쐈다. 절대 따라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탓에 에스티니앙은 시계 초침만 세며 그를 기다려야 했다. 며칠 뒤 장 볼 것을 정리하면서 화살은 얼마나 필요한지 묻자…. 아실은 ‘이제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다룰 수 있는 무기를 읊을 때 가장 먼저 활을 꼽던 사람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에스티니앙은 한참 목을 가다듬은 뒤에야 여상한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후 며칠간 그의 최대 과제는 ‘심란해하는 애인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였다. 오죽하면 워크숍에서 이 문제를 물어볼 정도였다.
정작 아실의 우울을 끝낸 것은 기공방에서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에스티니앙은 간만에 귀를 쫑긋 세우고 뛰쳐나가려는 연인을 붙잡아 옷가지로 무장시켜야 했다. 기공방으로 가는 도중에도 아실은 길 미끄러운 줄 모르고 자꾸 걸음이 빨라졌다. 그 바람에 에스티니앙은 아예 그를 업고 뛰었다.
아유나르트 가 장남의 뒤를 이어 2대 공방주가 된 것은 기공사 길드의 전설적인 수석 기공사, 조이…의 둘째 딸이었다. 휴런이었기 때문에 현 공방주 역시 일선에서는 반쯤 물러나 후계자에게 실무를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무려 성도의 영웅을 개인적으로 모셔놓고 하는 신제품 발표회에서는 뒷방에 앉아있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늙은이(한쪽은 겨우 중년 정도의 나이로 보였지만)가 손바닥만 한 총을 두고 호들갑 떠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다음 대 공방주가 될 젊은이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실은 총기류에 문외한인 에스티니앙을 위해 기공방의 신제품이 얼마나 굉장한 물건인지 설명해주었다. 무게가 어쩌고 약실이 저쩌고, 반동이 수준급으로 적어서 팔의 부담이 이러쿵저러쿵. 총기 생산의 후발 주자인 이슈가르드에서 이런 걸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혁신적인 거라고 열변을 토했다. 정작 에스티니앙은 그 설명의 반도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모처럼 들뜬 아실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아는 척했다.
“활? 차크람? 다 필요 없어. 총이 최고야.”
아실은 자신과 한 세기를 함께 한 무기들을 망설임 없이 처분했다. 고향의 나무로 만든 활만 빼고.
“이 정도로 오래 썼으면 쉴 때가 됐지. 나 죽으면 얘는 꼭 같이 묻어줘야 해.”
에스티니앙은 이제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오는 ‘내가 죽으면’ 타령에 익숙해졌다.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자 아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키스 세례가 쏟아지겠지, 생각하던 에스티니앙은 문득 심술이 나서 얼굴을 붙잡으려는 아실의 손을 이리저리 피했다. 하지만 발을 걸 거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탓에 우당탕 넘어져서 실컷 예쁨을 받았다.
중부 라노시아로 이사한 건 아실의 머리카락이 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일을 추진한 사람은 에스티니앙이었다. 몸이 힘든 걸 뻔히 아는데 추운 날씨를 견딜 필요가 있겠냔 거였다.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탓에 이슈가르드에서는 여유로운 노후를 보낼 수 없으리란 점도 한몫 했다. 새 집은 단층으로 문턱이 없고, 벽 곳곳에 짚을 수 있는 난간을 달아두는 등 편의성에 치중했다. 마음에 차는 매물이 없어 직접 지었다. 덕분에 에스티니앙은 건축가를 만나고, 작업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집을 비워야 했다. 손목에 찬 시계로 흐르는 시간을 재어보면서, 그는 이번 일만 잘 넘기면 다시는 아실과 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야심차게 이사한 집에서는 2년을 간신히 채운 뒤 퇴거했다. 사람들 사이에 구설수가 돌았기 때문이다. 성도에서 아실은 은퇴 모험가들의 모임을 위주로 친구를 사귀곤 했다. 그 방법이 울적함을 이기는 데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도 종종 마을 펍에 들렀다. 에스티니앙은 이슈가르드에서처럼 늘 같은 시간에 아실을 마중 나갔다. 성도의 영웅이다, 푸른 용기사다 흘끔거리는 시선이 지겨워 이사했던 만큼 둘은 주변에 은퇴 모험가라고 둘러댔다. 그런데도 남들 눈에는 보기 드물게 나이든 비에라와 새파랗게 젊은 엘레젠이 함께 사는 게 퍽 이상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아실을 데리러 갔더니, 연인이 술에 떡이 되어 기절해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기가 막혀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노인네 벗겨먹을 게 뭐 있다고 사람을 술독에 빠트려 놨냐고 말이다. 물론 아실이 워낙 말술이었던 탓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술값 계산을 위해 에스티니앙을 애타게 기다린 펍 주인뿐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주량만큼만 계산하고 나머지는 가차 없이 ‘술친구’들에게 미뤄버렸다. 이걸로 사이가 서먹해지면 좋고, 그러지 않더라도 아실이 끼었을 때는 술을 덜 먹지 않을까 싶었다.
에스티니앙의 꾀는 무서울 정도로 잘 맞아 들었다. 숙취에 된통 당한 아실은 며칠 금주하며 동네를 쏘다녔다. 펍에 간 날도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얼마 뒤부터는 아예 출입을 끊었다. 직접 구해서 먹는 술이 더 맛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일로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나? 에스티니앙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안 그래도 아실이 자신과 마실 술을 펍에서 다 마셔버리는 게 못마땅하던 차였다.
노후 자금만 믿고 아예 일을 쉴 수는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오렌지 수확 철이 되면 근처 농장을 옮겨 다니며 일손을 도왔다. 동네에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유 모를 호의, 안쓰러운 눈빛, 잡담을 나누다가도 동거인에 관한 얘기만 꺼내면 미묘하게 얼어붙는 공기…. 에스티니앙은 옛날보다는 인내심이 깊어졌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섯 번째로 일하러 간 곳에서까지 그런 분위기가 반복되자 이유를 묻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농장주는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애인하고 같이 산다면서?’ 설명하기 난감해 남들의 착각에 기대어 묻어두었던 진실이었다. 어떻게 말이 샜는지 궁금해 하며 수긍하자 이런 말이 이어졌다. ‘에그, 무슨 사연으로 그런 할아버지랑….’ 에스티니앙은 얼굴을 굳혔다. 무척 불쾌하니 사생활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그날 치 품삯을 받아 왔다.
“네가 쓸데없이 몸이 좋아서 그래.”
아실의 의견은 이랬다. 그는 깔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누군지 모르니까 다들 널 자기 사위 아니면 새 남편으로 본 거지. 아마 내가 진짜로 네 할아버지였어도 조만간 누가 결혼 얘기를 꺼냈을 걸? 근데 어쩌나. 그 할아버지가 아랫도리 임자였네.”
아실은 자기가 술에 인사불성이 됐던 날 입방정을 떨었던 것 같다고 했다. 시골이니 소문이 온 동네 문지방을 한 번씩 밟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 좀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 않으냐 지적했다. ‘나였어도 서른 초반인 어린애가 머리카락이 다 센 노인이랑 부부 사이라고 하면 노인네부터 의심스럽게 봤을 걸.’ 에스티니앙도 머리로는 그걸 알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문제였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젊은이 얼굴이라 잊어버렸나본데, 우리 나이 차이도 거의 백 살이라고. 오히려 좀 새삼스럽다. 이제 와서야 그런 욕을 듣다니….”
아실은 중얼거렸다. ‘다들 얼굴에 약하다니까.’ 그러곤 아직도 씩씩거리던 에스티니앙에게 내일 날이 좋으면 사냥이나 가자고 했다. 녹슬지 않은 활 솜씨를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에스티니앙은 다시 한 번 이사를 결심했다. 아실도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이슈가르드는 여전히 논외였다. 너무 오래 살았고, 너무 추웠다. 남은 곳은 사베네어 뿐이었다. 가능하면 라자한에 자리를 잡고 싶었다. 집을 비운 동안 아실을 돌봐 줄 도회지 사람을 붙여놓고서 에스티니앙은 이사 준비를 했다. 브리트라는 옛 인연이 지긋지긋하지도 않은지 기꺼이 돕겠다고 했다.
라노시아의 집은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는 어느 부호에게 팔렸다. 덕분에 라자한에 이사를 하고도 여윳돈이 꽤 남았다. 이번에는 아예 이웃들에게 이사 턱을 돌렸다. 음식을 안겨주며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는 게 성미에 맞지는 않았지만, 태수의 이름을 팔면 대체로 해결됐다. 의심 많은 사람들은 태수궁에 투서를 할 텐데, 그런 적극성은 오히려 환영이었다. 새 주민에 관한 민원이 들어오면 진실을 잘 알려달라고 브리트라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라자한은 둘에게 익숙한 도시였다. 숙소에 장기 투숙할 때도 있었고, 아예 집을 사서 머무른 적도 있었다. 오래된 도시 곳곳에는 그리운 풍경이 남아 있었지만 사람만큼은 아니었다. 주인이 바뀐 메리드의 주막에서 예전처럼 한 잔 걸치고 돌아오던 길, 에스티니앙은 문득 깨달았다. 니드호그의 피가 자신에게 오랜 젊음을 안겨주지 않았다면 라노시아에서 동정을 받는 쪽은 아실이었겠구나.
“넌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버티려고 했어?”
“익숙하니까 괜찮아.”
남들이 나이를 반대로 보는 일 정도는 종종 겪었다는 거였다. 아실은 자신이 한 번쯤은 애인의 노후를 돌보다 죽음으로 헤어질 줄 알았다. 하필 에스티니앙과 만나는 바람에 그 반대가 된 게 웃기다나. 너는 이런 얘기에 웃을 수 없겠지만.
“조금 아쉽기도 해. 네가 나이 든 모습이 보고 싶었거든.”
“그러게. 난 늙어도 미남일 테니까.”
에스티니앙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뭐, 눈을 감을 때까지 제일 잘생긴 얼굴을 볼 수 있잖아. 그럼 이득 아닌가?’ 이런 농담을 여상하게 던지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생각하면서.
요즘 아실은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 저녁을 먹은 뒤는 에스티니앙도 밀어놓고 책을 읽었다. 쏟아지는 잠을 못 이긴 나머지 책장에 손가락을 끼운 채 잠드는 게 다반사였지만 말이다. 아실이 잠에 빠지면 에스티니앙은 책을 조심스레 빼내어 가름끈으로 표시를 했다. 그런 다음에는 연인을 안아 들어서 침대까지 데려갔다. 코에 걸친 안경을 벗겨준 뒤에는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턱을 괴고서 잠꼬대 몇 마디를 훔쳐 들었다. 곱게 늙었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을 뜯어보다가, 이런 얼굴이 아니었더라도 얘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눈주름을 살살 매만지다가 이마부터 턱 끝까지 정성들여 입을 맞췄다. 그러곤 밀린 집안일을 하기 위해 일어났다.
설거지를 끝내고 가계부를 썼다. 아실에게 노화가 찾아온 뒤부터 틈틈이 쓰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참견 없이도 능숙하게 금전 출납을 기록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잠들기 직전에는 시계를 점검했다. 시곗줄은 아직 잘 버티고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의 전적을 보면 한 달 내로 끊어질 것 같기는 했다. 아실이 아예 여러 개를 마련해두고 번갈아 쓰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제안했기 때문에 내일은 가죽을 보러 갈 예정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최근 몇 년 동안 시계를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었다. 초침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어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럴 시간에 키스나 한 번 더 하는 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에스티니앙은 조용히 아실 옆자리에 몸을 묻었다. 깊이 잠든 연인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잠드는 순간은 어쩔 수 없이 두려웠다. 그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실이 시곗줄에 쓸 가죽을 골라주고, 책의 다음 쪽을 읽고, 잘 잤느냐 인사해주기 위해 일어날 거라고.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잠들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고르게 이어질 것만 같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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